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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월담
누쿠이 도쿠로 지음, 한성례 옮김 / 씨엘북스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아, 초하룻날이었구나. 머리 위에서 별이 몇 개쯤 반짝일 뿐 밤하늘을 비추는 달은 그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분명 제자리에 있을 텐데도 보이지 않는 달.
달은 바로 나였다. 사쿠라 레이카는 큰 상 후보에 올라 쏟아지는 주목을 받지만 그 실체인 고토 가즈코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미녀 작가라는 가짜 옷을 뒤집어쓴 나. 기노우치와도 남몰래 만나야 하는 나. 고토 가즈코를 똑바로 봐주는 이는 이 세상에 기노우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악착같이 기노우치한테 매달렸다. 결코 놓지 않고.
달이 없는 새로운 달, 신월(新月)밤을 홀로 걷기 시작했다. 외롭지 않았다. 이 길은 내가 정한 길이니까. (597쪽)
당신 마음을 조금은 알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안타깝군요. 어쩌면 조금 부러운지도. 저한테는 이런 말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누구나 자신이 가진 못난 점은 아주 크게 보입니다. 그것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거의 모두 그대로 살아갑니다. 바꾸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아니, 본래 자기 모습에 익숙하고 바꾼다고 달라질까 싶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그래도 아주 조금 용기를 내는 사람도 있죠. 그 안에 사쿠라 레이카 씨도 들어가는군요. 그런데 처음에만 좋았던 것 같고 다시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합니다. 바뀌어서 자신을 가지면 좋겠지만, 레이카 씨는 바뀐 자기 모습을 어색해하기도 했죠. 스스로 ‘나는 가면을 쓰고 있구나’ 했잖아요. 본래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레이카 씨는 인공 가면을 쓰게 되었군요. 그래서 하게 된 것이 소설쓰기였는데. 아주 예쁜 얼굴 때문에 안 좋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군요. 왜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에 맞는 얼굴이 있다고 생각할까요. 눈에 띄지 않는 사람만이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도 별로 눈에 띄지는 않는군요. 못생겼다기보다 그냥 보통이라서. 그리고 그것은 제가 바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기.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저를 봐주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인 것 같군요. 레이카 씨도 그랬겠죠. 한사람이 자신을 봐준다면. 레이카 씨는 많은 사람보다 단 한사람이 자신을 봐주기를 바란 거죠. 가장 처음 자신을 인정해준 사람. 하지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또 안타깝군요. 좀 더 좋은 사람을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레이카 씨는 자신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이카 씨는 기노우치도 얼굴이 예쁜 사람을 좋아할거다 생각하기도 했잖아요. 아니 많은 사람이 그럴거다 여겼죠. 그런 사람이 많기는 해도 모두 그렇지는 않을 텐데. 그리고 기노우치가 결혼한 사람도 얼굴이 아주 예쁘지는 않았죠. 기노우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레이카 씨를 인정해줬다면 좋았을 텐데요. 기노우치가 사람을 한쪽으로 치우쳐서 보지 않고 그 사람이 가진 좋은 점을 잘 찾아내기는 합니다. 그런 사람이 기노우치만은 아닐 텐데. 소설가가 되고 레이카 씨는 같은 소설가인 고토이케 료를 만났습니다. 잠시 레이카 씨는 기노우치가 아닌 다른 사람과 소설쓰기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거워했죠. 고토이케는 소설을 자신이 쓰기보다 소설신이 내려주는 것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신은 그 이야기를 내 보내는 수도꼭지고. 저도 이런 말 들은 적 있습니다. 소설가 자신이 글을 쓰는 게 아니고 누군가 불러줘서 받아적는다고. 그런 거 정말 부럽습니다. 레이카 씨도 그랬죠. 자신이 가진 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던 때였잖아요. 그래도 레이카 씨는 그 틀을 깼죠. 비록 자신은 정념(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을 쏟아내는 수도꼭지라고 했지만. 어쩐지 저는 그것도 부럽군요. 사람은 쉽게 바뀌기 어려운데. 아니, 그때 레이카 씨한테는 레이카 씨를 바뀌게 하는 일이 일어났군요. 기노우치의 결혼. 그런데도 레이카 씨는 기노우치한테 버림받지 않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고 했죠. 이런 말 부끄럽지만 저도 비슷한 생각한 적 있어요. 제가 한 생각은 ‘내가 글을 잘 쓰지 못해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인가’ 입니다. 이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겠죠. 그래도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잘 안 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제가 잘 못해서 그런 것 같네요. 저만 생각했던 것인지도. 그런데 지금도 생각하는 게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나를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멀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결국 자기 마음에 달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어떤 사람이 그냥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군요. 기노우치는 레이카 씨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기보다 자신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 것 같아요. 그러니까 레이카 씨를 놔주지 않았죠. 그것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레이카 씨 자신이 기노우치 같은 사람을 왜 좋아할까 했죠. 레이카 씨는 고토 가즈코일 때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기노우치는 레이카 씨가 가즈코일 때도 알고 있었습니다. 레이카 씨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것은 레이카 씨 자신이 자신(가즈코)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군요. 그렇다 해도 레이카 씨 마음속에는 가즈코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던 거죠. 부모님하고는 다른 남이. 그래서 레이카 씨는 기노우치를 모두 이해한다고 자신을 속였습니다. 기노우치 아내도 모르고 있으면 그 사람도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레이카 씨는 기노우치 아내가 레이카 씨를 모를 거다 생각했는데, 저는 알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도 알고 있었죠. 기노우치 아내는 자기 남편이 돌아올 곳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의 가즈코였던 레이카 씨처럼. 아이가 생기고는 기노우치는 아이를 첫번째로 생각했죠.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레이카 씨가 기노우치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글을 쓴 게 아니고 자신을 찾기 위해서 쓴 거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사람은 거의 처음에는 누군가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무엇인가를 시작해도 시간이 갈수록 바뀌기도 하는데 레이카 씨는 그러지 않았군요. 그래서 붓을 꺾었죠.
저는 레이카 씨 이야기를 보기 전부터, ‘나는 왜 글을 잘 쓰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저를 잘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죠. 이런 마음도 있겠지만 그저 제가 만족하고 싶기도 합니다. 레이카 씨도 이런 말을 했군요. 갑자기 떠오른 게 있습니다. 자신이 쓴 글을 많은 사람보다 한사람이라도 마음에 들어한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자꾸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군요. 저는 다른 무엇보다 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정말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좋아하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사실 저도 아직 답을 모르겠습니다.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까지는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무엇인가 쓰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그게 잘 떠오르지 않지만. 레이카 씨도 꼭 기노우치 때문에 소설을 쓴 것은 아닐 겁니다. 그렇죠. 글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저도 저를 좀 더 좋아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자신을 좋아하면 좋은 일이 많다고도 하더군요.
레이카 씨, 아니 가즈코 씨가 다른 세상에서라도 자신을 위한 글을 쓴다면 좋겠습니다.
(쓸 때는 괜찮았는데, 다시 보니 부끄럽다)
희선
☆―
“좋은 소설은 어떻게 해야 쓸 수 있을까? 물론 작가가 아는 세계가 좁으면 그만큼 좋은 소설이 나오기 힘들지. 그렇다고 견문을 넓힌다고 반드시 좋은 소설이 나온다는 얘기는 아니야. 그런 논리대로라면 살아가면서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노인들만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소리잖아. 뭐야, 그럼 우리처럼 젊은 소설가는 필요도 없게? 그러니까 그건 틀린 얘기야. 소설의 정수에 다가가려면 경험만이 아닌 다른 뭔가가 필요한 것 같아. 그 ‘뭔가’의 정체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걸 찾아가는 시간속에서 좋은 소설이 태어나는지도 모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 (470쪽)
“응. 나는 내가 소설을 써 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소설이란, 본래 사람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영역에 있으니까. 그냥 이야기가 잠시 소설가한테 내려올 뿐이지. 소설신이 소설가한테 이야기를 내려준다고 말하면 좀 알기 쉬울까? 나는 내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주무르지 않아. 그저 신이 주신 이야기를 착실히 문자로 나타내고자 애쓸 뿐이지. 한마디로 말하면 수도꼭지 같다고나 할까?” (486쪽)
역시 내게는 기노우치밖에 없다. 현실을 깨닫자마자 가슴 깊은 곳을 도려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들이닥쳤다. 내 모든 것을 아는 사람. 못생겼던 옛날 얼굴도,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꾸며 낸 거짓투성이 모습도 모두 받아준 남자. 심지어는 나조차 확신이 없는 내 재능을 덮어놓고 믿어주는 기노우치는 평생에 단 하나뿐인 남자였다. 나는 앞으로 만날 남자들한테 내 모든 것을 내보일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니까. (5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