불교사상의 이해
동국대학교불교문화대학불교교재 / 불교시대사 / 1999년 4월
평점 :
품절


불교 전반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기에 적합한 책이다. ‘양질의 불교 사상 입문서‘ 라고 이 책을 부른다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 교육•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에서 냈으며, 십여 명의 불교 각 분야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여함으로써 적당한 깊이도 갖춘 책이다.

불교는 ‘괴로움[苦]‘을 핵심 문제로 삼고, 깨달음을 얻어 이를 제거하고 열반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이다. 기본적으로 자아와 존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며(제법무아(諸法無我)),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본다(제행무상(諸行無常)). 이는 모든 존재요소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緣起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틀 안에 정토사상•선사상•윤회사상•화엄사상•중관사상•유식사상 등 여러 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를 읽고 위와 같이 불교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교를 학문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회의감이 들었다. 학문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중 일부를 특정한 기준으로 묶어 이들을 비교•분석하는 일이지 않은가? 이렇게 여러 종교를 싸잡아서 ‘종교학‘이라고 묶어 비슷한 현상이라는 것을 전제한 채 바라본다면, 신앙인과는 동떨어진 인식으로 종교를 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의 종교와 그 가르침을 ‘진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의 영역에서의 특정 종교는 비슷한 현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학자라면 종교에서 순수한 진리성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종교는 믿음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 믿음 역시 학자적 천성을 가진 자라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성향을 갖고 태어났다는 자기 인식을 갖고 있다. 때때로 종교와 인연이 있었으나 믿음을 깊게 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엔 남보다 더 영성적인 인간도 있다. 원인은 무엇일까?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붓다가 말했던 연기법이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 나는 이를 환경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이해한다. 즉 연기법은 모든 존재는 주어진 환경과 상황 속에서 인식을 얻고, 생각을 하며, 행동하는 것을 두고 ‘어떤 것도 자기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 아닐까, 라고.

141 예컨대 출가와 재가의 둘이 아님[不二]을 주장하며, 세속에서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는 「유마경」에서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꽃을 세속적 장식이라 하여 떼어 버리려고 하는 사리뿌뜨라(붓다의 10대 제자 중의 한 명으로 지혜 제일)에 대해 꾸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꽃 자체는 세속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가 그렇게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세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리뿌뜨라 자신의 분별이고 집착일 뿐 분별과 집착을 떠난 대상 자체는 애당초 청정하다. 마찬가지로 탐욕을 탐욕으로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은 탐욕을 떠나는 것, 즉 열반에도 집착하며, 열반도 그것에 집착하면 이기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유마경」에서는 바로 이같은 출가자의 이기적 욕망과 집착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 P141

268 현대의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 중심의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이씩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 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_선사상 - P268

308 행위에 대하여 선악의 판단을 하는 경우, 윤리적 주체로서의 ‘아뜨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무아(無我)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에서 과연 윤리적 행위가 성립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은 결코 윤리적 행위의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적 혹은 기능적인 ‘아뜨만(我)’을 인정하는 사고를 부정하여 ‘아(我)’에의 집착을 철저히 물리치고자 하는 데 있으며,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법구경」에도 ‘아뜨만’의 장이 있어, "자기 자신이 행한 악은 자기에서 돋아나며, 자기로부터 발생한 것이다.[161]",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악을 행하여 자신이 스스로 염오(染汚)된다. 자신이 악을 행하지 않아 스스로 청정하게 된다.[165]"라고 하면서 자기가 선악 행위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귀중함을 안다면 이[自己]를 잘 지켜야 한다.[157]", "자기야말로 자기의 주인이다. 대체 다른 누가 주인일 것인가. 실로 자기가 잘 조어됨으로 해서 사람은 얻기 힘든 주인을 얻는다.[160]"라고 하면서 자기를 애호하고, 자기를 잘 다스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의지할 본래의 자기를 추구한다는 선언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선언은 급기야 유명한 가르침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석존 최후의 설법의 하나로 행해진, 이른바 ‘자등명 법등명’의 교설이 그것이다.

자기를 ‘디빠(dipa, 등불 또는 섬)’로 삼으며, 자기를 귀의처로 삼되 남을 귀의처로 삼는 일 없으며, 법(法)을 ‘디빠’로 삼으며, 법을 귀의처로 삼되 남을 귀의처로 삼는 일 없이 (너희는) 주(住)하라.

여기서 가리키는 ‘자기’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상정된 것이 아니라 실천적·주체적으로 파악되는 자기이다. 그것은 자기가 의지할 본래의 자기, 진실의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이상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자기를 추구하되 그것이 ‘법’에 기초함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법(法)은 ‘다르마(dharma)’로서 ⓵법칙, 정의, 규범 ⓶가르침 ⓷진리, 영원한 최고의 진리, 최고의 존재 ⓸경험적 사물 등 4가지 의미로 나누어지는데, 위의 법등명의 ‘법’은 ⓵⓶⓷의 어느 것을 취하여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법칙 규범으로서의 법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 혹은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에 수순하는 자기야말로 본래의 자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_불교의 윤리 - P308

361 중성 미자 뉴트리노나 전자와 같은 입자는 일종의 내부 회전, 즉 스핀을 갖고 있는데(물론 모든 소립자들은 스핀을 갖고 있다.) 실험자가 입자의 스핀 방향을 알기 위해서 실험장치를 만들고 그 좌표가 될 특정 방향을 취하였을 경우(이 때 기준이 되는 방향은 전장 또는 자장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스핀이 장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입자의 스핀은 실험자가 선정한 기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입자는 실험자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언제나 실험자가 자유롭게 선정한 기준 방향으로 스핀의 회전 방향이 바뀌어 마치 실험자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미시적인 소립자의 세계는 이처럼 기묘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람이 무언중에 다른 사람과 직관적으로 공감을 느끼는 순간을 불교에서는 ‘염화미소’니 ‘이심전심’이니 하는데, 그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양자역학의 특징은 전자와 같은 물질입자가 마치 정신이 있는 양 인간의 정신과 교감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물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_불교와 과학 - P361

395
3)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된 종교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과 옳음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저옫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_불교와 다종교 사회


396
4)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과정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_불교와 다종교 사회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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