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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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녀는 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찡그린 표정일까, 화가 난 표정일까, 체념한 표정일까,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일까.
그런데 신에게도 얼굴이 있을까?
그렇다면 신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처럼 늙을까?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 - P24

24 장롱에서 요를 내려 거울 아래에 편다.
문지방를 등지고 앉아 요를 손으로 쓸고, 또 쓴다.
서쪽으로 앉은 마루 깊숙이 오후 볕이 든다. 그녀의 그림자가 요 위로 오줌 자국처럼 번진다.
그녀는 요 위로 올라가 천장을 바라보고 눕는다.
눈을 감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녀는 잠들려 애쓰지 않는다. 인간이 잠을 안 자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그녀는 온전히 잠들었던 적이 없다. 몸뚱이가 잠든 동안에는 영혼이, 영혼이 잠든 동안에는 몸뚱이가 깨어 있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도로 뜨고 옆으로 천천히 돌아눕는다. 누군가 자신의 옆으로 와서 눕기를 기다리듯 손으로 요를 쓰다듬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다. - P24

41 그녀는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게 타고난 사주팔자인지, 기질인지, 신의 의지인지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이 합심해서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그녀는 신을 느낄 때가 있다. 간유리에 새벽빛이 번질 때, 풀숲에서 참새들이 떼 지어 날아오를 때, 다디단 복숭아를 베어 물 때……. 신을 느낄 때를 헤아려보던 그녀는 자신이 신을 느낄 때가 많다는 걸 깨닫고 놀란다. 생전 처음 도라지꽃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신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혹여나 신이 볼까봐 남의 집 마당에 떨어진 모과 한 알 몰래 줍지 않는다. 신이 들을까봐 속말로라도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는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보다 자신이 어쩌면 더 신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P41

90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다 하면서도,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 P90

128 분선은 자신에게 자주 오던 야전 우체국 국장에게 부탁해 고향으로 전보를 부쳤다. 그는 일본 동경이 고향으로 와세다 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우체국에 취직을 했는데 야전 우체국으로 발령이 나서 만주까지 왔다. 그는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주었다.
분선은 글자를 쓸 줄 몰라 금복 언니가 대신 써주었다.

저는 비단공장에 와 있어요. 돈 벌어 돌아갈 때까지 몸 건강히 계세요. 답장은 하지 마세요.

얼마 뒤 분선은 고향에서 부쳐온 두 통의 전보를 받았다. 우체국 국장이 그 전보들을 챙겨서 가져다주었다. 두 통의 전보는 한 달 정도 시간차를 두고서 도착했다.

어머니가 아파 죽어간다.

어머니가 죽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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