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행덕(趙行德)이 진사시험을 치르기 위해 고향인 호남(湖南) 시골에서 수도 개봉(開封)으로 상경한 것은 송나라 인종(仁宗)의 재위기간인 천성(天聖) 4년(서기 1026년) 봄의 일이었다. - P7
*진사시험: 수나라 때 시작돼 송나라 때 완비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된 중국의 고등문관 임용시험을 과거라 불렀고, 이중성시 (省試, 중앙조정에서 치른 시험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불렀다. 성시 다음 단계 시험을 전시(殿試)라 하여 황제가 친히 주관하였다. - P7
인종에 앞서 진종(眞宗)은 몸소「근학시(勤學詩)」 를 만들어 학문에 의한 급제야말로 부귀를 얻는 지름길임을 천하에 알렸다.
집안을 부유하게 하려면 기름진 토지를 사지 말지어다. 천만 석의 곡식이 서책 속에 있도다. 편안한 주거를 원한다면 호화로운 저택을 짓지 말지어다. 서책이 곧 황금의 집이니라. 집을 나섬에 수행할 자 없음을 탄식하지 말지어다. 책 속에 준마 있어 무리를 이루도다. 배필을 고를 때 뛰어난 중매쟁이 없음을 탓하지 말지어다. 구슬같이 고운 얼굴의 여인이 서책 속에 있도다. 대장부가 평생 뜻한 바를 이루려면 창가에 앉아 육경(六經)*을 읽는 데 매진할지어다. - P8
서서히 더위를 느끼게 하는 초여름 햇살이 느릅나무 너머 대로변으로 쏟아지던 어느 날, 그는 이부(部)에서 주관하는 신(身), 언(言), 서(書), 판(判) 시험에 나오라는 통지를 받았다. ‘신‘은 당당한 용모와풍채, ‘언‘은 논리정연한 언변, ‘서‘는 수려한 필체, ‘판‘은 법률의 이치에 대한 판단력을 으뜸으로 삼았다. 여기에 합격하면 이제는 궁중에들어가 황제의 질문에 답하는 최종시험"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상위 세명은 각각장원(壯元), 방안(眼), 탐화(探花)로불리며, 이들 성적 우수자를 포함한 합격자 전원에게는 화려한 장래가 보장되었다. - P9
하량이 비판한 세 가지란 영무 포기, 흥사정토(興師征討)**, 고식기미(姑息羈靡)주장이다. 먼저 영무를 포기하면 서하의 영토가 광대해져 서하와 주변 민족들이 연합할 우려가 있고, 더구나 오량 지방의특산물인 준마를 얻을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으로 흥사정에 대해서는 변방에 투입할 병력과 군량미가 부족한 상황에서 실현이 곤란하며, 만약 소수의 부대를 출동시키면 군량미 보급로가 끊길 것이고, 그렇다고 많은 병력을 출동시키자니 이에 따른 백성들의 부담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고식기미의 방책을 취하게 되면 잠정적인 평화는 바라볼 수 있을지 모르나,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서하족은 오량 지방에 흩어져 있는 몇몇 소수민족들을 병합하여 장차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고, 실제로 송나라가 그런 태도를 취하기를 내심 바라고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계략에 말려들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 P12
"시험은.….." 행덕은 중얼대듯 물었다. 관복 차림의 남자는 행덕을 경멸의 눈초리로 노려보기만 할 뿐, 한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행덕은 어이없게도자신이 잠에 빠져 궁중에서 황제의 질문에 답변하는 꿈을 꾸는 사이, 중요한 시험을 스스로 포기한 꼴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잠이 든 탓에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 P14
조행덕의 뇌리에 문득 맹교(孟郊)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
봄바람에 뜻을 이루니 말발굽 소리 하루 종일 요란하고, 온통 장안(長安)의 꽃으로 넘쳐나네. - P15
조행덕이 서하에 가기로 결심한 것은 저잣거리에서 여자를 만난 지보름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하랑의 안변책이나 서하가 장차 중국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 따위는 이미 조행덕의 뇌리에서 사라져버린 후였다. 서하는 자신이 해독할 수 없는 문자를 가지고 있고자신의 이해를 뛰어넘는 한 여자의 피가 흐르는 북방의 수수께끼 같은 민족이었다. 그곳에는 자신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힘차고 가치 있는 무언가가 끈적끈적한 기름 덩어리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행덕은직접 가서 자신의 손으로 그것들을 접해보고 싶었다. 저잣거리에서만난 서하 여인이 한 가지 일에 집착하는 행덕의 선천적인 정열에 불을 지펴 그쪽으로 향하도록 등을 떠민 셈이었다. 조행덕은 어떻게든서하라는 나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 P24
"죽어버리면 어쩔 것이오?" "누가 죽어! 내가 말이냐?" 주왕례는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나라고 죽지 말라는 법은 없지. 하나 내가 죽어도 비석은 세워라." "그럼 내가 죽으면 어쩔 것이오?" "네가 죽으면 곤란하지. 모든 것이 허사가 되니까. 가급적 죽지 않도록 해라. 하긴 죽을지도 모르겠군. 부대가 출전하기 전날 밤 나와이야기를 나눈 놈은 죄다 죽었어. 너도 죽을지 모르지."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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