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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당신이 가장 은밀한 소원은 무엇이었는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주기도 하고, 과자도 준다는 말에 혹해, 친구를 따라 (아니 정확히는 친구의 언니가 좋아하는 오빠를 따라) 교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적이 있었다. 한두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신이라는 존재가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내 소원을 들어주는 줄로만 알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겐 그것은 좀이 쑤시는 일이었고, 친구 역시도 옆에서 꼼지락거리기에 둘이 장난을 치다가 결국 우리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서 주위 신자들의 눈총을 받았었다. 도대체 내 소원은 언제 비는가, 과자는 언제 주는가 친구와 둘이서 연신 쫑알쫑알거리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깜빡 졸다보니 어느 순간 예배는 벌써 끝나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사람들이 울더란 말이다. 왜 저렇게 서럽게 우는가, 울어야만 신이 소원을 이루어주는가, 나도 울었었다.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울었는지, 혹은 다 큰 어른들을 울리는 그곳이 무서워서 울었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그 한번의 기억은 아직도 나를 두려움으로 밀어넣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결코 교회를 비판하고자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그때 내 나이 열살도 채 되지 못했을 때로 기억한다. 그 나이에 어떤 것이 그토록 이루고 싶어서 그곳에 발걸음을 했었는가, 아직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딱히 소원하던 것이 있었던가, 그조차도 모르겠다. 그저 정말 들어주는가, 그것을 확인하고자 갔던 걸까.

 

 

 

나는 아직도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을 법한 투명한 마음가짐으로(실은 그것이 어떤 건지 몰라 마음을 비운 것이 그것이라 믿지만) 정돈한 뒤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백점짜리 시험지를 안겨주세요,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해주세요, 예쁜 사랑을 하게 해주세요, 또, 행복하게 해주세요. -.. 내 기도를, 혹은 소원을 들어주는 주체는 찬연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되기도 하고, 창문 너머의 둥근 달이 되기도 하고, 밖에서 또르르, 또르르 우는 풀벌레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오래 전 돌아가신 할머니. 신자들에겐 신만이 그들의 종교라고 말한다면, 나에게는 내가 믿고 싶은 모든 것들이 종교가 되는 셈이다. 당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주체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 그런데 혹시, 동글동글한 것이 아닌 빼쪽하게 모나서 할퀴고 뜯겨나갈 듯한 소원을 빈 적이 있는가. 사실 난, 있다. 내일 아침이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리게 해달라는 누군가,라는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의 부재를 빌어본 적이. 그러면서 그 다음 날엔 행복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불행을 빌었으나 반대로 행복을 빌었고, 또 다시 불행을 비는, 그런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그런 내 뼈 마디가 아파오는 소원을 상기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여기에 소라게를 불로 지져 그의 희생으로 소원을 이루려는 아이들이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가만히 두고 보고 있기에는 아이들의 소원이 위험하다.

 

 

 

소라검님, 소원을 들어주세요.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 상처투성이다. 누구 하나 온전치 못하다. 나는 그 세 아이 중 누구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가. 아빠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한 채 엄마의 외도로 또다시 엄마의 상실과 맞닥뜨리게 된 신이치? 아버지의 폭력에 익숙해진 희생양으로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는 하루야? 엄마의 상실이 신이치의 할아버지인 쇼조때문인 것을 알고 그를 증오하는 나루미? 하지만 결코 자신의 상처가 그 누구보다 앞서거나 뒤쳐질 수는 없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나온 말 중 “남들한테는 먼지만한 가시같아도, 그게 내 상처일 때는 우주보다 더 아픈거래요.”라던 말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상처받고 그로 인해 성숙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초등생 5년,이라는 나이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 아니던가. 아직 한참을 보듬어 주어야 하는데, 그 손길이 끊겨버렸다. 그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이다. 하여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닿을라 치면, 소스라치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500엔의 돈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커져 같은 반 아이의 사고를 바라고, 급기야 엄마의 애인이 죽어버렸으면 하는 그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소원도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면서까지 관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지도. 하지만, 우리가 결코 더이상 수수방관해서는 안되는 까닭은 그 소원들이 하나 둘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의 소원이 온전치 못하기를 바랐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마음을 짓누를 만큼의 돌덩이가 앉아 아이들이 아주 많이 아프기를 바랐고, 그리하여 이루어지기 전에 깨어지고 부서지길 바랐다. 그렇게 해서라도 더이상은 그런 소원들이 자신의 마음에 안식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뜨려주고 싶었다.

 

 

 

 

사실 나, 당황스러웠다. 책을 넘기는 속도가 꽃을 전전하며 돌아다니며 팔랑팔랑거리는 나비와도 같았기에, 내가 이 책에서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재미를 느끼기엔 아이들이 소라게에 쏟는 시간이 턱없이 길었다,는 점이 내게는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오직 아이들은, 소라게를 붙들고 있을 때에만 입을 열었다. 집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단연 1인칭이었던 신이치뿐이었다. 그럼에도 답답했다.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적어도 신이치에게는, 하루야나 나루미에겐 없었을지도 모를 집에서 누구에게나 툭 터놓고 말할 상대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신이치, 뱃속에다가 너무 묘한 걸 기르지 말거라. (…) 무슨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야기하는 거다. 나든 네 엄마든 괜찮으니까.” 라고 말하던 쇼조가 있었으니까.) 저자는 그의 앙 다문 작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학교에서조차 남의 이목이 두려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소라게 앞에서만 껍질 속에 들어가 있던 자신들을 바깥으로 슬그머니 꺼내 놓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이야기가 사실은 무척이나 답답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대체 어디에서 내 마음을 놓아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던 것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끝내, 책에 마음을 둘 수가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그럼에도, 아이들의 껍질이 조금 물렀으면 좋겠다. 스스로 껍질을 벗고 나올 수 있을 만큼. 고로 나는, 아이들의 행복을 소망한다. 그들의 소라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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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명호 2011-05-1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 글씨가 하나도 안보여!!!! >.<

하늘보리 2011-05-11 16:3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알라딘 안그래도 승질나 죽겠어!!!!!!!!!
메인이 맨날 지 맘대로 바껴서 -.- 이거 도대체 메인을 어떻게 고정해야하는거야~
 
스타카토 라디오
정현주 지음 / 소모(SOMO)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때때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마구잡이로 엉키거나 찢기거나 깨진 채로 나뒹굴며 그것의 파편들이 마음을 찔러 아프게 한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나의 마음과 누군가의 마음에서 충돌이 생겨 삐걱거리며 어긋났을 때,를 의미한다. 그럴 때에 진정제 역할을 해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마음을 가장 느리게, 천천히, 또 오래도록 보듬는 것은 책인데, 그것은 단연코 에세이뿐이다. (물론, 여행 에세이는 제외하고.) 하하호호 거리는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을 읽기에는 내 마음이 불안정한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읽을 수가 없다. 읽히지가 않는데, 어떻게 읽는가 말이다. 그래서였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황사가 유난히 심했던 그 날에, 가벼운 츄리닝 차림에 삼백 그램에 미치지 못하 카메라를 들고, 얇디 얇은 책 한 권을 들고, 어딘가로 향한 것이. 물론, 정해놓은 목적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공원을 만나는 곳에서 잠시 쉬어 책을 펼쳐 몇 장 넘겨 읽다 말고 다시 일어서서 걷는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총 이백이십일쪽이라는 페이지는, 앉은 그 자리에서 주욱 읽을 수 있는 페이지임에 틀림이 없음에도 나는, 모이 한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닭처럼 그렇게 이 책을 소화시켰다. 한꺼번에 읽어 버리면 그것이 얹혀서 탈이 날 것만 같았던 까닭이다.  

 

 

 

그냥 걸으며 생각을 끊어내는 연습을 한다. 사람들의 무례함과 비겁함과 그들이 건넨 말 뒤에 숨은 칼날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품고 가기엔 너무 벅찬 현실과 누군가의 배려없음과 오만함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에 대한 생각들은 능내의 오솔길까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다. 평소에는 겁이 나서 할 수 없었던 끝없는 질문에 대한 생각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복잡해 질 때면 과감히 휴대전화를 꺼버린 채 습관처럼 걷기를 했었는데, 그때는 어떤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나왔던 생각들이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 어떤 것도 해결이라는 고리들을 발견해내지 못했기에 결국 그것들은 제 멋대로 엉키어 버리고 만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날이 갈수록 답답한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 쌓여감을 느꼈다. 그래서 어쩌면, 생각들을 늘어놓았는데 명확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여 다시 끌어안은 채 끙끙 앓는, 그 후에도 똑같이 반복되는 그것이 권태로워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단정짓고 그동안 멈춰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애초에 뭔가 해결하기 위해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혹시 욕심이었을까. 내가 그 생각을 하기 위해 이런 노력을 했는데, 왜 소득이 없단 말이냐, 따위의 본래의 의도가 상실된 무언가의 것. 위와 같은 문장을 읽고 있었을 때, 난 여전히 걷기 중이었다. 우습다. 의미가 없다고 해놓고, 걷고 있는 꼴이라니. 그날은 종일 웃질 않았는데 급작스레 웃음이 터졌다. 생각을 끊기 위해 걷는 사람과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 사람. 나는 그날 무슨 해결 방법을 찾고자 걸었던 걸까. 아니, 해결책은 분명 있었다. 해결책은, ‘마음가는대로’ - 그런데 그 마음이 뭔지 몰랐지 싶다. 그렇다면 내 마음 상태를 알기 위해 걸었을까. 아니,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날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도 가물거린다. 하지만 집에 들어설 때 안정을 찾은 것인지, 체념을 한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가기 전에 미친 듯 요동쳐서 위태롭던 나는, 없었다.

 

 

 

난생 처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찾아왔으나 여전히 나는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두려움에 한 발은 담그고 한 발을 뒤에 둔 채 언제든 도망갈 자세로 서 있는 나를 온전히 안아줄 리 없었다. 이별 후 오래 울었다. 슬픔 가을이었으나 아픔에게서 배운 것도 있었는지 더 이상 화분을 죽이지 않게 되었다.

 

글을 읽으며 재작년(09년)을 떠올린다. 오랜 첫사랑의 열병이 있었다. 3년이었고, 그곳에 2년이 더 보태어졌다. 그렇게 하여 무려 5년이었다. 그 중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몇 개월도 채 되지 못했다. 그것에 안녕을 내밀었던 것은, 함께 하기 전의 환상,이 깨지던 순간이었으리라. 어찌됐건, 그 환상이 깨지고 나서도 나는 2년을 더 아파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시작할 용기는 내지 못한 것은 그저 묻어두고 싶었다,는 까닭이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 첫사랑은 적어도 예쁜 사람으로 남길 바랬다,는 자질구레한 욕심이었던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끝내 마음은 아물지 못했고, 그를 잊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었다. 필요로 의해 맺어진 관계는 금방 깨져버린다는 책에 나온 말과 같이 몇 주, 몇 달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찾아온 사람에게서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싶었으나, 결코 몇 년이라는 시간에도 사랑으로 부르는 것을 내 스스로 거부했던 그 사람을 떠나 보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가 첫번 째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두번 째요, 그 사람이 없어야 살 수 있겠다는 이유가 세번 째였다. 그리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한달도 되지 못한 채로 현재 그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뚝뚝했던 그는 바뀌어 갔지만, 나는 좀처럼 바뀔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힘들어했고, 나는 그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며 털어놓은 뒤에 노력해보겠다,고 했었다. 두렵다,는 나에게 현재에만 충실하자,고 했던 그가 있었기에 여전히 진행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사랑이란 잘 씌여진 좋은 책과 같아서 곱씹을수록 새록새록 이해가 가는 것이었으며 한없이 이해하려 해왔는데도 또 이해할 것이 남아 있고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읽어 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또박또박 한 걸음씩 걸어 사랑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가고 나면 사람들은 물론 살아가는 일까지도 한결 다르게 보인다는 것. 적어도 내겐 그것이 사랑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유다.

 

정현주, 그녀는 예쁘다. 아니, 그녀가 속한 세상이 참 예뻐 보인다. 특히,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은 무척이나 빨갛고 또, 싱그러워 보인다. 그래서 부러웠다. 나는 그 열정이라는 녀석을 품에 안고 만져볼 수 있을지, 내게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 내 안에 있는 것을 아직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녀의 글을 읽으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겠다, 생각한다. 툭툭 끊어내는 문장이 아닌 기다랗게 늘어진 문장이라 긴 호흡을 요구한다. 그 호흡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러려면, 앞서 말했듯 여유가 필요했다. 그로 인해, 내 마음 구석구석에 분포하고 있던 불안함이 한층 누그러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기분이었달까. 소소한 일상들이 가득 담긴 그녀의 일기장에 내 마음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렇게 나는, 답답했던 하루를 위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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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로기완을 만났다 - 조해진 :

삶의 근원적인 슬픔을 말하는 동시에 연민과 유대를 통한 희망을 역설하는 작품-.이라는 설명 속에 모든 말들이 녹아있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어엿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요. 저자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고.

 

꺼져라, 비둘기 - 김도언 :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가늠할 수 없는 책들도 수두룩한데, 그와 반대되는 양상들이 보입니다.

이야기와 줄거리는 간단하다. 인물은 평면적이다. 이보다 친절할 수 있을까요.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될런지요. 글쎄요.- 

 

옷의 시간들 - 김희진 :

상처를 받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로 곪게 두다가, 그것이 썩어버리면 어쩝니까. 그것을 당신은 어떻게 치유하실 생각이십니까.

빨래방에서의 하루들이 그녀의 상처에 고스란히 치유제가 되어주겠지요.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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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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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신간 소식, 꽤 오랜만임에도 불구하고 멈칫하게 된다. 재작년(09)에 읽은 「내 심장을 쏴라」의 수명과 승민이 상처에 엉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처럼 내게 들러붙어 있는 까닭이었다. 나는 한국 소설이라 하더라도, (때때로 그것이 현재 읽고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이름들을 기억해내지 못하여, 서평을 찾아 보거나 책을 펼쳐 가장 맨 앞의 장에 오밀조밀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보고 나서야 간신히 그들을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하루이틀이 아니다. 헌데, 구태여 그때 썼던 서평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책을 첫 페이지를 펼쳐보지 않아도, 수명과 승민의 모습이 선연한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물론, 난 성까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듯, 저질 기억력은 늘 한탄스럽기만 하다.) 또한,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기분을 아직까지도 담아두고 잊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도 단 한 권의 책을 두어번 읽는 것으로. 하지만, 그 책 - 초반에는 지독하리 만큼 읽히지 않아 읽을 때마다 도중에 책을 몇 번이고 덮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그것을 반복했다. 놓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손에 쥘 수밖에 없었던 건, 서평책이라는 명목이 아닌 오로지 세상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나를 투영시킨 수명과 승민 때문이었으리라. 정유정,- 이름 석자를 기억할 수 있는 것 또한 오로지 그들의 몫이었고 앞으로도 그들 몫이 될 줄로만 알았다. 헌데, 다른 인물들을 품에 안고 오물조물 만져댄다니. 까닭을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드는 게다. 그렇게 따지고 들자면, 정유정 작가는 평생토록 내게 「내 심장을 쏴라」라는 소설로만 읽혀져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러므로, 정유정 작가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이 욕심이 났고, 또 어쩌면 그래야만 했다. 작가 박범신의 “그녀는 괴물같은 ‘소설 아마존’이다.”라는 수식어도 영 불편스럽게만 느껴져 책을 받자마자 띠지 먼저 떼어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버리고, 한참을 쳐다봤다. 읽고 싶다,가 아니라 그저 욕심이었던 게지. 이 책을 꼭, 가져야 겠다,는 추레한 욕망같은 것. 허나, 직접 내 돈 주고 구매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었기에 언제까지고 책장 속에서 뒤집어둘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그 핑계가 아니었더라도 난 이것을 사월이 가기 전, 읽었겠지. 팔과 발이 없어 언뜻 배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누군가 남편에게 자신의 삶을 걸고 지켜야 할 ‘어떤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자신을 포함한 모든 걸 버릴 수 있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 답을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어떤 사람’을 버리는 것이 지키는 길이라면, ‘어떤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도 이 역시 ‘예스’라는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서원을 그녀에게 데려가라고 한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서원을 버리는 것 말고는 지킬 길이 없다는 의미.

 

세상은 ‘지난밤 일’을 ‘세령호의 재앙’이라 기록했다.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살인마’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를그의 아들’이라 불렀다. 그때 나는 열두 살 이었다. 날 먹은 술이 문제였고, 눈을 시리게 만들 정도로 뿌연 안개가 문제였고, 그 속에서 급작스레 튀어나온 여자아이가 문제였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의 입에서 신음소리처럼 나왔던, “아빠.”라는 소리를 막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한 순간에 살인자가 되었다. 서원의 눈에 반달 같은 미소가 번졌다. 애정과 믿음이 담긴 눈웃음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초라한 삶을 견디게 하는 달빛이었다. 그랬기에 서원이 아빠를 살인자로 기억하는 건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최서원이란 이름 뒤에 붙을 ‘살인범의 아들’이란 딱지가 죽음보다 무서웠다. 여자아이의 “아빠.”라는 소리만큼, 어쩌면, 아니 틀림없이 그보다 더 막고 싶어 했을 ‘살인범의 아들’ - 하지만 서원은 아빠에 의해 자신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했던 여자아이도, 그 아이의 아빠도, 자신의 엄마도, 나아가 동네주민까지도 죽어 ‘미치광이 살인마’의 아들,이 되어 버렸다. 나도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당황하고,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곁을 내줘서는 안 된다. 거지처럼 문간에 서서, 몇 시간씩 기다려서라도 일한 대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사는 나의 힘이다. 아니, 자살하지 않는 비결이다. 그래서였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빠를 죽도록 미워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아빠에 대한 분노와 증오와 미움의 덩어리가 서원을 세상으로부터 거부를 당할지언정 추방당하지는 않게 칠년이란 세월을 살게 한 게다. 그런데, 서원에겐 무엇이 우선이었을까. 사실과 진실의 간극 속에 새근새근 잠든 ‘그러나’였을까, 소록소록 잠든 ‘그러니까’였을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의 입술 사이에서 “아빠.”라는 소리로 어둠이 세상을 삼켰을 때 최현수가 한 일은 분명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기에 ‘가해자’라고 일컬어져도 어떤 명분거리도 없음은 분명하다. 헌데, 그의 아비 오영제는 어찌하여 명백한 ‘피해자’ 범주에 들어가는가. 누가, 어떤 이유로 ‘피의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어 망아지새끼처럼 날뛰는 그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게만 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피해자’는 누구이고, ‘가해자’는 누구인가. 전에 읽었던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여선생을 보며,피해자가 직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리를 내주어도 좋은가,에 대한 생각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여선생은 한 순간의 장난으로 딸아이를 잃은 직접적인 피해자였기에 그것에 대한 생각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었더랬다. 하지만, 오영제, 그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교정’할 수 있는 소유물이 자신이 정해준 위치인 제자리에 있기를 바랬던 게다. 사고 당일, 오줌 지리도록 무서운(글을 읽고 있던 나조차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교정’을 받은 세령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태어난 생일에, 곤히 자고 있는 침대에서, 그리고 여느 곳보다 안락할 집에서 아이를 내 몬 것은 누구란 말인가. 이래도, 그를 끝까지 ‘피해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책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무엇보다 내가 유심하게 지켜본 것은 사형제도. (저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사형제도가 존재한다. 글쎄. 좋은 방법일까. 현재 읽은 책 중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 이것들의 공통된 것은 사형제도라는 틀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글쎄. 나는 사형제도에 ‘결사반대’, ‘절대찬성‘ 중 그 무엇도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찬성’에 동의한다. 그런데, 위에 나열한 책들은 항상 내 머릿 속의 그 생각들을 뿌리채 뽑아놓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도 아닌, 그 무엇도, 어떤 것도 대용할 수 없는 사람의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법률이기에 안락사도 그와 마찬가지인 이유로 현대사회에서 논란이 끊이질 않는 이유일 게다. 死刑 -. 어디까지 옹호해야하고 배타해야하는 것인가. 당신이 상대의 생명을 당신의 손바닥이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의 목숨은 누군가의 손바닥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러던 중 간밤에 김길태가 무기징역으로 확정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형제도는, 필요하다.

 

 

  

그래서였어. 그래서…… 넌 아니기를 바란 거야.

 

책을 다 덮고 난 뒤에 오는 안도감이 벌게진 얼굴을 식힌다.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결코 하고 있던 팩이 속눈썹에 아롱진 까닭은 아니었다. 영영 사람들의 입방아에 ‘살인범’으로 남을 현수가 가여워서도 아니요, ‘살인범의 아들’로 살게 될 서원이 가여워서도 아니요, 오영제의 결말(ex. 권선징악)을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적 조창인의 「가시고기」를 몇 번이고 되돌려 읽으면서 분명, 소극적일지라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이보다 더하게 표현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었고, 김민기의 「눈물의 아이」를 읽으며 그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었다. 「7년의 밤」 이 역시 그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오영제에게 ‘교정’이 그의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면, 최현수에게는 지키기 위한 것이 사랑이었던 게다. 물론, 극과 극의 인물을 제시했기에 조금 더 역동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이다. 앞서 박범신 작가가 아마존 같다고 했었나. 아니, 세령호였다. 세령호에 마음먹고 물을 채운다면 얼마의 깊이까지 찰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난 딱 그 정도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별 다섯 개인 이유는, 그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정유정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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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 양쪽의 세계
권리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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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여행기에 놓아야 할지, 철할에 놓아야 할지, 예술 일반에 놓아야 할지, 아니면 문학과 취미 사이 애매한 선반에 애매하게 놓아두어야 할지.’ 이것이 오롯한 여행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갈등을 한 것도 잠시 아니, 라는 대답과 함께 에세이로 밀어넣는다. 비단 여행한 흔적을 증명할 사진이 없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여행기에 분류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여행기네, 아니네를 따지자면, 일전에 읽었던 작가 박준의 「책여행책」도 사진 한 점 없다는 이유로 여행기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한치의 의심도, 어떠한 일언반구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여행기라 일컫고 있다. 하지만 작가 권리의 「암보스 문도스」 - 이것을 여행기라 치부해 버린다면, 이 책은 결코 (지극히 주관적인 내 판단 아래) 좋은 책이 될 수 없을 게다. (적어도 나에겐) - 이렇듯 내가 이 책을 여행기에 넣지 않는 까닭은, ‘여행기’라는 한정된 장르에 얽매여 있기에는 작가만의 냉소적이지만, 결코 냉소적이지 않은 내면들이 박탈당하는 것만 같달까.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여행이라는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느끼는 곳에서 응어리진다. 그래서 일거다. 이 책의 장르를 명료하게 구분짓지 못하는 것이.

 

 

 

나는 문학이라는 여정이 마치 평생의 배우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남편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 카프카는 우울할 때만 연락해 함께 침대에서 뒹굴며 술을 마시고픈 남편이었다. (…) 도스토옙스키가 술과 도박과 여자라는 3대 악에 찌든 방탕한 남편이라면, 카뮈는 남편이 없는 사이 바람을 피우고 싶은 상대였다. 전자가 나랑 한바탕 싸우고 집을 나가버릴 것 같은 남편이라면, 후자는 내게 외투를 입고 정오에 산책을 나가자며 차를 대기시키고 있을 것 같은 남편이었다.

 

그녀에게 몽상가적 기질이 있다는 것은 책의 앞부분을 읽으며 약간의 의구심을 품는 것이 전부였지만, 러시아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면서, 그녀에게 ‘글을 쓰게 한 요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넌지시 ‘남편론’을 꺼내어 놓은 것을 들음으로써 명료해졌다. 그녀의 남편들을 소개받으며, 나와 그녀 간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웠음은 물론, 나도 그 남편들을 가져본 후 그것을 느껴보다,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그들 모두는 나에게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들,일 뿐이다. 그렇게 또 언젠가,..라며 미뤄두는 내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아니, 정확히는 수전 손택의 글을) 약간 모방하여 말한다면 나도 그 못지않은 남편들이 있다. 비오는 수요일이면 장미꽃을 건네줄 것만 같은 기욤 뮈소가 있는가 하면, 평생 잊고 살 것처럼 돌아서놓고 삶이 권태롭다거나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에 찾으면 씨익 미소짓지만 등 뒤에 칼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고, 지독한 열애가 끝난 뒤엔 달려가 품에 안기고픈 츠지 히토나리가 있으며, 자기 전에 머리맡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목울대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시를 읊어주는 윤동주가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밤새 육체의 고통으로 끙끙 앓는 나를 밤새 간호해줄 조두진도 있다, 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펜대를 쥘 힘을 주지는 못했다. 그저 품 속에서 알량한 감정들을 속삭였을 뿐. 헌데, 그녀는 그들이었다고 이야길 한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글을 쓰게 만든 것이. 하지만 비단 그뿐이었을까. 그들이 그녀의 글쓰기의 전부였을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글쓰기는 헤어진 연인처럼 여러 의미로 퇴색되어갔다. 처음에 그것은 종교였으나, 이내 오락이나 시간때우기로 생각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통의 도구였다가,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두레박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은 영혼에서 멀어지려는 나를 붙들어 매어준다. 실은 나, 그녀의 글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을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오롯한 그녀의 글쓰기인 까닭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글쓰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있듯이. 혹은, 낙서와 같은 사소한 한 줄의 문장이 마음에 새겨져 지우개로는 지워질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자식을 뿌리는 수컷처럼 수많은 사진을 찍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그 흔한 사진 한장 없다. 왜? - 무차별적으로 찍는 동안 사진이 기억을 대신한다. 뇌는 기능을 멈추고 오로지 장전된 총만 바쁘게 돌아간다. 왜 우린 찍는가? 왜 찍지 않으면 죄의식이 드는가? ‘기억하지 못할까 봐’라는 말에는 너무나 많은 핑계가 숨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실 충분히 기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기를 회피해버린다. 기억의 단초를 만들기 위해 사진으로 남겨둔다지만, 몇몇을 제외하면 대개는 기억을 위한 기억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찍는다. 내재된 폭력성과 소유욕이 빚어낸 불안한 습관. 기억을 위한 기억,이라고. 참 씁쓸하기 그지없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옳은 문장들의 행진에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도 흔히 어느 곳에 놀러간다,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카메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뿐만 아니라, 찰나의 그 순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카메라 렌즈를 피사체에 얼마나 오래도록 두고 있었던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본 그 풍경이, 그 세상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 역시도 이 도시에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말자, 손가락과 눈과 마음에 자유를 줘보자,라고 결심했지만 그녀 역시 그 욕망을 쉬이 이겨낼 방도가 없더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카메라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카메라가 저절로 손에 딱 붙어버려 저절로 전원을 켜고 앵글과 구도를 맞추더니 셔터를 누르고 도로 가방 속에 들어가 꼼짝 않았다고. 그렇게 저자는 기억을 위한 기억 몇 장을 또 만들어 냈을 게다.

 

 

 

 

즐거웠다. 여행에 대한 그녀만의 철학을 내세워 정의해놓은 이 책을 읽는 것이. 또, 그 안에 녹아든 여행의 행보를 함께 하는 것이. 그러고보면, 나는 대체적으로 솔직한 글을 좋아하는가 보다. 일전에 작가 윤미나의 「굴라쉬 브런치」를 읽었을 때도 솔직한 여행에세이에 깔깔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표현때문에 웃을 일이 좀 있었는데, 기억나는 것만 적어두자면 카지노에서 알바를 하던 중, 이가 하나도 없는 터키 출신 노인이 기계에 떨어진 동전을 집는 것을 보며 동전을 가로채가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는 것에서 ‘볼이 썩는 것 같았다.’는 표현에 마시던 커피를 도로 뱉을 뻔 한 적이 있는가 하면, 리컨펌을 하지 않고 바로 SBY 티켓(스탠바이티켓)을 발급받았지만, 한시간 전에 탑승 완료가 되어 비행기를 놓치게 되어 막막하던 통에 “호텔 숙박권과 600유로를 드릴게요” 라는 직원을 보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써놓은 문장을 읽고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며 큭큭거리며 웃기도 했었다. 그러나 몇 개월 만에 둑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모기를 잡고 난 뒤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고서도 갑자기 엉엉 울고 싶어질 만큼 심신이 지쳐 있었다고. 그래서 마음이 아니라 몸을 괴롭혀보라는 친구의 조언에 내적으로는 종교 생활을, 외적으로는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운동이라는 것이 브라질에 끌려간 흐인 노예들이 지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무술인 ‘카포에이라’ - 그것으로 활력을 되찾은 저자는 자신만의 암보스 문도스 왕국에서 벼룩이 득실거리는 개보다 행복하다는 그녀가 진정 행복해보인다. 헌데, 프롤로그에서 보았을 때, 귀향이 본질적인 목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그곳은 찾았을까. 그곳이 그녀만의 암보스 문도스에서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바란다. 어디서든지, 그녀의 귀향이 순조롭기를.

 

 

 

 

p118 , 2번째 줄 : 여기서 다분히 아옌데의 약녀 기질이 드러난다 → 약녀의 뜻이 ‘어린 딸’이라고 나와 있는데, 글쎄, 맞을까. 그냥 의문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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