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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카토 라디오
정현주 지음 / 소모(SOMO)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때때로,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마구잡이로 엉키거나 찢기거나 깨진 채로 나뒹굴며 그것의 파편들이 마음을 찔러 아프게 한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나의 마음과 누군가의 마음에서 충돌이 생겨 삐걱거리며 어긋났을 때,를 의미한다. 그럴 때에 진정제 역할을 해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마음을 가장 느리게, 천천히, 또 오래도록 보듬는 것은 책인데, 그것은 단연코 에세이뿐이다. (물론, 여행 에세이는 제외하고.) 하하호호 거리는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소설을 읽기에는 내 마음이 불안정한 탓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읽을 수가 없다. 읽히지가 않는데, 어떻게 읽는가 말이다. 그래서였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황사가 유난히 심했던 그 날에, 가벼운 츄리닝 차림에 삼백 그램에 미치지 못하는 카메라를 들고, 얇디 얇은 책 한 권을 들고, 어딘가로 향한 것이. 물론, 정해놓은 목적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걷다가 공원을 만나는 곳에서 잠시 쉬어 책을 펼쳐 몇 장 넘겨 읽다 말고 다시 일어서서 걷는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총 이백이십일쪽이라는 페이지는, 앉은 그 자리에서 주욱 읽을 수 있는 페이지임에 틀림이 없음에도 나는, 모이 한번 먹고 하늘을 쳐다보는 닭처럼 그렇게 이 책을 소화시켰다. 한꺼번에 읽어 버리면 그것이 얹혀서 탈이 날 것만 같았던 까닭이다.
그냥 걸으며 생각을 끊어내는 연습을 한다. 사람들의 무례함과 비겁함과 그들이 건넨 말 뒤에 숨은 칼날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품고 가기엔 너무 벅찬 현실과 누군가의 배려없음과 오만함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았어야 할 일에 대한 생각들은 능내의 오솔길까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다. 평소에는 겁이 나서 할 수 없었던 끝없는 질문에 대한 생각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복잡해 질 때면 과감히 휴대전화를 꺼버린 채 습관처럼 걷기를 했었는데, 그때는 어떤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나왔던 생각들이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어 어떤 것도 해결이라는 고리들을 발견해내지 못했기에 결국 그것들은 제 멋대로 엉키어 버리고 만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날이 갈수록 답답한 마음이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 쌓여감을 느꼈다. 그래서 어쩌면, 생각들을 늘어놓았는데 명확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여 다시 끌어안은 채 끙끙 앓는, 그 후에도 똑같이 반복되는 그것이 권태로워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단정짓고 그동안 멈춰있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은, 애초에 뭔가 해결하기 위해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혹시 욕심이었을까. 내가 그 생각을 하기 위해 이런 노력을 했는데, 왜 소득이 없단 말이냐, 따위의 본래의 의도가 상실된 무언가의 것. 위와 같은 문장을 읽고 있었을 때, 난 여전히 걷기 중이었다. 우습다. 의미가 없다고 해놓고, 걷고 있는 꼴이라니. 그날은 종일 웃질 않았는데 급작스레 웃음이 터졌다. 생각을 끊기 위해 걷는 사람과 생각을 하기 위해 걷는 사람. 나는 그날 무슨 해결 방법을 찾고자 걸었던 걸까. 아니, 해결책은 분명 있었다. 해결책은, ‘마음가는대로’ - 그런데 그 마음이 뭔지 몰랐지 싶다. 그렇다면 내 마음 상태를 알기 위해 걸었을까. 아니,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날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조차도 가물거린다. 하지만 집에 들어설 때 안정을 찾은 것인지, 체념을 한 것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적어도 나가기 전에 미친 듯 요동쳐서 위태롭던 나는, 없었다.
난생 처음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찾아왔으나 여전히 나는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두려움에 한 발은 담그고 한 발을 뒤에 둔 채 언제든 도망갈 자세로 서 있는 나를 온전히 안아줄 리 없었다. 이별 후 오래 울었다. 슬픔 가을이었으나 아픔에게서 배운 것도 있었는지 더 이상 화분을 죽이지 않게 되었다.
글을 읽으며 재작년(09년)을 떠올린다. 오랜 첫사랑의 열병이 있었다. 3년이었고, 그곳에 2년이 더 보태어졌다. 그렇게 하여 무려 5년이었다. 그 중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고작 몇 개월도 채 되지 못했다. 그것에 안녕을 내밀었던 것은, 함께 하기 전의 환상,이 깨지던 순간이었으리라. 어찌됐건, 그 환상이 깨지고 나서도 나는 2년을 더 아파했다. 그러면서도 다시 시작할 용기는 내지 못한 것은 그저 묻어두고 싶었다,는 까닭이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 첫사랑은 적어도 예쁜 사람으로 남길 바랬다,는 자질구레한 욕심이었던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끝내 마음은 아물지 못했고, 그를 잊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었다. 필요로 의해 맺어진 관계는 금방 깨져버린다는 책에 나온 말과 같이 몇 주, 몇 달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찾아온 사람에게서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싶었으나, 결코 몇 년이라는 시간에도 사랑으로 부르는 것을 내 스스로 거부했던 그 사람을 떠나 보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가 첫번 째요,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두번 째요, 그 사람이 없어야 살 수 있겠다는 이유가 세번 째였다. 그리고 그 사람을 떠나보내고, 한달도 되지 못한 채로 현재 그와의 만남이 시작됐다.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질 수 없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뚝뚝했던 그는 바뀌어 갔지만, 나는 좀처럼 바뀔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힘들어했고, 나는 그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다,며 털어놓은 뒤에 노력해보겠다,고 했었다. 두렵다,는 나에게 현재에만 충실하자,고 했던 그가 있었기에 여전히 진행형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사랑이란 잘 씌여진 좋은 책과 같아서 곱씹을수록 새록새록 이해가 가는 것이었으며 한없이 이해하려 해왔는데도 또 이해할 것이 남아 있고 한 글자 한 글자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읽어 가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또박또박 한 걸음씩 걸어 사랑의 한가운데를 통과해 가고 나면 사람들은 물론 살아가는 일까지도 한결 다르게 보인다는 것. 적어도 내겐 그것이 사랑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유다.
정현주, 그녀는 예쁘다. 아니, 그녀가 속한 세상이 참 예뻐 보인다. 특히,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은 무척이나 빨갛고 또, 싱그러워 보인다. 그래서 부러웠다. 나는 그 열정이라는 녀석을 품에 안고 만져볼 수 있을지, 내게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 내 안에 있는 것을 아직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닌지. 그녀의 글을 읽으려면,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겠다, 생각한다. 툭툭 끊어내는 문장이 아닌 기다랗게 늘어진 문장이라 긴 호흡을 요구한다. 그 호흡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러려면, 앞서 말했듯 여유가 필요했다. 그로 인해, 내 마음 구석구석에 분포하고 있던 불안함이 한층 누그러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 기분이었달까. 소소한 일상들이 가득 담긴 그녀의 일기장에 내 마음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렇게 나는, 답답했던 하루를 위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