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경칩驚蟄
술렁거리는 봄,
겨울잠을 깨우다

개구리에 대한 추억 - P36

개구리에 대한 추억 
요즘이야 사정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는기나긴 겨울방학을 지내는 방법이 그리 다양하지 못했다. 눈이 오면 눈사람이나 만들고 눈싸움을 한다. 비료부대 한 장 들고 뒷산언덕 위로 올라가 눈썰매를 타거나, 오후 햇살이 포근한 느낌이 들라치면 썰매를 들고 얼어붙은 강가로 나간다. 이도저도 아니면 동네 공터에 모여 담벼락에 옹기종기 기대서서 해바라기를 한다. - P36

사실 어린 아이들이 그늘진 겨울 골짜기를 쏘다녀봐야 잡을 수있는 개구리는 고작해야 몇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땀도 나지만 손발이 추위를 이기지 못할 즈음이면 아이들은 바람막이가 될 만한 바위 아래 햇살 잘 드는 곳을 골라 자리를 잡는다. 마른 나뭇가지를 끌어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개구리를 구워 먹는다.재가 잔뜩 묻은 개구리 뒷다리를 들고 재잘거리다 보면 겨울 반나절이 금방이다. - P37

당시만 해도 생명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할주변머리도 없었고 또 그럴만한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냥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먹듯 개구리를 잡아 구워 먹었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짓을 했노라고 비난한다면 변명할 마음은 없다.
정말 죄스러울 뿐이지만, 강변하자면, 그것은 가난한 동네에서 겨울을 나는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겨울 별식이었다. - P38

개구리 몸짓 하나에 온 우주가 깨어난다! - P38

지혜로운 생각을 많이 드러내는데, 그중 세 가지 신통한 일을적은 것이 ‘지기삼사‘ 이다. 앞으로 일어날 조짐을 미리 알아서 대비했던 세 가지 사례라는 뜻의 이 일화 모음은 어린 시절 동화책속에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비교적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 P39

비 지나자 부평초 모여들고
개구리 소리는 사방 이웃에 가득하다.
해당화는 진실로 한바탕 꿈
매실은 새로운 맛 들려는 때,
지팡이 세우고 한가로이 남새 북돋고
그네에는 노는 사람 뵈질 않는다.
은근한 목작약만이
홀로 남은 봄을 보내는구나.

雨過浮萍合
蛙聲滿四隣
海棠眞一夢
梅子欲嘗新
拄杖閑挑菜
鞦韆不見人
慇懃木芍藥
獨自殿餘春
소식, <비가 갠 뒤 걸어서 사망정 아래에 이르렀다雨睛後步至四望亭下> - P40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古池や蛙飛び込む水の音
ㅣ마쯔오 바쇼松尾芭蕉, 전이정 옮김 - P41

안개 노을 차지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고띠풀집은 푸르고 험한 봉우리에 높이 걸렸다.
배고프면 먹고 나른하면 잠잘 뿐 다른 일 없는데
봄날 산새의 울음 한 소리에 온산에 꽃이 가득하다. - P42

占斷烟霞心自閑
茅茨高架碧孱顔
飢飡倦睡無餘事 
春鳥一聲花滿山
유방선柳方善,<수암의 시권에秀菴卷子>,《기아箕雅》권2 - P43

새 봄을 노래할 준비를 한다. 경칩이란 원래 개구리뿐만 아니라 땅속의 벌레들이 봄기운에 놀라서 깨어난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다만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개구리였기 때문에아마 그렇게 관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 같다. - P44

초등학교 시절, 국적 불명의 동화책에서 개구리 왕자를 읽은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개구리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주지는않았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는 본 적이 없지만, 뒷날 민속학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한창 책을 읽던 대학 시절에 개구리 알을 먹는풍습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조사에 의하면 전라도 지역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 이 풍습은, 경칩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다니면서 웅덩이나 못가에 있는 개구리 알을 건져서 먹는 것이었다.
‘경칩 먹기‘ 내지는 ‘용알 먹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풍습은허리병이나 보정에 좋다는 속설이 있기는 했지만, 내 생각에는아마도 농사에 방해가 되는 수많은 개구리떼들을 효과적으로 줄여보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얼마만큼의 개구리를 줄이겠는가마는, 적어도 상징적인 행위쯤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P44

초목은 이미 싹을 틔워
절기는 하마 경칩을 지났다.
농가엔 농사일 준비하느라
젊은이들 밭에 나가 있구나.

草木已萌動
節序驚蟄後
農家修稼事
少壯在田畝

허목許穆, <경칩 지난 뒤驚蟄後作>,  <기언記言>권57 - P46

늘어지는 닭소리에 몽실몽실 퍼지는 햇살
경칩 이미 지나자 겨울잠 자던 벌레 날아다닌다.
봄 추위가 아무리 제멋대로라지만
얼음 꽁꽁 얼려 항아리 깰 만한 힘 어디 있으랴.

嫋嫋鷄聲靄靄暉 
已過驚蟄蟄蟲飛
春寒縱道無常候
豈有堅氷破瓮威

유만공柳晩恭, 《세시풍요歲時風謠》 중에서 - P46

지난 주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은 아파트 응달에도 제법 푸릇한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힘이 없어 보이지만 저렇게 삐죽 내미는 고갯짓에 매서운 겨울이 밀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수런거리면서 봄은 대문 앞에 이르러 우리를 부른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겨울잠에서 깨어난다. 이제 겨울옷을 벗고 창문을 열어 봄을 맞이할 때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쇼신쿤東照神君.
도쿠카와 이에야스를 신격화한 이름

주겐
무가에 고용되어 잡무에 종사하는 사람. 무사는 봉록을 받을 때 업무 수당에 상당하는 쌀을 따로 받는데, 이 수당을 받는 무사는 주겐을 의무적으로 고용해야 했다

기도
마치, 다리맡 등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구역의 출입구에서 검문소 역할을 하는 곳. 기도를 담당하는 문지기는 통금 시간에 맞춰 출입문을 닫고 종을 치는 등 맡고 있는 구역을 책임졌다

초메
마치가 골목으로 구획되어 있을 경우 각 블록을 초메라 일컫는다

"이녁은 틀림없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괴한이 찾아왔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만 그자는 다스케한테 찾아온 게 아니었다. 오쓰유한테 찾아왔던 것이다. 오쓰유의 얼굴, 오쓰유의 목소리, 오쓰유의 손을 빌려 칼을 움켜쥐고.

이즈쓰 헤이시로는 미신에 혹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문지방에 올라섰다가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은 적이 많았다. 문지방을 밟으면 그 집안 가장한테 재앙이 내린다는 미신이 있기 때문이다.

셋타
대나무 껍질로 엮어 가죽 밑창을 댄 신발

도신촌
마치부교쇼에서 일하는 중하급 무사들이 모여 살던 마을

무사들은 동백꽃을 죽음을 암시하는 불길한 꽃으로 여긴다는 설이 있다. 꽃이 질 때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데, 그것이 무사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저놈의 까마귀, 어제도 그제도 저 자리에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꾀 많은 새는 이유야 어찌되었든 인간들이 자기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이해했는지,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이 아니면 사람 눈에 잘 띄는 낮은 곳에서 날개를 쉬거나 먹이를 쪼거나 하지는 않게 되었다.

미나토야
야屋는 가게, 또는 그 가게의 주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미나토야란 미나토 상회, 또는 상회의 주인을 가리키는 호칭. 상인들은 이 호칭을 성처럼 사용했기 때문에 상인의 집안 자체를 가리키는 호칭이 되기도 했다

월번
관리인은 마치 자치 조직에 소속되어, 월 단위로 돌아가면서 지신반에서 자치 업무를 담당해야 했다

이즈쓰 헤이시로는 아내는 있지만 자식이 없다. 결혼하고 이십 년이 지났지만 여직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마흔 줄도 중반을 넘어서면서는 거의 체념하다시피 했다.

세상에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아이들이 따르는 남자가 가끔 있는데, 이런 사람은 늘 하는 짓이 어린애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또래를 발견하면 스스럼없이 다가서게 마련이라고 한다.

"꽃구경할 때 나를 그렇게 데리고 가 줬으면 얼마나 좋아."

다스키
일할 때 옷소매를 걷어 올려 고정시키기 위해 어깨에 묶는 끈

미아석
대형 화재나 축제 때문에 미아가 많이 발생했던 에도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신사나 절, 다리 초입 따위에 있는 돌에 미아를 찾는다는 내용의 종이를 붙였다

조메이지 벚꽃떡
얇게편 밀가루 반죽에 팥소를 넣고 말아서 찐 후, 소금에 절인 벚나무 이파리로 감싼 떡. 조메이지 앞에서 팔았으며, 스미다 강둑의 벚꽃 구경을 하면서 먹는 명물이다

마키바오리
하급 무사인 도신은 근무중 하오리를 입을 수 없었으며, 하오리를 입을 때는 밑단을 밑에서 위쪽으로 허리띠에 구겨 넣어서 짧게 입어야 했다. 이렇게 허리띠 속에 하오리 밑단을 구겨 넣은 것을 마키바오리라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달려오고 있다.

한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급하게 달려온다. 어지간히 다급한지 발소리가 투닥닥닥 어지럽다.

평민의 주거 지역 ‛마치’ : 에도는 18세기 초에 이미 인구 백만의 대도시였다. 에도 성, 무가 저택, 사찰, 신사 등이 전체 면적의 팔십육 퍼센트를 차지했으며 오륙십만 명에 이르는 평민들은 불과 십사 퍼센트의 면적에 모여 살았다. 평민들이 사는 동네를 ‘마치’라고 했는데, 원칙적으로는 주요 도로를 기준으로 육십 간(약 백십 미터) 정도를 하나의 마치로 구획했으나 실제로는 규모가 다양했다. 마치는 앞뒤 입구에 ‘기도’라는 출입문을 설치하고 문지기를 둔 다분히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마치는 주택 소유자들로 구성되는 자치 조직이 이끌며, 막부는 평민을 직접 지배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치 조직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권을 행사했다. 덕분에 소수의 관리가 많은 인구를 다스릴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에도에는 약 천칠백여 개의 마치가 있었다.

코에 익은 독특한 냄새도 났다. 녹내처럼 비릿한…….

피다. 오쓰유는 유카타에 피를 묻히고 온 것이다.

"다스케가 살해되었다는군."

"괴한이 와서 오빠를 죽였어요."

주거 형태 ‛나가야’ : 에도 시대, 많은 인구가 좁은 면적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인 주거 형태가 ‘나가야’라는 공동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나가야는 일반적으로 큰길 쪽에 있는 노변 나가야와, 골목에 자리 잡은 쪽방 나가야로 나눌 수 있다. 노변 나가야는 주상복합형으로, 일층에 점포를 두고 점포 안쪽과 이층은 살림집으로 썼다.

고닌구미五人組. 막부가 만든 주민 상호 감시 및 상호 부조, 연대 책임을 지는 제도

‘지신반마치의 자치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요즘 식으로 보자면 파출소, 동사무소, 마을 회관을 합친 듯한 역할을 했다’

하타모토
쇼군 직속 가신 중에서도 쇼군을 알현할 수 있는 신분의 상급 무사

에도 시대에는 무사만이 성을 쓸 수 있었으며, 평민이 성씨를 갖는 일은 극히 예외적이거나 한시적인 일이었다.

마치부교쇼
에도시대 평민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는 최고 기구로, 요즘으로 치면 시청과 경찰청과 지방 재판소를 합친 듯한 곳. 무사나 승려를 관리할 권한은 없었다. 수십 명 정도의 소수 인원으로 운영되었으므로 업무의 상당 부분은 민간인 마치 자치 조직에 의존했다

도신
무사 계급 중 가장 낮은 지위. 그렇지만 무사이니만큼 마치의 평민들은 ‘나리’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에도 시대는 철저한 신분 사회여서 하급 무사가 상급 무사를 단속·체포할 수 없었다. 마치부교쇼는 평민만을 관리한다.

하오리
기모노 위에 덧입는 상의로, 격식을 차릴 때 입는다. 에도 시대에는 어느 정도 직책을 맡은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다

에도 시대의 평민은 기본적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관리인의 신원 보증이 있어야 이사가 가능했다

그러나 곤키치의 얼굴에 아무리 분칠을 하고 빨간 격자문유곽에서는 기녀들을 빨간 격자문 안에 나란히 앉혀 놓고 손님을 끌었다 안에 앉혀 놔도 손님 한 명 들 리 없다. 가루차도 제대로 빻지 못할걸, 하고 생각하며 헤이시로는 웃었다막부가 공인한 유곽 요시와라에서는 흔히 손님을 받지 못한 기녀에게 가루차 빻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싸워야 한다. 4가지 이유를 들겠다. 신앙을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하느님의 대리자인 황제를 위하여, 가족과 벗들을 위하여 우리는 싸우는 것이다.

첫째는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적에게 승리를 허락하신다면 이는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음이다.

둘째, 영광스러운 조국과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전쟁에서 지면 한때 찬란했던 우리의 명예는 수치와 모멸감 속에 사라지고, 이교도 폭군들에게 넘어가게 되므로 우리는 싸워야 한다.

넷째,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들, 그리고 혈육과 벗들을 약탈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결사 항전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희망이시니,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이 난국을 맞았으나, 진심을 다하여 나의 명령에 따른다면 이 어려움으로부터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다.

알라(Allah)를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자는 아주 적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에게 득이 되고 탈취할 노략품들이 있을 때에만 불길에라도 뛰어들 사람들입니다.

위대하신 알라께서는 "선지자여, 불신자와 위선자들에게 신성한 전쟁을 선포해 대항하라. 지옥이 그들의 안식처요 종말은 저주스러우리라"(꾸란 제9장 타우바 73절)고 말씀하십니다.

"도시가 함락되었다. 더는 살아서 무엇하랴."
그러고는 말을 몰아 적들의 한가운데로 달려 들어간다. 그의 몸은 조각이 났다.

"아버지, 당신이 술탄이시거든, 돌아와 당신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만약 자식인 저를 술탄이라 하신다면, 제국의 술탄으로서 당신에게 명하노니 돌아와 저의 군대를 이끌어주소서."

오스만 제국 13대 술탄 메흐메드 3세는 스물아홉 살 때인 1595년, 등극하자마자 무려 열아홉 명의 형제를 살해했다. 이 무자비한 전통은 1603년, 메흐메드 3세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되었다.

오스만 세력의 팽창과 확장, 그 결정적 계기가 된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 과정을 이룩한 메흐메드 2세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내부 결속과 리더십 확립이 절실했다. 정복자 술탄을 위한 가장 훌륭한 희생양, 그가 바로 할릴 파샤(Çandarlı Halil Paşa)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탄생(330년 5월 11일, 수도 이전)과 멸망(1453년 5월 29일), 황제의 죽음(1453년 5월 29일)과 술탄의 죽음(1581년 5월 3일)이 모두 5월에 발생했다. 5월은 생성의 달이면서 또한 소멸의 달인 것인가. 역사는 5월에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증손자인 쉴레이만 1세[10대 술탄, 재위 1520~1566년, ‘대제(the Magnificent)’]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 및 중동 일대에 약 560만㎢의 최대 강국을 건설한다. 정복 국가로서 광활한 지역의 다양한 민족과 세력, 종교와 문화를 아우르며 623년이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존속한 오스만 제국은 세계에서 특별한 역할과 위치를 구축해왔다. 그 기틀을 놓은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 메흐메드 2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교에는 어떠한 강요도 따르지 않나니 진리는 암흑 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꾸란 제2장 바까라 256절)
나의 비망록도 이로써 끝이 났다. 자, 이제 프란체스를 만나야 할 시간이다.

"메흐메드 2세의 정복 전쟁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정복자 사후 150년이 지나도록 이 나라는
유럽·중동·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존속되었다.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이 그 나라이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거나
국토를 회복한 나라는 모두 46개국에 이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