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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평점 :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힘없는 조선 땅과 조선 국민이 무참히 짓밟혔던 시기이다. 36년 동안 무수히 많은 수탈과 폭력·인권 유린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제는 오로지 국가의 전승(戰勝)을 위해 개인을 철저히 도구화하였다.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위안부 강제 동원’일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한다. 더 이상 이런 국가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품 속 ‘그녀(윤금실)’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유는 몰랐다. 동의 여부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어린 여성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열세 살에서 많아야 열여섯 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다. 몸과 마음이 채 다 자라지 않아 영양과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그런 나이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월경을 시작조차 않은 어린 여성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동원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소녀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가 다녀갔다. 일요일에는 50명도 넘게 다녀갔다(87p).’ 누군가는 ‘불두덩에 대고 성냥을 그어댔다(44p).' 그렇게 십여 년을 보낸 뒤,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을 맞아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잊혀졌다. 아니면 몸을 버리고 왔다며 손가락질 당하거나, 큰오빠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는다며 비난받아야 했다. 감정이 소진되어 눈물조차 나지 않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누구에게 털어 놓을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끌려가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밝힐 수조차 없었고, 홀로 엄청난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외롭게 살아야 했다. ‘그녀’ 역시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심지어 자식도 하나 없이 외롭게 한 많은 삶을 아흔 셋까지 살아왔다.
그런 한 많은 그녀지만,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신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56p).’ 항상 움츠리고 살아온 그녀가 역설적으로 신을 가장 두려워한다. 정작 악한 이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에도 말이다. 또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24p)'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 사람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인간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인간으로서, 짐승 같았던 이들의 행동이 초래할지 모를 신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열세 살이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만주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인간이었다(204p).' 물론 잔인한 일본 국가주의의 폭정 속에서도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 주고 고향에서 온 전보를 가져다 준 야전 우체국 국장, 전투를 앞두고 울던 일본 군인……. 심지어 향숙은 일본 군인들을 동정하기도 한다.
“일본 군인들도 우리처럼 부모형제하고 생이별하고, 목숨을 버리러 만주까지 왔대. 어제는 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니까 그러더라. 죽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서 엄마가 있는 조선에 돌아가라고…….”(174p)
작품 말미에서 한 생존자 할머니가 TV에 소개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소설 ‘부활’ 만 여섯 번을 읽었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방송사 여자에게 읽어준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서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어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191p)
‘누굴까? 누가 새끼 고양이를 양파망에서 꺼내 놓아주었을까?(205p)' 나는 고양이를 꺼내준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해치는 이가 있으면, 구하는 이도 있다. 망치는 인간이 있으면, 회복시키는 인간도 있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국가들에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한 나라에 역사적 과오가 아예 없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고, 기록이 남았다. 일본 제국을 계승한 현재의 일본이 ‘망치는 나라’를 벗어나 ‘회복시키는 나라’가 되고 싶다면, 대한민국과 위안부(성노예)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국가적 폭력 안에서, 국가보다 존엄한 한 명 한 명의 인간이 무참히 착취당하지 않았던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시는 지금이 일본이 인간의 얼굴을 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