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소설을 1973년과 1974년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리아 지역의 허름하고 비좁은 집에서 썼으며, 동시에 소설의 영화 시나리오도 함께 작업했다. 영화는 호세 마리아구티에레스가 감독을 맡아 촬영해야 했지만, 영화계의 황당한 술책에 휘말려 결국은 내가 그와 함께 공동으로 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 영화가 실패작으로 끝난 것은 모두 내 책임이다. - P5

아마존 수비대원들의 성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페루 군부가 조직했던 ‘특별봉사대‘라는 소설의 이야기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는 1958년과 1962년에 아마존 지역을 방문하면서 너무나 확장되고왜곡된 나머지 잔혹하고 처참한 우스개 꼴이 되고 만 특별봉사대의존재에 관해 알게 되었다. - P5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일 중에서도
뚜쟁이로 봉사하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마치 다리처럼 건너간 후
계속 걸어간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감정교육』-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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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한번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 나쁜 일은 항상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오는 법이오. 그것도 두 가지 일이 함께 찾아오지. 하나가오면 반드시 나머지 하나가 그 뒤를 쫓아오는 식이지. 아마도 위지광의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오. 동쪽에서는 서하군의 말발굽이, 서쪽에서는 회교도의 코끼리 떼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오." - P173

"우리가 읽은 경전은 극히 미미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직 읽지못한 것이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읽기는커녕 펼쳐보지도 못한 경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우린 경전을 읽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행덕의 몸에는 머리끝까지 뜨거운 전류 같은 것이 흘렀다. 그 열기로 인해 행덕은 한동안 온몸이 저려옴을 느꼈다. 몇 년 전인가, 자신도 승려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뱉은 적이 있었다. - P189

때는 경우 2년 을해 12월 13일, 송나라 담주부 출신의 과거 응시생 조행덕은 하서지역을 떠돌아다니다가 사주에 이르러, 지금 외적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소란하게 되었는바, 대운사 승려들의 경전을 둔황석굴로 운반하여 벽 속에 은닉하려 하나이다. 이에 경건한 마음으로 『반야바라밀경』한 권을 필사하여 석굴에 안치하려 하옵니다. 바라옵기는 용천팔부"의 보호와 원조로 성읍이 평화롭고 백성들이 강하게 하소서. 두번째 소원은 감주의 젊은 여인이 이승의 선행으로 인해 암흑의 저승에 들지 않고 현세의 업보를모두 소멸토록 하옵고 무한한복을 내리시어 공양이 충만토록 하소** - P205

날이 갈수록 행덕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고, 또한 그들의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러한 인간의 무력함과 생명의 무의미함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종교가 흥미로웠다. (4장) - P262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타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9장) - P262

둔황석굴의 경전류가 천 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그모습을 드러냈을 무렵, 이 땅에 중국이라는 한족의 나라는 있었으나,
이미 서하라는 나라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결국 작가는 나라가 바뀌고 시대가 변해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것은 종교와 민족, 그리고 역사의 결연한 흐름 속에서 시대의 추이와 인간들의 삶을 묵묵히 응시해온 위대하고 유구한 자연이라는 엄연한 진리를 새삼 자각한것은 아니었을까.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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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 명의 부하와 함께 한나라 땅을 나섰던 반초가 오랑캐들과의 싸움으로 반평생을 보낸 서역 땅은 숙주에서 서쪽으로 수만 리 떨어져 있었다. 서역 땅에 머물고 있던 반초가 말년에 향수를 견디지 못하고 황제에게 바친 상소문에는 "신은 추호도 주천군까지 가기를 바라지 않으며, 원컨대 살아서 옥문관(玉門關)에 이르기만을"이라고 적혀 있다. 그 옥문관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9백 리 지점에 있었다. - P96

이듬해인 명도(明道) 원년(서기 1032년)에서하국왕인 이덕명이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대신해 아들 원호가 서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온화한 성격의 덕명은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송이라는 두 대국 사이에 끼어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며 형세를 살피는 정책을 취한 결과, 당시 한창 성장 과정에 있던 서하를 별다른 대과 없이 다스런 인물이었다. - P104

아들 원호는 부친과는 달리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송이나 거란에 대한 정책을 놓고 걸핏하면 부친과 대립했다. 일찍부터 아버지에게서 병권을 넘겨받아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더구나 수많은 전투에서 속속 승리를 거두며 양주와 감주, 숙주를 평정한 덕분에 이제는 그 어떤 전투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원호는 평소 서하인은 고유의 풍속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로, 송나라 조정이 내려준 비단 용포를 입은 아버지 덕명에게 불가함을 주장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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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행덕(趙行德)이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호남(湖南) 시골에서 수도 개봉(開封)으로  상경한  것은 송나라 인종(仁宗)의 재위기간인 천성(天聖)  4년(서기 1026년) 봄의 일이었다. - P7

*진사시험: 수나라 때 시작돼 송나라 때 완비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된 중국의 고등문관 임용시험을 과거라 불렀고, 이중성시 (省試, 중앙조정에서 치른 시험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불렀다. 성시 다음 단계 시험을 전시(殿試)라 하여 황제가 친히 주관하였다. - P7

인종에 앞서 진종(眞宗)은 몸소「근학시(勤學詩)」 를 만들어 학문에 의한 급제야말로 부귀를 얻는 지름길임을 천하에 알렸다.

집안을 부유하게 하려면 기름진 토지를 사지 말지어다. 천만 석의 곡식이 서책 속에 있도다. 편안한 주거를 원한다면 호화로운 저택을 짓지 말지어다. 서책이 곧 황금의 집이니라. 집을 나섬에 수행할 자 없음을 탄식하지 말지어다. 책 속에 준마 있어 무리를 이루도다. 배필을 고를 때 뛰어난 중매쟁이 없음을 탓하지 말지어다. 구슬같이 고운 얼굴의 여인이 서책 속에 있도다. 대장부가 평생 뜻한 바를 이루려면 창가에 앉아 육경(六經)*을 읽는 데 매진할지어다. - P8

서서히 더위를 느끼게 하는 초여름 햇살이 느릅나무 너머 대로변으로 쏟아지던 어느 날, 그는 이부(部)에서 주관하는 신(身), 언(言),
서(書), 판(判) 시험에 나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신‘은 당당한 용모와풍채, ‘언‘은 논리정연한 언변, ‘서‘는 수려한 필체, ‘판‘은 법률의 이치에 대한 판단력을 으뜸으로 삼았다. 여기에 합격하면 이제는 궁중에들어가 황제의 질문에 답하는 최종시험"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상위 세명은 각각장원(壯元), 방안(眼), 탐화(探花)로불리며, 이들 성적 우수자를 포함한 합격자 전원에게는 화려한 장래가 보장되었다. - P9

하량이 비판한 세 가지란 영무 포기, 흥사정토(興師征討)**, 고식기미(姑息羈靡)주장이다.  먼저 영무를 포기하면 서하의 영토가 광대해져 서하와 주변 민족들이 연합할 우려가 있고, 더구나 오량 지방의특산물인 준마를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으로 흥사정에 대해서는 변방에 투입할 병력과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에서 실현이 곤란하며, 만약 소수의 부대를 출동시키면 군량미 보급로가 끊길 것이고, 그렇다고 많은 병력을 출동시키자니 이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고식기미의 방책을 취하게 되면 잠정적인 평화는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나,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서하족은 오량 지방에 흩어져 있는 몇몇 소수민족들을 병합하여 장차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고, 실제로 송나라가 그런 태도를 취하기를 내심 바라고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 P12

"시험은.….."
행덕은 중얼대듯 물었다. 관복 차림의 남자는 행덕을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할 뿐,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행덕은 어이없게도자신이 잠에 빠져 궁중에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는 꿈을 꾸는 사이,
중요한 시험을 스스로 포기한 꼴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잠이 든 탓에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P14

조행덕의 뇌리에 문득 맹교(孟郊)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봄바람에 뜻을 이루니 말발굽 소리 하루 종일 요란하고, 온통 장안(長安)의 꽃으로 넘쳐나네. - P15

조행덕이 서하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저잣거리에서 여자를 만난 지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하랑의 안변책이나 서하가 장차 중국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 따위는 이미 조행덕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린 후였다. 서하는 자신이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가지고 있고자신의 이해를 뛰어넘는 한 여자의 피가 흐르는 북방의 수수께끼 같은 민족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힘차고 가치 있는 무언가가 끈적끈적한 기름 덩어리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행덕은직접 가서 자신의 손으로 그것들을 접해보고 싶었다. 저잣거리에서만난 서하 여인이 한 가지 일에 집착하는 행덕의 선천적인 정열에 불을 지펴 그쪽으로 향하도록 등을 떠민 셈이었다. 조행덕은 어떻게든서하라는 나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 P24

"죽어버리면 어쩔 것이오?"
"누가 죽어! 내가 말이냐?"
주왕례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나라고 죽지 말라는 법은 없지. 하나 내가 죽어도 비석은 세워라."
"그럼 내가 죽으면 어쩔 것이오?"
"네가 죽으면 곤란하지. 모든 것이 허사가 되니까. 가급적 죽지 않도록 해라. 하긴 죽을지도 모르겠군. 부대가 출전하기 전날 밤 나와이야기를 나눈 놈은 죄다 죽었어. 너도 죽을지 모르지."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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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간의 문제는 남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녹록지 않다고.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각자의 말을 들어 주는 것, 그저 묵묵히 들어 주는 것뿐이야. 절대 반론을 제기해서는 안 돼. 그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니까. 다 듣고 나서 그렇구나, 지당한 말이다.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기회를 봐서내가 전하겠다고 대답하는 거야.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진짜로 전하면 안 돼. 어떻게 되었느냐고 나중에 추궁을 당하겠지만, 그때는 그냥 견디면 돼. 여자들의 분노의화살이 자네를 향하도록 하는 것, 해결책은 그뿐이야." - P105

"가가씨는 사건 수사를 하는 게 아니었나요?"
"물론 하고 있죠. 하지만 형사가 하는 일이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사건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 역시 피해잡니다. 그런 피해자들을 치유할 방법을 찾는것도 형사의 역할입니다."
다미코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젓가락을 꼭 쥔 손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머리 위에서 풍경이 딸랑딸랑 울렸다. - P278

"전 말이죠, 이 일을 하면서 늘 생각하는 게 있어요. 사람을죽이는 몹쓸 짓을 한 이상 범인을 잡는건 당연하지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철저히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걸 밝혀내지 못하면 또 어디선가 똑같은 잘못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해서 알아낸 진상으로부터 배울 점도 많을 겁니다. 실제로 기요세 고우키 군도 그랬고요.
그래서 변한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 말고도 배워야 할 사람이 더 있다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 P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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