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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시집은 처음 읽었다.
평소에 스도쿠같이 머리 쓰는 취미를 좋아한다. 그래선지 수수께끼 같은 시들의 의미를 파악해가는 과정이 좋았다. 그야말로 시집 읽기는 나에게 순수한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앞으로도 시집을 종종 읽겠다.
120 하지만 미감의 차원뿐 아니라 윤리성의 차원에서 그의 시적 주체를 ‘무위‘의 상태로 제어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음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하고 만다.
교탁 위에 리코더가 놓여 있다 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그 아이의 리코더를 불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보고 있었다
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에서였다 ㅡ<레코더>
이 짧고 담담한 시 한 편은 어째서 쓸쓸하면서도 아린 지경으로 우리의 감정을 붙들어 놓을까. 아무도 없는 교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리코더. 시각뿐 아니라 청각의 관능성에 민감한 그의 특성상 리코더는 주체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물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인간이라면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갖고 싶고, 만약 리코더를 갖지 못한다면 한 번 불어라도 보고 싶을 것이며, 마지막에는 손을 대어 쓰다듬어라도 볼 터이다. 그게 사물을 대하는 보편의 인간이 펼칠 수 있는 행동으 상상 범주다. 그런데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다르다. 누구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섬망도 망상도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주체가 펼쳐 보이는 행동을 보라. 그는 그저 바라본다. 투명하고 담담하게 계속 바라본다! 자신의 손이 닿는 과일마다 썩어 있음을 발견했던 <원정>의 김종삼처럼, 마치 자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 죄를 짓게 될 것임을 예감하는 사람이라니. 시적 주체는 도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행동의 모든 것이 죄와 연결되는 프로세스를 지닌 시람에게 차라리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아닐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까.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황인찬이다. 대신 이런 식의 ‘무위‘에는 슬픔이 장막처럼 드리워 있다. 죄의식의 차원에서 이미 더럽혀진 자신을 발경하고 꾹꾹 울음을 참는 자의 비감이 서려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다가 결국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타뜨리고 말았다(<의자>)는 시는 기이하면서도 익숙하다. 처음으로 시적 주체가 일종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시가 출발하기에 기이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행동을 수행한 순간 내면화된 초자아의 목소리에 추궁을 당하다가 결국 죄를 인정하고 울어 버리는 것은 또 한편 익숙하다. 이전의 인용 시에서 "바다에 있었는데, 겨울이았다 잘못 들은 소리가 달려왔다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다구요// 빠졌다구요?// 바닷가에는 사람이 없다"(<파수대>)라고 말할 때, 이 자기 반영적 메아리에는 파수대에 서서 죄를 추궁하는 신의 목소리가 배어 있다. 이제 할머니가 가리킨 "언덕 위의 법원"은 우리의 상상 체계 속에서 ‘언덕 위의 교회‘와 겹치고, "하얀색 경찰차"는 ‘신의 처벌과 감시‘(<법원>)를 연상시키는 지경이 된다. 이들 시편들이 기이하게도 인간 본연의 죄의식과 처벌에 대한 공포심을 일깨운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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