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A도서관에서 빌려온 초판을 B도서관에서 일주일 걸려 읽고 북카트를 지나가는데 2016년 개정판이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 하필 다 읽은 그 날에.. 아무튼 개정판을 펼쳐보니 추가된 철학자들이 있고 머리말에 따르면 전면적으로 내용이 크게 개정됐다 하니,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여러 철학적 논점들을 각각 결정론의 입장과 그 반대(의지론이라고 하나?)의 입장을 대조하여 서술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읽으면서 나는 의지론 쪽에 더 마음이 갔다. 하지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은 운명론적 관점이기도 했다. 요새 내 맘대로 안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서였을까. 그야말로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하루였다.

 결국ㅡ 미래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


242 결국 하이데거의 근본적 통찰은 마음의 지향성이 어느 경우에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한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데 있었다. 익숙하게 사용하던 도구들이 망가질 때처럼 사물들과의 친숙한 관계가 와해되었을 때에만, 다시 말해 친숙한 사물들이 낯선 사물이 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 사물들을 의식적으로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사물들과 친숙한 관계에 있는 인간, 즉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평상시 사물들을 지향하지 않고 배려할 뿐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지향할 때에는 사물들에 대한 배려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뿐이다. - P242

257 표현은 매우 난해한데 사실 사르트르의 속내는 그의 주저인 『존재와 무』라는 제목에서 이미 웅변적으로 드러난다. ‘존재’라는 개념은 의자처럼 본질이 미리 정해져 있는 사물들, 따라서 자유가 없는 것들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반면 ‘무’라는 것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점,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 후자의 측면과 관련해 사르트르는 인간을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existence’라는 개념이 ‘실존’으로 번역되는 관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인간을 ‘existence’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밖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표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istence’의 번역어로 ‘실존’보다는 ‘탈존’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탈존’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부단히 넘어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예를 들어 매사에 소심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소심한 모습을 반성하여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대담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사르트르가 "탈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소심한 인간도 매번 대담한 인간으로 거듭나면서 계속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심함이란 것은 결코 그 사람의 주어진 본질, 변화될 수 없는 불가피한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르트르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대자’라는 개념으로 의도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자’라는 존재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반성하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과거나 현재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자기 의지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간에게만 미래라는 시간의 계기가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인간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즉 기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P257

263 청년 시절 알튀세르는 인간이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는 구조주의의 입장에 강하게 동감했었다. 이런 그가 새로운 구조의 가능성을 꿈꾸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기쁨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는 통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이 속한 구조가 슬픔을 준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실천할 것이라는 확신인 셈이다. - P263

282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여기서 ‘말하기’란 겉으로 표현되어 타자가 들을 수 있는 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말을 통해 표현 가능한 생각하기 작용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일종의 말하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말하는 동안에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말은 생각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생각을 먼저 하고 나중에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곤 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서 그에게 "돈 좀 빌려줄 수 있니?"라고 말하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메를로-퐁티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말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그에게 있어 "표현 앞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의 착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에 앞서 생각이 순수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것을 말과는 무관한 순수한 생각이라고 오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해는 생각 자체 혹은 타인에게 말하기 등이 모두 동일한 말하기의 사례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 제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떠한 종류의 생각이든 이미 말로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질문은 "나의 생각을 타자가 오해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바뀌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언어의 문제에 대한 동양철학자의 견해를 함께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동양에서는 언어 혹은 말의 기능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



통발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얻었다면 통발은 잊는다. 올무는 토끼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토끼를 얻었다면 올무는 잊는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장자』, 「외물」



타당한 말이다. 물고기를 잡았다면 통발을 제거해야 하고, 토끼를 잡았다면 올무를 벗겨 내야 한다. 여기서 통발이나 올무는 말을, 그리고 물고기나 토끼는 뜻을 상징한다. 표면적으로 장자의 이야기는 말을 경시하고 뜻을, 다시 말해 생각을 중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독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수 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경향의 해석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장자가 고민했던 것은 말과 생각 사이의 관계가 결코 아니다.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타자와의 의사소통이 낳는 난점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목을 보면 장자가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을까?"라고 한탄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라는 구절은 "내가 건네는 말을 통해서 타자가 내 속내를 알았다면 그는 나의 표현 방법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였던 셈이다.

실연으로 인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하늘이 오늘 유난히 푸르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타자가 만약 나의 상황과 나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곧 나타날 거야"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제3자가 우리들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는 매우 황당무계한 선문답이라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지 이런 타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내가 건네는 말로 내 생각, 다시 말해 내 의중까지를 알아주는 타자를 만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장자 그리고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을까?"라고 물었던 것은 바로 이런 소망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나만의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생각을 타자에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타자가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이야기했다고 확신하더라도, 타자는 언제든지 나의 확신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의사소통으로부터 야기되는 절망에 노출되기 쉽다. 다시 말해 세게나 인생에 대한 나만의 고뇌를 타자에게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좌절할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고독한 유아론에 빠지기 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그리고 미적인 문제에 대해서,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남을 어렵게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바로 여기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고뇌가 시작된다. 그는 타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비적인 일인가? 쓸데없는 오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성적인 청년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결벽증적인 태도인가? 타자로부터 받을 오해와 몰이해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이 청년은 소심했던 셈이다. - P282

300 마음은 기대·지각·기억이란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 『고백록』

우리는 흔히 시간이란 것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누곤 한다. 보통 과거라고 하면 이미 지나가 버린 때를, 현재라고 하면 지금 이 순간을, 그리고 미래라고 하면 아직 오지 않은 때를 가리킨다. 이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이 가진 세 가지 능력들, 즉 기억·지각·기대의 능력이 없다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 보아도 우리는 시간에 대한 그의 지적이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어제 일어난 일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어제라는 과거는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해진다. 나아가 어제 일어난 사건을 생각(기억)하느라 여념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쳐다볼(지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거칠 눈보라를 맞으며 스키를 타면서 설사면의 상태를 주시(지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내일 일어날 일들을 미리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 지각하는 순간, 그리고 기대하는 순간 등은 모두 그 자체로서 현재라는 점이다. 어제 일을 기억할 때 나는 어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이고, 내일 약속을 기대할 때 나는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최종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마지막으로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고 말이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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