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의 상징
충주라고 했을 때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경우에 따라 제각기 다를 것이다. 나이 드신 분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자유당 시절에 처음으로 공장다운 공장으로 기공한 충주비료공장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반드시 나와 그것부터 생각날 것이고, 물산으로 얘기하자면 충주 사과가 유명하고, 산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하늘재라 부르는 계립령(鷄立嶺)이, 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주호유람선, 관광지로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분은 수안보온천, 역사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분은 중원고구려비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 P301

그러나 목계나루는 충주 답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거리로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정서적으로도 여기서 충주로 들어가야 충주에 온것 같다. 목계나루 강 건너 저편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최대의 조창(漕倉)인 가흥창(可興倉)이 있었다. 여기는 그 옛날에 남한강 물류의 허브였던곳이다. - P302

중원고구려비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미터, 폭은55센티미터, 두께는 33센티미터이고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었다. 발견 당시 행정구역이 중원군이었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충주고구려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 P313

중앙탑
 중앙탑공원은 근래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이름이고 본래 이곳은 중원군 가금면 탑평리이다. 강변 한쪽 들판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평리 칠층석탑‘이라고 불리며 일찍이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전성기에 세워진 것으로 동시대에 유행한 삼층석탑과는 달리 7층 구조이고 높이도 14.5미터로 가장 높다. - P324

이를테면 선덕여왕이 황룡사구층탑을 세운 것도 신라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신라에 무릎을 꿇어야 할 아홉 나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또 여주 신륵사 강변 절벽에 높이 세운 다층전탑도 남한강 뱃길의 이정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 P324

이러한 우륵의 전설이 깃든 곳은 제천 의림지의 우륵정, 경북 고령의금곡(琴)을 비롯하여 아주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그가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이다. 다산 정약용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우륵이 노닐던 곳으로는 충주의 탄금대와 사휴정(四亭)이 있다고하였다. 그래서 충주를 답사하면 자연히 탄금대를 한번 가보게 된다. - P329

신립은 당시 여진족의 침범을 막아낸용장(勇將)이었다.
그러나 그가조령을 지키지 않고 이곳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전멸한 것은 뼈아픈실책이었다. 1801년 다산 정약용은 유배를 떠나는 길에 탄금대를 지나면서 이렇게 읊었다.(「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 - P334

강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신립을 일으켜서 얘기나 좀 해봤으면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는지

江心湧出彈琴臺
欲起申砬與論事
啓門納寇奚笃哉 - P334

그 사람이 그 자리(관직)에 있을 만한 인물이 못 되면, 이는 하늘을 어지럽게 하는 일이 된다.
(非其人居其官 是謂亂天事)

석양의 탄금대 아래로는 검붉게 물든 남한강이 그 모든 사연을 담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P338

폐사지에 이는 서정
깊은 산골의 폐사지(廢寺址).  절도 스님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빈터, 뿌리째 뽑힌 주춧돌이 모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무성히 자란 잡초들이 그 옛날을 덮어버린 폐사지에 가면 사람의 마음이 절로 스산해진다. 단청 화려한 건물에 금색 빛나는 불상을 모셔놓은 절집에서는느낄 수 없는 처연한 정서의 환기가 있고, 고요한 절터에는 사색으로 이끄는 침묵이 있다. - P341

그래서 나는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고 권했는데 정호승 시인은 "폐사지처럼 산다" 라는 시에서 아예 폐사지에 살듯 하라고 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P342

불상 좌대에서 사위를 둘러보면 거돈사터는 더없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옛 절집 자리는 하나같이 명당이라는 감탄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명당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방향에 맞추어 석축을 쌓고 높낮이를 감안해 단을 쌓음으로써 얻어낸 것이니 차라리 자연을 경영하는 옛분들의 안목이 그렇게 높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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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하여 먹으로 쓴 깨알 같은 글씨 1만 3,311 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편지이다. 누구든 이 편지를 보면 내용은 둘째 치고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울산대곡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큰 빛, 언양‘이라는 기획전을 하면서 이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을 전시했는데 박미연 학예사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그 내용보다 깨알 같은글씨를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황사영이 얼마나 걸려서 썼을까. 그가 토굴에 들어온 것은 1801년 음력 2월이었다. 그는 여기서 각지의 천주교인 박해 상황에 관한 정보를수집하고 토굴로 찾아온 교우 황심(黃沁)과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을상의한  끝에 백서를 썼다고 하는데 완성된 날이 음력 9월 22일이니 7개월 이상 걸렸다는 얘기다. - P285

그 방안으로서 그는 첫째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둘째로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셋째로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호소하여 군함 수백 척과 5, 6만 군대를 데리고 오거나, 그렇지 못하면 수십 척의 군함에 5, 6천 명의 군대라도 가능하다고 했다. - P286

비록 이 나라를 섬멸한다 하여도 성교의 명분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다급한 심정을 토로한 이 문장은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두고두고 황사영 개인의 신앙과 사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천주학의도덕성에 상처를 주게 되었다. - P287

세월이 90여 년 지난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인수했고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공식적으로 복자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행사) 때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 P289

박달재
제천에서 충주로 가자면 봉양면에서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박달재를넘어야 한다. 산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생긴 이름이겠건만 사람들은 박달이와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옛날에 박달이라는 청년이 과거 보러 가는 길에 고개 아래 마을 금봉이와 눈이 맞아 사랑을 했는데 급제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서는 낙방하여 돌아오지 못했고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가슴앓이하다 죽고 금봉이를 끝내 못 잊어 뒤늦게 찾아온 박달이는 금봉이의 허상을 보고 껴안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고갯마루를유행가 가사로 많이 쓴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이 1948년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발표해 크게 히트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 - P293

유행가의 파워는 대단하여 박달재 고개에는 커다란 노래비가 새겨져있고 금봉이와 박달이 동상도 서 있다. 그런 것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강만길 선생님이 이것 좀 보라며 나를 부른다. 제법 오래된 ‘박달재비‘였다. 비문을 읽어보니 문장이 유장하다. 그리고 "1216년 고려의 김취려장군이 거란의 대군을 여기서 물리쳤고 1268년에 고려의이 고장 별초군(別抄軍)이 또한  여기서  몽고의 군사를 막아냈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언론인 천관우의 글이었다. 그분은 제천 출신이었다. - P295

철수네 화실에서
우리는 박달재를 떠나 박달이가 금봉이를 만났다는 아랫마을, 을미년제천의병들이 충주로 쳐들어가기 위해 박달재 너머 하룻밤 야영하며진을 쳤다는 평동 마을에 있는 ‘철수네 화실‘로 향했다.
이철수는 1980년대 초 ‘현실과 발언‘ ‘임술년‘ 그룹 등 민중미술의 소집단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을 때 단기필마로 등장하여 오윤吳潤)의 뒤를 잇는 목판화가 중 한 명으로 맹활약을 했다. 나는 그의 개인전때마다 팸플릿 서문을 썼다. 그것이 세 번이나 된다.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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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곡(九曲)은 어드메오 일각(一閣)이 긔 뉘러니
조대단필(釣臺丹筆)이 고금(古今)의 풍치(風致)로다
져긔져 별유천(別有洞天)이 천만세(千萬世)가 호노라

옥소 권섭 - P212

강에는 긴 다리가 놓여 있어 두 나무꾼과 지팡이 짚은  노인이 조심스레 강을 건너가는데 한편에선 두 마리 소가 사람을 태우고 느릿하게 강을 건너가고 있고 그 뒤로 송아지가 따라간다. 참으로 시정 넘치는 우리나라의 옛 강마을 풍경이다. - P218

이처럼 단원의 산수화는 명승에 국한되지 않고 평범한 풍광에 시정을듬뿍 담아낸 것이 많다. ‘버드나무 위의 새‘, ‘밭가는 농부‘ 등 아주 일상적인 소재를 보편적  회화미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화가라고 하는 것이다. - P218

이럴 때면 회화라는 장르가 얼마나 위대한가 절감할 수 있다. 겸재와 단원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사람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고 그 옛날의 풍광이 어떠했는지 상상하기 힘들 뻔했다. - P219

영춘현
단양의 모든 것이 다 그렇게 변해버렸지만 영춘(永春)만 은아니다. 오늘날 영춘은 단양의 한 면에 지나지 않지만 그 옛날엔 당당한 현(縣)으로 청풍. 단양·제천과 함께 사군(四郡)을 이루던 고을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영춘은 고구려 때는 아조현(阿朝縣)이었고, 신라 때는  자춘현(子春縣)으로 개칭되어  영월(내성군)의  속현이었다. 고려 때 영춘이라 불리며  원주에 속했다가 조선조 정종 때 충청도로 이속되었고, 태종 13년(1413) 에 현감이 파견되었다. 
그러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단양군의 한 면이 되었다. 오늘날 영춘은 1,0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인구 3,000명 정도의 산골이다. - P220

내가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을 우리나라에서 ‘둘째로‘ 아름다운 길이라고 한 것은 이 영춘가도와 쌍벽을 이루어 어느 것이더 낫다고 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해두었던 것이다. - P222

영춘가도
영춘가도는 50리 옛길이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그 길이 신작로로 닦였고, 현대로 들어서면서는 2차선 찻길이 되었지만 영춘가도는 아직도찾아오는 사람이 뜸하여 길가로 식당·여관·가겟방이 들어서는 관광지의 상처를 받지 않았다.
길은 줄곧 남한강을 따라가며 강물이 비집고 내려오는 육중한 산줄기가 둘러 있고, 길가산비탈에 이따금 호젓한 마을과 외딴집들이 나타난다.
가로변엔 언제 심었는지 플라타너스와 벚나무가 제법 장하게 자라 늘어서 있고, 넓은 강둑엔 옥수수나 감자 같은 강원도 작물들이 재배되며마을 입구 길가엔 접시꽃과 해바라기 같은 낯익은 풀꽃들이 철따라 꽃을 피우고 있다. - P222

영춘 북벽
  영춘의 강 건너는 깎아지른 병풍바위가 족히 400미터쯤 이어졌는데 영조 때 현감이었던 이보상이 석벽에 ‘북벽‘이라는 글씨를 새긴 뒤 영춘 북벽이라 불리게 되었다. 영춘 제일의 명승이다. - P239

베틀재
 영춘에서 영월로 올라가는 길로 충북 · 경북 · 강원 3도가 다 조망된다는 베틀재를 넘어가는 산길(935번 지방도로)이 새로 열렸다고 하여 그쪽으로 가보았다. 듣던 바대로 깊고 깊은 산속에 베틀재 전망대가 나온다. - P240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이다. 그 많은 산성 중 가장 멋지고 감동적인산성을 셋만 들어보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보은의 삼년산성, 상주의견훤산성, 그리고 영춘의 온달산성을 꼽을 것이다. - P241

온달산성
  온달산성은 서쪽으로 돌아가야 제맛이다. 그리고 동쪽 성벽에 이르는 순간 누구든 아! 하는 감탄사를 발하고 만다. 성벽은 산비탈을 타고 포물선을 그리며 동벽은 앞면, 북벽은 뒷면을 엇갈려 보여주며 힘찬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그 아래로 남한강은 더욱 푸르고 길게 펼쳐진다. - P244

내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북한편‘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나는 온달 이야기는 시답지 않은 옛날이야기로만 알고 있다가 바보 온달이야기의 주인공은 평강공주라는 호암 문일평(文一平, 1888~1939)선생의 글을  읽고 큰 깨우침을 받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평강공주는 아주 진보적이고 평민적이고 영웅적인 왕녀였다. - P249

이 이야기는 바보 남편에 장님 시어머니를 모신 지극한 사랑 끝까지신의를 지키는 믿음,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는 인간적 성실성, 바보 남편을 전쟁영웅으로 보필하는 훌륭한 아내, 그리고 처연히 저세상으로 떠나는 대범한 죽음, 저승으로 가는 순간에도 변치 않는 사랑, 거기에다 최고의 지배층과 최하의 평민이 만나는 사회적 일체감을 다른 사람 아닌 평강공주를 통해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사람들은 요즘 영국인들이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그리듯 평강공주를 기렸던 것이다. - P249

옛날에 한양에서 남한강 뱃길을 이용해 경상도로 갈 때는 죽령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편한 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경부선에 해당하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단양8경의 아름다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된 것도 사실은 죽령 덕이 크다. - P250

죽령은 소백산 산자락을 비집고 넘어가는 높은 고개다. 소백산은 국망봉(해발 1,421 미터)을 비롯하여 1,000미터가 넘는 준봉들이 월악산과 속리산을 향하여 남쪽으로 힘차게 치달리는데 도솔봉(해발 1,314미터)과 연화봉(해발 1,394 미터) 사이 산세가 잠시 주춤하면서 낮게 굽이진 곳이 있다. 그사이를 비집고 넘어가는 고개가 죽령이며 그 너머가 경상도 풍기이다. - P250

『삼국사기』에 의하면 죽령 고갯길은 신라아달라 이사금 5년(158) 3월에 열렸다고 한다.『여지도서』에도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가 죽령길을 개척하고  순사하여 죽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개 서쪽에 죽죽사라는 사당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죽령의 내력이다.
멀리서 죽령을 바라보면 산자락 사이가 마치 말안장처럼 우묵하게들어가 그 틈새를 가르고 고갯길이 났지만 워낙에 산이 높은지라 해발689 미터가 되는 험한 고갯길이다. - P250

‘위험물‘ ‘화기물‘ ‘폭발물‘ ‘접근금지‘ ‘책임 안 짐‘… 그리고 해골바가지 그림까지 곁들이며 뒤차에게 안전거리를확보하라고 경고한다. 그 화물차 경고문 중 정말로 겁이 나서 가까이 접근하기무섭게하는 기발한문구가 있었다.

"초보운전"

그래서 노자(老子)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며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고 했고, 나는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고 했던 것이다. - P253

돌미륵을 술종공의 미륵과 일치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있는데, 더 정확한 증거가 나타나 이를 증명할 때까지 믿지 않는 것이나, 일단 믿고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냐 하는 것은 피장파장이라고 생각된다. - P258

최근 단양은 관광객을 부르며 ‘사랑의 고장‘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구담에는 퇴계와 두향이의 사랑이 서려 있고, 온달산성에는 바보 온달과평강공주의 사랑이 들어 있고, 죽령에는 모죽지랑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단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단양을사랑해주기 바라는 단양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을 나는 이해한다. - P258

거기에는 역사적 내력이 있다. 제천은 그 범위가 여러 번 변했다. 삼한시대엔 마한 땅이었다가 4세기 초에는 백제의 영토가 되었고, 5세기에는 고구려 영토로 되어 내토군(吐郡)이라 했다. 그때 청풍은 사열이현(沙熱伊縣)으로 제천이 아니었다.
6세기에 신라 영토로 편입되어 통일신라 때 내제군(郡)으로 개칭되면서는 청풍이 내제군 관할로 들어왔다. 고려시대엔 제주군(堤州郡)으로 개칭되었는데,  조선시대엔 제천은 현, 청풍은 도호부로 위상이 역전되었다. - P262

일제강점기 들어 1914년 군현을 통합· 개편할 때 다시 청풍을 흡수하여 제천군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 제천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읍 이외지역은 제원군(나중에 제천군)으로 독립해 있다가 1995년에 제천시로 다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 P263

"다른건 몰라도 제천의 면 이름 하나는 정말 잘 지었어. 다른 시군에가보면 군내면 군북면 군남면 산내면 산외면·산북면·동면,서면남면하면서 방향만 가리키고 있어서 각 고을의 정체성이 보이질 않아요. 그런데 제천은 봉양·청풍. 한수·백운·송학·덕산·금성..얼마나 멋있고서정성이 있냐. 그 점에서 지자체 중 제천이 가장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어때? 너도 잘 몰랐지?" - P264

장락사 칠층모전석탑과 아파트 단지
 안목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든 처음 이 탑을 보는 순간 저렇게 멋있는탑이 제천 시내에 있고 그것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 P266

"이 탑은 시내에 있다는 것이 아주 중요한 거 같아요. 저기 고층아파트를 배경으로 보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제천이 문화적으로 역사가 깊고 당당하다는 걸 보여주잖아. 유럽에 가면 중세시대 건물이 도심 속에 있는 것이 얼마나 멋있던가.
그러니까 자네도문화재 행정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점을 강조해야 해요. 이 앞에 있는 잔디밭에 무얼 짓거나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러다간 끝장나는 거지."
"예, 명심하겠습니다." - P268

의림지 (명승 제20호)는 밀양 수산제, 김제 벽골제, 상주 공갈과 함께중학교 때부터 교과서에서 삼국시대 인공 수리시설로 배우고 외워서 익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때 이미 관개용 저수지를 만들어 농지를 관리할 정도의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물증이되기 때문이다. - P269

그때 의림지 둑의 축조 방식이 드러났는데 기가 막힌 자연친화적 수축법이었다. 둑을 쌓기 전에 개천 바닥에는 둥근 자갈이 깔려 있었는데, 그 바닥을 깊이 파서  진흙을 깔고 그위에 지름 30~50센티미터 되는 통나무를 가로세로로 묻어가며 버팀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닿지 않는 바깥 면은 굵은 자갈을 섞은 흙으로 덮어 마무리했지만 물에 닿는 안쪽 면은 진흙과 모래흙, 소나무 낙엽을 충충이 다져얹고 다시 굵은 자갈이 섞인 모래흙을 두껍게 덮었다. 이렇게 해서 진흙층은 물의 침투를 막고 낙엽층은 공기가 차단되어 부식되지 않은 채버텨낸 것이다.
지금의 모습은 발굴 뒤인 1973년에 복구해놓은 것이다. 현재 의림지는 둘레 약 2킬로미터, 수심은 8~13미터가량이며 약 300정보의 논에 물을 대고 있다. - P271

수란(水蘭)과 산국화 향기가 시드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水蘭山菊惜香哀

조그만 배를 타고 넓은 강을 더디게 올라가네(...)
小悼沿泂百頃遲

누가 장마와 가뭄으로 차고 준다고 말하겠는가
誰云澇旱被盈虧

방죽 노래(大堤曲) 한 곡조를 큰소리로 부르니
高唱大堤歌一曲

뛰어오르는 물고기와 나는 오리가 각기 천연의 제 모습이네
跳魚飛鵬各天 - P273

최영희(崔永禧) 선생이 쓰신 한국사 기행ㅡ그 터』 (일조가 1987)였다. 특히 최영희 선생이 제천의 배론 천주교 성지와 장담(長潭)의 자양영당을 쓴 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상한 일도 있다. 19세기 한국의 사상과 정치의 갈등이충청도 제천군 박달재 산골짜기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박달재 마루턱에서 제천을 향해 왼쪽으로 10리에 있는 배론에서는골수 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고 오른쪽 10리에 있는 장담에서는 골수위정척사론인(衛正斥邪論人)들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상대를 사것으로 규탄하여 타협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양)한극이 시기의 차이는 있었으나 박달재를 사이에 두고 산골짜기에 자리잡게 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교로 몰린 천주교인들은 나라의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고, 주자학의 전통을 이은 위정척사론인들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세속을 떠나 그 전통성을 이어나가기위해서였다.

이 글이 나로 하여금 배론과 상담 마을을 답사하게 이끌었던 것이다.한국사 책이면 반드시 나오는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가 쓰인곳이고, 1895년 을미의병운동의 첫 봉기가 일어난 곳이라니 그야말로
‘한국사의 그 터‘가 아니던가. - P274

탁사란 ‘이것을 씻는다‘는 뜻으로 초나라 애국시인 굴원(屈原)이 어부사(漁父詞)」에서 "냇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냇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한 탁영탁족(濯纓濯足)에서 왔다. 즉 군자는 시류에 나아가기도하고  물러나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탁사정이 멋있는 것은 사실 정자가 아니라 계곡 때문이다. 탁사정계곡은 규모는 작아도 참으로 어여쁘고, 그윽하고, 환하다. 아마도 제천최고의 탁족처는 탁사정 계곡일것인데 여기까지 와서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 P276

자양영당으로 오는 길에 강만길 선생님은 의병운동에 대해 간략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19세기 말 조선왕조가 멸망의 길로 들어설 때 이에 저항하는 투쟁이크게 두 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의병의 근왕(勤王) 투쟁이고, 하나는 만주 독립군의  독립투쟁이죠. 의병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조선 군대가 해산할 때 - P276

그 수가 8,800명 정도였는데 전국에서 크게 세 번에 걸쳐 일어난 의병의전사자를 3만 내지 4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니 그 투쟁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그리고 의병운동은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결국 독립투쟁으로 이어갑니다. 이것이 의병운동의 역사적 의의입니다." - P277

자양영당 
구한말 의병운동이 처음으로 일어난 곳으로, 1906년 처음 세워질 때는 주희·송시열·이항로·유중교 네분, 8·15해방 직후 유인석 · 이소응 두 분이 더해져 현재 여섯 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이분들이 위정척사파의 정신적 지주와 맥을 잇는 학자들이다. - P277

첫째, 거의소청(擧義淸):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
둘째, 거지수구(去之守舊):  고국을 떠나 옛 정신을 지키는 것.
셋째, 자정수지(自淸志):  스스로 목숨을 끊어 뜻을 이루는 것. - P278

의병기념탑
 자양영당의 의병전시관 앞에는 우리가 으레 볼 수 있는 기념탑이 있다. 국내 어디를 가나 관습상 이런 탑이 있어야 기념관이 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는 좀 달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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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ry***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
I am extremely happy.
지금 기분 표현하기
남몰래 쓰고 남몰래 보는 나만의 일기만큼 나의 기분이나 현재 감정, 심리상태를 솔직하게 표현할 만한 곳도 없을 거예요. 이렇게 현재 심경이나 기분을 나타내는 표현, 영어로는 어떻게 하면 되냐구요? 어려울 것 하나도 없답니다. - P34

자, 그럼 ‘2007년 1월 1일 월요일, 날씨 맑음‘이라고 적어볼까요?
우선 요일인 Monday를 쓰고 그 다음에는 날짜 January 1, 그리고 연도인 2007을 적으면되지요. 마지막으로 Sunny 라고 하면 되는데, 사이사이에는 쉼표를 넣어 구분해주면 된답니다.

Monday, January 1, 2007, Sunny

날씨는 형용사나 명사를 사용해서 간단히 써주면 돼요.
‘맑음‘은 Sunny, ‘구름‘은 Cloudy,
‘구름이 낀 후에 비‘는 Cloudy and rain, ‘눈‘은 Snow, ‘소나기‘는 Shower, ‘바람‘은 Windy라고 하면 되죠.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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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석기를 이리저리 사용하는 다목적 석기가 적고 연모 기능의단순연모가 많다는 것은 석기가 세분화되어 발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것이다. 그리하여 수양개 유적은 공주 석장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과함께 한반도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 특히 강가의 양달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 P194

게다가 청동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집터가 20여 곳이나 발견되어 수양개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구석기시대 유적이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지는곳은 함경도 굴포리 선사유적지 외에는 아주 드물어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 수양개에는 멋진 선사시대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단양 수몰이주기념관과는 격이 다르다. 1980년대와 2000년대 문화수준의 차이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 P195

4·19혁명을 계기로 등장하는 참여시의 선구로는 신동엽(申東曄)과 김수영(金洙暎)을 꼽고 있지만 신동문이  더 앞섰다.
신동문 시인은 1960년 종합교양지 『새벽』 편집장을 맡으면서 최인훈(崔仁勳)의 「광장」을 전격적으로  전재했고, 이병주(李炳注)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굴하기도 했다. 1963년 경향신문사 특집부장을 맡으면서 필화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나온 뒤에는1965년 신구문화사 주간으로 『현대한국문학전집』 등을 펴내며 자신의시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의 발굴에 힘쓰며 출판인으로 살았다.
이 시절 많은 문인들이 그의 사무실을 찾아와 인간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의 취미는 바둑으로, 일본어 번역을 잘하고 개성적인 글씨를 쓰시며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시던 민병산(閔山) 선생과는 문단에서 바둑의 최고수로  쌍벽을 이루어 관철동 한국기원과 명동 기원에서 늘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 P197

신동문 시인은 1969년부터 『창작과비평』대표를 6년 동안 맡다가1975년 『창작과비평』 36호에 돌아가신 리영희(李泳禧) 선생의 베트남전쟁」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풀려나와서는 창비를 떠나 애곡리 수양개 마을로 내려가 농장을 경영하며 문단과는인연을 끊고 그곳 농민들과 어울리며 단양 사람으로 은둔하듯 살았다. - P197

그는 독학으로 배운 침을 잘 놓아 주민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루 수십 명씩 침을 놓았는데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굴다리까지 늘어서기도 했단다. 돈은 절대로 받지 않았고 대신 노래를 한 곡 불러야 침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선 ‘신(辛)바이처‘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지병인 담도암은 고치지 못하고 1993년, 66세로 돌아가셨다. - P197

그의 유언에 따라 장기(臟器)는 여의도성모병원에  기증되었고 시신은 화장하여 수양개 근처의 남한강에 뿌려졌다. 사후 문인과 친지들이1995년 단양 소금정공원에 시비를 세웠고, 2004년 유고시집 『내 노동으로』와 산문전집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간행되었다. 2005년에는 청주 발산공원에 민병산 선생 문학비와 나란히 시비가 세워졌다. 이것이 신동문 시인의 간략한 이력이다. - P198

신동문의 「내 노동으로」
나는 신경림 선생에게 물었다.
"신동문 시인이 왜 절필하셨나요?"
"필화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면서 앞으로 절대로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서 그랬다고 해요. 우리 같으면 강제로 쓴각서이니 무시해도 되겠건만 신동문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매사에 철저하고 완벽한 사람이었어요. 거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어 말과 행동은어긋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신조였거든."
"신구문화사 주간으로 있을 때 많은 문인들이 신동문 선생을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다던데요?"
"사람이 좋아서 인간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지. 김수영은 번역 일감 얻으려고 찾아오고 천상병, 고은, 김관식은 술값 뜯으려고 잘 왔지." - P198

삼봉 정도전
도담삼봉 주차장 옆 빈터에는 조선왕조를 디자인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동상을 근래에 세워 그가 단양과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로 고조할아버지가 봉화호장을 지냈다.
그의 출생지는 봉화라고도 하고, 혹은 외가가 있던 단양 매포읍 도전리라고도 한다. 그가 여기서 유년 시절을 보내 호를 삼봉이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P205

단양군에서 펴낸 『단양의 향기 찾아』에서 그 이름의 내력을 찾을 수있었는데, 작명을 부탁받은 분이 이름을 짓기 위해 9개월간 고민했는데어느 날 좌선 중에 신안(神)이 열려 한글로 ‘소금정‘이라는 이름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글자의 획수 풍수와 주역의 원리를 도입하여소금정이라는 한자를 끼워붙인 것이니 한글도 한자도 아무 뜻이 없다는것이다. 참으로 귀신에 홀린 것만 같다. 내가 아니고 단양 사람들이!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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