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그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생기 넘치는 청년단 일동에게 호안 씨 같은 늙은이의 생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호안 씨의 시체를 거기 던졌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습지도라지.
즉 이 부근에서는 촌장님 죽이기라 불리는 식물로 실제 사람 잡아먹는 늪 주변에도 이곳저곳 군생(群生)하고 있다. 그럼 역시 호안 씨는 촌장님 죽이기의 맹독으로 독살당한 것일까.

그건 그렇고 린 씨를 실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이 편지는 1년의 세월을 거친 오늘날 홀연히 나타나더니 더없이 기괴한 수수께끼의 요기를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소란은 점차 커져갔고 백중맞이 춤이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수색했지만 그날 밤 결국 야스코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그 다음 날 아침이었는데, 술잔 집 딸 유라 야스코는 그 공놀이 노래처럼 잔으로 어림잡아 깔때기로 마셨던 것이다.

그것은 더할 수 없이 무서운 사건이었으나 또 한편으로 묘하게 아름답고 고혹적인 광경이기도 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일찍이 세토 내해의 외딴 섬, 옥문도란 섬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거기서 세 아가씨가 살해당했고 시체는 저마다 기묘한 구도를 그리고 있었다. 옥문도의 경우에는 그 구도에 악마 같은 의미가 숨겨 있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어떨까.

"옥문도 사건이 생각났어요. 하하."

"인간은 누구나 야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돼요. 게다가 지금은 글래머니 뭐니 해도 저런 거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란 걸 모르는지. 지금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사업에 투자하면 좋지 않겠냐고 입에 신물이 날 정도로 말했건만 망할 자식이…… 그 기둥서방이 죄다 구슬려 놓은 게 아닌지."

쇼와 7년 가을, 호안 씨 댁 별채에서 살해당한 것은 생각했던 대로 거북탕 차남 겐지로였을까. 아니, 저 얼굴을 알아보기도 어려운 피해자는 겐지로가 아니고 오히려 가해자로 지목된 사기꾼 온다 이쿠조가 아닐까. 그리고 진짜 범인은 아오이케 겐지로가 아닐까. 즉 겐지로가 사기꾼을 죽이고 사기꾼이 모아 둔 돈을 가로채 달아난 건 아닐까. 거북탕 일족은 그걸 알면서 겐지로를 감싸기 위해 저 시체를 겐지로라고 주장했던 건 아닐까.

이것이 이십여 년 동안 이소카와 경부를 줄곧 괴롭히던 의혹이었다. 혹시 이 의혹이 들어맞는다면 언젠가 겐지로는 이 마을에 어떤 모습으로든 돌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이소카와 경부가 가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인과는 돌고 도는 수레바퀴, 이거야말로 더없이 이상한 이야기, 이상이 전편의 끝이더라…….

경부의 당연한 충고에 즉시 형사 한 사람이 뛰어나갔는데 내친 김에 그 결과를 여기에 적어 보면, 다츠조가 가지고 돌아간 잔과 깔때기는 그대로 부엌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훗날 이 일이 범인에게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던 것이다.

버섯 된장국에 은어 소금구이, 고사리 유부 조림에 날계란 하나. 대단히 소박한 식단이었지만 맛있는 된장국에 만족스럽게 고픈 배를 달랠 수 있었다.

모처럼 조모의 공놀이 노래를 듣고 있던 며느리 에이코와 도시오의 누이동생도 일제히 몸을 일으켜 이오코의 노래는 끊기고 말았는데, 훗날 이것이야말로 통탄할 일이었다. 이 때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오코 어르신의 공놀이 노래를 끝까지 다 들었다면…….

냉이(ぺんぺん草)가 두세 포기: 집이나 토지 따위가 황폐해짐을 일컫는 표현이다.

푹 숙면을 취한 덕분일까, 둘 다 몸이 가볍다. 몸이 가벼우니 입도 가벼워서 밉살스런 말을 서로 주고받는다. 티격태격 자전거를 같이 타고 나가는 두 사람을 뒤에서 바라보는 다치바나 경부보의 얼굴은 심히 불쾌해 보였다.

"아니오. 나는 그런 말은 안 합니다. 지금의 공놀이 노래가 이번 사건에 관계가 있을지 없을지 그 판단을 하는 것은 긴다이치 선생님이나 이소카와 경부님의 몫이겠지요. 나는 그저 옛날 이 마을에 이런 공놀이 노래가 있었다는 걸 댁네에게 알려 드렸을 뿐……."

가와나카지마(川中島)의 노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사이조 산은 안개가 깊고 치쿠마 강은 파도가 격하네(西山は霧ふかし千曲の川は波あらし) / 멀리 들려오는 소리는 소용돌이치는 물소리인가 무사의 고함인가(はるかに聞こゆる物音は逆まく水かつわものか) / 떠오르는 아침 해 빛나는 시간에 깃발이 빙글빙글빙글(のぼる朝日に旗の手のきらめく暇にくるくるくる)

그걸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도 그 정도 살면 상당히 악해지지 않을까요. 악해졌다기보다 선하고 악한 걸 초월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촌장님과 자신의 손녀딸, 두 사람이 공놀이 노래대로 살해당했어요. 어쩌면 이번엔 저울 집 딸 차례가 아닐까. 좋아, 좋아. 그렇다면 우리도 힘든 일을 겪었으니 저울 집도 똑같이 아픈 꼴을 당해봐라……. 그 정도의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결국 저울 집 딸도 공놀이 노래대로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 범인이 노리는 게 있다면 그건 이후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고……."

"그렇다면 당신이 아츠코 씨를 단념하게 하기 위해 야스코 씨의 혈통에 대해…… 혹은 그 의혹을 제기했고, 한편 아츠코 씨에게는 아츠코 씨대로 후미코 씨의 혈통을 얘기하고 당신을 포기하게끔 하지 않았나 하는 거군요."

"그렇지요, 그래요. 그대로예요. 촌장님이란 사람은 한번 삐뚤어지면 손쓸 수 없는 분이지만 근본은 친절하고 남을 돌봐 주길 좋아하는 분이지요. 뭐라 해도 저와 아츠코 씨가 그런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마을 젊은이들에게 모범이 되지 않기에 그걸 걱정해서 그런 비상수단을 쓰신 게 아닐까, 지금은 그리 생각합니다."

벤케이(弁慶):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중.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심복으로 활약했으며 호걸로 이름을 떨쳤다. 힘이 센 사람, 장사를 가리켜 흔히 벤케이라고 한다.

"유카리 양은, 저 분은…… 아무것도 모르겠죠. 세 사람 모두 배가 다른 남매란 걸……."

7리 결계(七里結界): 밀교에서 마장(魔障)의 침입을 막기 위해 7리 사방에 경계를 두르는 일로, 비유적으로는 너무 싫은 사람을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걸 말하기도 한다.

보내는 불: 원문에는 오쿠리비(送り火)라고 되어 있음. 백중이 시작하는 날인 13일에는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하여 마의 싹 등을 태워 무카에비(迎え火)를 피우고, 끝나는 날인 16일에는 역시 조상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하여 오쿠리비를 피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거군요. 온다 이쿠조란 인물이 뒤에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았다면 이번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온다는 세 부인에게 각각 임신을 시켰다. 게다가 정처인 리카도 역시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사건 이듬해 네 부인이 일제히 아이를 낳았지만 그게 죄다 여자 아이였던 것에 이번 사건의 원인이 있다는 얘기로군요."

"오빠, 감히 저는 오빠라 부르겠습니다. 오빠도 아시다시피 전 철들 무렵부터 사기꾼에 살인범의 딸로 굉장히 기가 죽어지냈어요. 그 동안 몇 번이나 죽어 버릴까 생각했는지 모를 정돕니다. 하지만 전 죽지 않았어요. 이를 악물고 세상의 박해를 견뎠습니다. 오빠, 여자인 저도 참고 견뎠으니 설마 어엿한 남자인 오빠가 견디지 못할 리 없어요. 강해지세요. 언제까지나 강하게 살아주세요."

"실례했습니다, 경부님. 당신은 리카를 사랑하고 계셨군요."

앗! 하고 외치며 내가 주춤한 사이 긴다이치 코스케 씨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에 올라타 있었다.

쇼와 30년 9월 21일
이소카와 츠네지로(磯川常次郞)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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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30년 8월 10일 땅거미 질 무렵, 스스로 린이라고 칭한 노파는 그야말로 도리마(通り魔)15)처럼 센닌토게를 넘어 이 귀수촌에 온 것이다. 피조차 얼어붙을법한 공포와 전율 그리고 해답을 찾기 힘든 수많은 수수께끼를 저 불길한 보자기에 감싼 채.

하지만 그날 저녁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런 건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15) 도리마(通り魔): 바람처럼 사람을 지나가며 죽이는 마물. 바람에 칼날과 눈코입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짐. 전혀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도리마 사건이라 일컫는다.

오늘 밤은 호안 씨와 호안 씨의 다섯 번째 부인이 오랜만에 기쁨을 나누고 있을 텐데, 이건 정말 너무 날씨가 안 좋으니 우습기도 하고 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나…….

백중맞이 춤: 오봉, 즉 백중 기간에는 여름 축제가 성대히 진행되는데, 이때 추는 춤을 봉오도리(盆踊り), 즉 백중맞이 춤이라고 한다. 야구라(やぐら)라 하여 광장 중앙에 큰북을 울릴 수 있는 높이 2미터 정도의 건물을 짓고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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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생각하면 이제부터 긴다이치 코스케가 만나게 될 저 끔찍한 사건의 첫 실마리를, 그날 그는 전혀 모른 채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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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승전》이란 표제 아래 붙어 있는 ‘향토와 민속’이라는 소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기이한 풍습, 전설, 민화 등을 모아 놓은 것으로, 집필자도 소수의 유명인 외에는 대개 무명의 투고자로 이루어져 있다.

문장은 유치해도 사실의 진귀함과 흥미로움에 신선한 재미가 넘치고 또한 배우는 것도 적지 않다고 한다.

쇼와(昭和) 28년(1953년) 9월호에 게재된 글로, 제목은 ‘귀수촌 공놀이 노래에 관하여’라고 되어 있고 지금은 그 지방에서도 거의 잊혀 가는 공놀이 노래를 흥미롭게 고증해 놓은 글이다. 필자는 다타라 호안이란 이름인데 이 잡지만으로는 다타라 호안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분명 투고한 글일 것이다.

귀수촌 공놀이 노래

집 뒤뜰에
참새가 세 마리 앉아
한 마리 참새가 말하기를
우리네 처소의 주군님
사냥 좋아해, 술 좋아해, 여자 좋아해
그중 제일은 여자라네.
여자답고 어여쁜 술잔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술고래인 술잔 집 아가씨.
잔1)으로 어림잡아 깔때기로 마시고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술에 절어
그래도 모자란다며 퇴짜 맞았네.
퇴짜 맞았네.

1) 잔(되): 원래는 액체나 곡물의 분량을 잴 때 썼던 방형 혹은 원통형 용기였으나 언젠가부터 축하 자리에서 술을 나누는 잔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참새가 말하기를
우리네 처소의 주군님
사냥 좋아해, 술 좋아해, 여자 좋아해.
그중 제일은 여자라네.
여자답고 어여쁜 저울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구두쇠인 저울 집 아가씨
요 금화 저 은화를 저울에 달아서는
종일 감정하느라 밤낮이 저물고
잠잘 틈도 없다며 퇴짜 맞았네.
퇴짜 맞았네.


세 번째 참새가 말하기를
우리네 처소의 주군님
사냥 좋아해, 술 좋아해, 여자 좋아해
그중 제일은 여자라네.
여자답고 어여쁜 자물쇠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돌계집인2) 자물쇠 집 아가씨.
돌계집 아가씨 자물쇠 고장 났네.
자물쇠 고장 나면 열쇠가 안 맞지.
열쇠가 안 맞는다 퇴짜 맞았네.
퇴짜 맞았네.

잠시 끝이 났습니다.

어여쁘지만 돌계집인(器量よしじゃが小町でござる): 고마치(小町)는 헤이안 시대의 가인이자 절세미인이었던 오노노 고마치(小野小町)에서 따온 말로 ‘이름 높은 미인’을 일컫는 표현이다. 하지만 ‘어여쁘지만 이름 높다’는 의미라면 ‘어여쁘지만’ 뒤에 부정적 표현이 들어간 1연, 2연의 형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덧붙여 속설에 따르면 실존 인물인 오노노 고마치는 아름다웠지만 여성의 기능을 상실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열쇠와 자물쇠가 각각 남녀 성기를 상징한 단어라는 견해에 따라 小町라는 표현을 ‘(여성의 기능을 상실한) 돌계집’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여기서 귀수촌이라는 곳을 지도에서 조사해 보자.

그곳은 효고(兵庫)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의 경계에 걸쳐 있고 세토(瀨戶) 내해 해안선에서 불과 7리가 채 못 되는 거리이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이른바 주된 교통망에서 벗어난, 말 그대로 산간분지이다. 지도에서 보면 지형이든 교통이든 당연히 효고 현에 편입되어야 마땅한데, 구 막부 시대 지배지의 영향으로 오카야마 현에 편입되어 있는 게 특이하다.

그 때문에 범죄가 일어날 경우 수사상에 중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본고장인 오카야마 현 경찰로부터는 지형 등의 관계로 따돌림을 당하고, 교통이 편리한 효고 현측에서는 관할 밖의 일이라며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경향이 있어,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사건 수사의 경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아니할 수 없다.

무감(武鑑): 무가(武家) 연감. 에도 시대에
무가의성명·계보·거성(居城)·봉록·가문
(家紋), 주된 가신의 성명 등을 기록한 책.

야나기노마(柳間)와 초산타이후(朝散大夫): 야나기노마는 도자마다이묘(外樣大名), 즉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도쿠가와 지배 체재에 편입된 다이묘를 가리키는 말. 초산타이후는 종5품 이하의 관직명을 통칭하는 말. 즉, 야나기노마 초산다이후를 간단히 풀어 설명하면 ‘종 5품 이하의 다이묘’가 된다.

귀수촌의 공놀이 노래는 이 이토 스케유키의 비행을 노래한 것이니, 공놀이 노래 각 구절의 마무리 부분에서 ‘퇴짜 맞았네, 퇴짜 맞았네.’라고 반복되는 부분은 사실은 ‘살해되었네, 살해되었네.’란 말을 되풀이하는 의미란 것이 다타라 호안 씨의 의견이었다.

긴다이치 코스케가 이소카와(磯川) 경부의 소개장을 지닌 채 이 지방에 드물게 남은 인력거로 센닌토게(仙人峠)6)를 넘어 귀수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쇼와 30년 7월 하순의 일로, 물론 그 무렵 긴다이치 코스케는 거기 남아 있는 공놀이 노래에 대해서는 꿈에도 몰랐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 정양지로 이곳저곳 생각해 본 끝에 결국 오카야마 현에서 고르기로 결심했다. 그의 데뷔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혼진 살인 사건’ 이래 ‘옥문도’ ‘팔묘촌’ 등 어쩐 일인지 그는 오카야마 현과 인연이 깊어, 어느새 이 지방의 인정과 풍속에 호의를 품게 된 모양이다. 원래 손님을 잘 대접하는 이 지방 사람들의 기질이 그로서는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딘가 이 근처에 좋은 곳 없을까요. 많이 불편한 곳이 좋습니다. 외부와의 교섭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인가에서 떨어진 깊은 산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의 시골말이에요."

"귀수촌(鬼首村), 아오이케 리카(靑池リカ) 님."

"긴다이치 씨는 시골 농촌에 대해 비교적 잘 아시겠지만, 어느 마을에 가도 그 땅에서 유난히 세력을 지닌 사람이 있지요. 한데 그 세력가한테는 항상 대항 세력이 있어서……. 뭐, 예를 들면 옥문도의 기토 본가와 분가, 팔묘촌의 동쪽집과 서쪽집 같은 거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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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너무 냉랭했다. 코끝이 찡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햇살 속에 봄이 들어 있다고 했다.
딸은 바람 속에 봄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봄바람은 처녀 죽은 귀신이라고 했다. 그래서 봄바람은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했다. - P26

삽질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이 "어허! 어깨에너무 힘 들어갔다"고 했다. 예술은 힘 들어가면 힘 못 쓴다.
어깨에 힘 들어가면 자기 작품을 자기가 해석하거나 설명한다. 궁색해진다. 작품은 말이 없다. - P29

봄에는 저렇게 산에 강에 바람이 불어야 한다. 그래야 강물도크게 출렁이며 숨을 내쉬고, 산소를 보듬고 흐른다. 산도 몸을흔들어 탁한 숨을 쏟아 낸다. 바람은 바람을 털어 낸다.
나에게도 바람이 온다.
나는 내게 오는 봄바람을 피하지 않는다. - P30

아내의 잠
봄비 그친 날, 우리 집 장 담그는 날. 장 담그는 일의 순서와차례는 아내의 머릿속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설계되고 준비되어 있다. 딸하고 내가 아내의 손발이 되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일을 도왔다. 장을 담그는 차례 속에 우리의 활동은 아름다운율동이었다. - P35

장을 다 담았다. 아내는 자기 혼자 이 일을 하면 하루가 걸린다고 했다. - P35

이따금 밀려 쌓인 고단을 털기 위해 아내는 깊고 먼 잠을 잔다. 그렇게 고단을 모아 지운다. - P35

정돈이 자연이다. 정돈은 실상이다. 정돈은 질서다.
그것은 수긍과 긍정으로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고요다. 아름다운 운동이다.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 P43

구례 남원 순창 지났습니다. 모두 사람 살기 좋은 고을들입니다. 해와 달이 오래 머물다 가며 하루를 다 못본듯, 뒤돌아보게 하는 땅입니다. - P47

우리나라 국토지리에서 그이들끼리 잘 살 것 같은 고을. 우리가 안 찾아가도 쌀쌀한 이른 봄, 홍매가 교정에 피어날테니까요. - P48

길은 아스팔트 길이랍니다. 아직 차는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작은 막대기로 민달팽이 가운데 몸을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사람 맨손보다 나무 막대기가 달팽이 몸에 익숙할 테니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민달팽이가 가려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길 건너까지 가만가만 걸어가서 키 낮은 풀잎위에 살며시 내려놓았습니다.  - P49

달팽이를 들고 가면서,
"너 길 잘못 들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답니다. - P49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또 나를 잊었다. - P53

이발하고 강천산으로 물 받으러 갔다. 몸에 좋다는 이 물을받아다가 먹은지 이 년쯤 되었다. 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거나 오래 살 생각은 없다. 물이 맛나서, 아내는 고추장 담그고나는 봄여름에 찬물로 마신다. - P54

묘목을 심고 나서 삼 년 정도가 지나면 나무의 첫 과일이 열립니다. 대개 첫 과일은 나무의 장기적인 성장을 생각해서 열매를 따 준다고 합니다. 그래야 나무가 튼튼하게 자란다고들하지요. - P60

나는 열매를 들여다보며 딸까 말까 망설이다가 어린 살구가 아까워서, 에이 자기가 알아서 열렸으니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하며 그냥 두었습니다.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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