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판사판 시리즈

“그래. 어릴 때는 어딘가에 영웅이 있다고 믿었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짠, 하고 나타나 구해주는. 정의가 이기고 짝짝짝, 박수 치며 끝나는 해피엔딩. 하지만 말이야, 나이가 듦에 따라 영웅은 있다, 정의는 이긴다, 그렇게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되지. 다들 거악을 두려워해.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지만 정작 수갑을 내미는 사람이 없어. 영웅은 없다, 세상은 불합리하다고 삐딱하게 말하는 사람이 정의를 올곧게 외치는 사람을 비웃지.”

“올바름을 관철한다는 거, 굉장히 어려운 거야. 올바름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주로 어떤 말을 하는지 가르쳐줄까. 양쪽 다 일리가 있고 각자 나름대로 정의롭다, 세상의 정의는 사람 수만큼 있다, 정의의 폭주다, 정의를 강압한다. 나, 이런 말, 다 싫어해.”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것만 정의라고 부르더라고. 그치만 올바른 일을 해야지. 당신, 공무원이니까.”

“하지만, 올바른 일을 한 결과 사망자가 나와도 되나요?”

“올바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사망자가 나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고가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카르텔, 담합, 하청 갑질. 그런 위법 행위 때문에 궁지에 몰려 목숨을 놓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공정위뿐이야. 가혹한 현실에 시달리며 영웅이 달려와 주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적발의 손길을 늦춰서는 안 돼…… 나는 이제 현역이 아니지만.”

고가는 장난꾸러기처럼 혀를 쏙 내밀고 웃었다.

그때 고가가 웃던 얼굴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시로쿠마 머리에 들러붙어 있다.

가혹한 세상이다. 회사는 도산하고 경영자는 자살하고 어린 자식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어디에도 안전한 길은 없다. 어떻게 해야 사망자가 나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

공정의 파수꾼 | 신카와 호타테 저자, 이규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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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나는 일본의 섬나라 근성이라든지 혈연·지연 같은 끈적끈적한 환경이 싫은 겁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각자 알아서 살게 그냥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기분 나쁜 폐색감을 찢어 버리는 일, 현존하는 직업 중에서는 공정위가 가장 가깝지 않습니까."

"연애도 경쟁이죠."

"그렇잖아요. 상대방에게 1번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니까. 그게 경쟁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한쪽으로 시로쿠마 씨를 독점해 두고 다른 쪽에서는 바람을 피운다. 그게 바로 불공정한 거래죠. 그런 상태를 넘겨 버리려고 하다니, 공정거래위원회 직원으로서 납득하기 힘드네요."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배신해 버린 나가사와 씨는 역시 약한 사람인 거죠. 고쇼부 씨는 강한 사람이니까 약한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지만─."

"나, 별로 강하지 않아요. 약하지만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부전패가 되어 버리잖아요. 이길 가망이 희박해도 싸우는 것 말고는 길이 없어요."

정부는 국민의 신임 위에 성립한다. 선거로 뽑힌 정치가가 법률을 만들고 법률에 따라 세금을 걷는 민주적 기반이 있는 것이다.

운카이는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독단으로 다른 사람 돈을 가로채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쓰고 있다. 절차가 민주적이지 않다.

운카이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들은 복종할 뿐이다. 운카이를 정점으로 하는 지역사회에서 얌전히 있으면 생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부케두페’의 아오야기처럼 도전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배제된다. 건전하지 못한 방법이다.

한 무리의 우수한 사람, 강한 사람에게만 맡겨 두면 안 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부족하고 약하더라도 각자 의사를 가지고 움직이며,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때로는 타격을 받기도 한다. 경제 전체로서는 효율이 떨어지는 방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선택을 남에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시민 개개인의 도전과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야말로 경쟁이고, 우리 공정위는 경쟁을 수호하는 지킴이인 것이다.

"그래. 어릴 때는 어딘가에 영웅이 있다고 믿었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짠, 하고 나타나 구해주는. 정의가 이기고 짝짝짝, 박수 치며 끝나는 해피엔딩. 하지만 말이야, 나이가 듦에 따라 영웅은 있다, 정의는 이긴다, 그렇게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되지. 다들 거악을 두려워해.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지만 정작 수갑을 내미는 사람이 없어. 영웅은 없다, 세상은 불합리하다고 삐딱하게 말하는 사람이 정의를 올곧게 외치는 사람을 비웃지."

"올바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사망자가 나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고가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카르텔, 담합, 하청 갑질. 그런 위법 행위 때문에 궁지에 몰려 목숨을 놓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공정위뿐이야. 가혹한 현실에 시달리며 영웅이 달려와 주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적발의 손길을 늦춰서는 안 돼…… 나는 이제 현역이 아니지만."

고가는 장난꾸러기처럼 혀를 쏙 내밀고 웃었다.

그때 고가가 웃던 얼굴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시로쿠마 머리에 들러붙어 있다.

가혹한 세상이다. 회사는 도산하고 경영자는 자살하고 어린 자식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어디에도 안전한 길은 없다. 어떻게 해야 사망자가 나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

정의를 관철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영웅은 있다.

정의는 이긴다.

"침착해. 우리는 공무원이야. 어디까지나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싸워야지."

사악한 자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온다. 하지만 정의의 편은 비상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법령을 준수하며 싸워야 한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공무원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법을 어겨도 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는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니까."

바로 옆에는 미도리카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시로쿠마 입에서 하아,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운카이의 운도 여기서 끝났군. 미도리카와를 선택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당신을 지켜줄 때도 사용했던 기술인데, 이번엔 당신을 상대로 쓰게 될 줄이야."

"저는 미야베 선생님을 신으로 추앙하는 종교의 구도자거든요. 예전에 누군가 ‘미야베 작가가 목표야?’라고 물으셨는데 목표라니 말도 안 돼요. 어떻게든 치열하게 연구하고 공부해서 그 길을 따라가 보자고 생각할 뿐이지요. 저는 원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좋아했거든요. 그러다가 미야베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모 저택 사건』과 ‘미시마야 시리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어른들이 읽을 수 있는 판타지이자 미스터리이며…… 아, 너무 좋아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 이야기들은 다른 작가가 썼다면 현실성이 없는 설정이 되기 쉬웠을 텐데, 현대의 학생이 2.26 사건 당시로 타임슬립하는 이야기도 미시마야에서 기이한 체험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이야기도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이 쓰니까 리얼해 보이는 것이겠죠. ‘이 장르의 작법에 따라 썼습니다’가 아니라 장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미야베 미유키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문장으로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는 신카와 호타테. 그가 장차 미야베 미유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대가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을 저도 목도할 수 있기를. 멀리서나마 바라봅니다.

이판사판이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합쳐진 말로 불교 용어입니다. 조선이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탄압하자 계급의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승려들은 살 길을 도모해야 했지요. 이때 잡역에라도 종사하며 사찰을 유지하고 불법의 맥을 잇던 ‘사판승’과,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던 ‘이판승’으로 각각 나뉘었다고 합니다.

조선이라는 파고를 통과하여 지금의 불교가 있기까지, 불법의 맥을 잇기 위해 자신들의 소임을 다한 사판승과 이판승의 역할은 지대했지요. 한데 오늘날 ‘이판사판’은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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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칠 줄 모르는 비가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9월인데도 숨 막히는 무더위가 계속되어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까지 미지근했다. 화장터 여자 화장실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조사 대상은 도로공사를 수주한 건설사였다. 담합하여 서로 돌아가며 공사를 수주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도요시마는 공사를 발주하는 시청 직원이어서, 참고인으로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노인들이 밀실에 모여 뭐든지 다 정해 버립니다. 이런 짓은 이제 막아야 해요. 일본이라는 나라가 금방 못쓰게 될 겁니다. 의욕 있는 젊은이가 창업을 하고 열심히 영업한들 소용없습니다. 수십 년간 내려온 지역 인맥에 들어가 노인들의 인정을 받고 밑바닥 생활을 거치고 나야 겨우 수주할 기회가 돌아옵니다. 그런 시스템이 완성되어 버렸어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계속 달리는 체제.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 막아야 합니다."

고쇼부는 종합직 채용, 이른바 캐리어 출신이다. 일반직 채용이며 논캐리어인 시로쿠마보다 승진 속도가 빠르다.

같은 연차에 입사했는데도 고쇼부는 계장이고 시로쿠마는 계원이다. 의견이 갈릴 때는 고쇼부의 의견이 우선시될 게 분명하다.

정의를 외면하지 않으려 했던 정보 제공자가 얼마나 어두운 길을 걸어야 하는지 고쇼부는 모르고 있다. 인맥으로 똘똘 뭉친 지역 사회에서 빠져나와 고발을 하는 일이 얼마나 큰 두려움을 동반하는지.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지. 고발 후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랭킹이 매겨지는 경쟁의 장에서는 그런 묘한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쨌거나 얼른 정리나 합시다."

직접 손을 댄 사업이 쑥쑥 자라면 배 속에서부터 행복감이 차오른다. 힘차게 빨대를 빠는 입가는 일그러져 있지만 그것은 운카이 나름의 미소였다.

호텔이 납품업자에게 과도한 요구를 해 왔다는 사실은 증거를 보더라도 분명한데 그런 거래 상대를 왜 속박할까. 남들 눈을 피해 폭행을 일삼는 애인에게 오히려 집착하며 관계를 끊지 않는 피해자 같지 않은가.

어릴 때부터 가라테를 수련해 온 시로쿠마는 승부의 엄격함을 몸으로 배웠다.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안 될 때도 있다. 컨디션의 소소한 차이나 타이밍으로 승패가 갈리기 때문에 임기응변과 집중력, 절대 지지 않겠다는 강한 승부욕이 중요해진다.
하지만─약자가 패배하고 강자가 승리하는 세상이어도 과연 괜찮은 걸까.
가슴속에 의문이 똬리를 틀고 있지만 일손을 멈출 수도 없다.

늘 그랬다. 앞장선 적도 없는데 어느새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역할을 떠맡는다. 학창시절에 학급에서 담당자를 정할 때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제일 귀찮은 역할로 떠밀렸다. 늘 잡다한 동네일을 도맡는 어머니 미나에를 한심하게 생각하곤 했는데, 어머니를 닮은 자기 처신이 싫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니까 번거로운 일만 떠맡게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 물렁함이 내 생활 구석구석을 침범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사회는 대련 같은 게 아니잖아요. 약한 사람이 지고. 이번에는 아쉽게도 제가 졌네요, 라는 말로 끝나지 않죠. 진 쪽은 치명상을 입고 죽음에 이르기도 해요. 경쟁이란 게 그렇게 좋은 걸까요? 강자가 이기고 약자가 지는 거. 그런 세상이어도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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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한심한 소리니. 좋아서 한 일을 두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이사할까 말까 망설이다 어쩔 수 없이 택한 집도 아니고 마음에 쏙 들어서 이사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해야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해! 정신 똑바로 차려!"

"네 형부 말이야, 어쩌면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활짝 갠 8월 오후, 툇마루에 나란히 앉아 보리차를 마실 때 언니가 불쑥 말했다. 깜짝 놀라 언니의 옆얼굴을 돌아보았지만, 언니는 평소와 다름없었고,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감정적으로 흥분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안색도 좋았다. 볼살이 도톰하게 올라 있기까지 했다.

죽은 여자와 외도하는 건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는 그날 차가운 안개비가 내리던 밤, 퇴근한 형부가 이웃집에서 나오던 모습을 떠올렸다. 택시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고 형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집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형의 것인 줄 알면서도 나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이에서 딱딱 소리가 날 만큼 무서웠지만 그것은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종류의 공포는 아니었다. 이승과 저승이 한순간 통할 때의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공포라고 하면 좋을까. 도망치고 싶어지는 공포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한…… 무섭지만 시선이 빨려 버리는 듯한 그런 공포였다.

하지만 죽은 첩은 분명히 나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는 뭔가 헤아릴 수 없는 목적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뭔가를 호소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제 모습을 생전의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을까. 육신을 잃은 채 고독에 시달리며 망연히 빈집을 헤매고 있기가 쓸쓸했던가? 이해받고 싶었던 걸까.

선명한 붉은색을 칠한 네모난 틀 안에 한 여인을 그린 것이었다. 네모난 창틀 주위에는 나뭇잎으로 보이는 검은 그림자가 무늬처럼 여러 개 흩어져 있다. 창틀 안에 그려진 여인은 뒤로 단단히 맨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먼 데 있는 뭔가를 응시하고 있다.

여자가 입은 옷이 비백 무늬 유카타임을 안 순간부터 나는 그림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우연이다, 하고 스스로를 타일렀지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위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음매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 이음매에는 언제나 그 여자가 있다.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일들을 떠올려 봐도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고 아무런 설명도 들은 적 없지만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해지곤 한다. 동시에 한없이 그립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젊은 날의 아득한 정경이 거기 있다. 내가 죽어 재가 되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타오르는 듯한 불길한 저녁놀이 비치는 창문에 이번에는 내 모습이 비쳐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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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때가 되었는데 밥상 차리기가 싫었다. 애초에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편의점에 갔다가 사다 둔 쌀과자가 생각났다. 짭짤한 것이 당겼다. 가스미는 미지근한 바람을 보내는 선풍기 앞에 앉아 느릿느릿 과자 봉지를 열었다.

그야말로 막연히 상상하던 이상적인 치과 의원 풍경이었다. 조용하고, 예약 없이 가도 흔쾌히 받아 주고, 나른한 여름날 오후면 치아 연마하는 소리만 들리고, 그 소리조차 점차 멀어져 가다가 깜빡 졸 것 같은 한가로운 시골 치과 의원…….

가스미는 자전거를 천천히 밀며 가까이 가 보았다. 히카게日影 = 햇볕치과 의원이라는 이름을 ‘히카게日陰 = 응달’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가쓰히코는 딱하다는 표정을 하고 치켜뜬 눈으로 가스미를 보았다. "가스미, 잘 들어. 히카게 치과 의원은 말이야, 1983년에 폐업한 것으로 되어 있어. 그 뒤 건물은 폐가가 되어 아무도 살지 않았대. 그것은 장인한테 들었고, 나도 확인했어."

"원장과 치위생사라는 건 맞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부부가 아니었어. ……피를 나눈 오빠와 누이동생이었어."

가스미가 침묵하고 있자 가쓰히코는 시선을 내리고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두 사람 다 독신이었대. 독신 상태로 함께 치과를 시작해서 함께 진료했던 거지. 그러다가 동생이 오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관계였다는 거지.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감추고 흰 가운을 입었겠지만, 환자들 사이에 소문이 돌고, 그러다가 곧 동생이 진찰실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대. 다음에 나타났을 때는 이미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진료에 열심이었다는 거야. 하지만 동생이 대체 어디서 출산했는지, 태어난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낙태했는지 아니면 누구에게 맡겼는지 아무도 몰라."

"그게…… 그게……" 가스미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숨이 답답했다. "갓짱, 그 아이에게 인형을 사 준 사람은, 그 아이를 낳은 부모가 아니야. 그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해당하는 사람이 사 준 거야. 히카게 원장과 그 누이동생의 아버지 어머니 되는 사람. 손녀가 불쌍했던 거야. 그래서 이치마쓰 인형을 사 주었고, 그 아이는 한시도 품에서 떼지 않고 소중하게 안고 있었어."

보았으니까, 하고 가스미는 말했다. 병 속에서 말하는 듯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입안에서 혀로 어금니를 더듬었다. 히카게 원장이 씌워 준 어금니 크라운이 가스미의 혀끝에서 매끄럽게 느껴졌다.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를 똑똑히 기억한다. 남편의 사십구재를 마치고 꼭 1주일이 지난 오후였다.

아침부터 음울한 안개가 자욱했다. 나무며 지붕이며 도로며 전신주며 할 것 없이 거무스름한 우윳빛 속에 가라앉아 보였다. 꽃피는 철인데도 몹시 쌀쌀하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목덜미에 으스스 오한이 일었다.

남편이 죽은 것은 3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점심이 다 되어도 일어날 기미가 없는 것이 의아했다. 일요일 아침은 대체로 늦게 일어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시간까지 누워 있다니. 나는 침실 문을 열고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빼곡히 들어찬 의류 아래쪽에 뭔가가 보였다. 거뭇해진 레이스 같은 것. 그리고 지저분하긴 하지만 하얗고 얇은 장갑을 낀 두 개의 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전에 내 손은 옷장 속 남편 옷들을 거칠게 헤집고 있었다. 공포에 빠졌는데 어떻게 그런 행동이 가능했는지 나도 모르겠다.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처분했다고 믿었지만 망령이란 제가 원하는 시간 원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있다. 조피가 남편 냄새에 싸인 채 숨어 있던 옷장을 처분했다고 해도 조피의 유령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어떤 형태로든 조만간 반드시 돌아온다……. 그것을 나는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통야
일본의 불교식 장례 절차의 일부. 입관 후 가족과 지인들이 관 앞에서 밤샘을 하며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이튿날 고별식을 하고 화장을 한다

될 대로 되라지, 하는 기분도 있었다. 이자는 산장과 완전히 한통속이구나, 라고 확신했다. 연휴가 끝난 비수기이므로 산장은 손님을 한 명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택시 기사는 산장까지 가는 택시비에다 용돈까지 챙겨서 좋다는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다.

다키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묻지도 않았는데 고후에서 학창 시절 은사의 통야가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은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회사를 어떻게 세우게 되었는지, 심지어 자신의 이혼담까지 스스럼없이 늘어놓았고, 나는 대체 초면인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주인이 따라 주는 대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문득 떠올리면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기억이라는 게 있다. 그런 기억은 몇십 년이 지나도 늘 변함없는 전율을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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