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석기를 이리저리 사용하는 다목적 석기가 적고 연모 기능의단순연모가 많다는 것은 석기가 세분화되어 발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것이다. 그리하여 수양개 유적은 공주 석장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과함께 한반도의 대표적인 구석기시대 유적, 특히 강가의 양달유적으로 꼽히고 있다. - P194
게다가 청동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에 이르는 집터가 20여 곳이나 발견되어 수양개에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구석기시대 유적이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지는곳은 함경도 굴포리 선사유적지 외에는 아주 드물어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 수양개에는 멋진 선사시대 유물전시관이 세워져 있다. 단양 수몰이주기념관과는 격이 다르다. 1980년대와 2000년대 문화수준의 차이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 P195
4·19혁명을 계기로 등장하는 참여시의 선구로는 신동엽(申東曄)과 김수영(金洙暎)을 꼽고 있지만 신동문이 더 앞섰다. 신동문 시인은 1960년 종합교양지 『새벽』 편집장을 맡으면서 최인훈(崔仁勳)의 「광장」을 전격적으로 전재했고, 이병주(李炳注)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굴하기도 했다. 1963년 경향신문사 특집부장을 맡으면서 필화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나온 뒤에는1965년 신구문화사 주간으로 『현대한국문학전집』 등을 펴내며 자신의시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의 발굴에 힘쓰며 출판인으로 살았다. 이 시절 많은 문인들이 그의 사무실을 찾아와 인간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의 취미는 바둑으로, 일본어 번역을 잘하고 개성적인 글씨를 쓰시며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시던 민병산(閔山) 선생과는 문단에서 바둑의 최고수로 쌍벽을 이루어 관철동 한국기원과 명동 기원에서 늘 바둑을 즐겼다고 한다. - P197
신동문 시인은 1969년부터 『창작과비평』대표를 6년 동안 맡다가1975년 『창작과비평』 36호에 돌아가신 리영희(李泳禧) 선생의 베트남전쟁」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다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풀려나와서는 창비를 떠나 애곡리 수양개 마을로 내려가 농장을 경영하며 문단과는인연을 끊고 그곳 농민들과 어울리며 단양 사람으로 은둔하듯 살았다. - P197
그는 독학으로 배운 침을 잘 놓아 주민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루 수십 명씩 침을 놓았는데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굴다리까지 늘어서기도 했단다. 돈은 절대로 받지 않았고 대신 노래를 한 곡 불러야 침을 놓아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선 ‘신(辛)바이처‘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정작 자신의 지병인 담도암은 고치지 못하고 1993년, 66세로 돌아가셨다. - P197
그의 유언에 따라 장기(臟器)는 여의도성모병원에 기증되었고 시신은 화장하여 수양개 근처의 남한강에 뿌려졌다. 사후 문인과 친지들이1995년 단양 소금정공원에 시비를 세웠고, 2004년 유고시집 『내 노동으로』와 산문전집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간행되었다. 2005년에는 청주 발산공원에 민병산 선생 문학비와 나란히 시비가 세워졌다. 이것이 신동문 시인의 간략한 이력이다. - P198
신동문의 「내 노동으로」 나는 신경림 선생에게 물었다. "신동문 시인이 왜 절필하셨나요?" "필화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면서 앞으로 절대로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서 그랬다고 해요. 우리 같으면 강제로 쓴각서이니 무시해도 되겠건만 신동문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매사에 철저하고 완벽한 사람이었어요. 거의 결벽증 같은 것이 있어 말과 행동은어긋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 신조였거든." "신구문화사 주간으로 있을 때 많은 문인들이 신동문 선생을 찾아와서 도움을 받았다던데요?" "사람이 좋아서 인간적으로 많이 도와주었지. 김수영은 번역 일감 얻으려고 찾아오고 천상병, 고은, 김관식은 술값 뜯으려고 잘 왔지." - P198
삼봉 정도전 도담삼봉 주차장 옆 빈터에는 조선왕조를 디자인한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동상을 근래에 세워 그가 단양과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로 고조할아버지가 봉화호장을 지냈다. 그의 출생지는 봉화라고도 하고, 혹은 외가가 있던 단양 매포읍 도전리라고도 한다. 그가 여기서 유년 시절을 보내 호를 삼봉이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P205
단양군에서 펴낸 『단양의 향기 찾아』에서 그 이름의 내력을 찾을 수있었는데, 작명을 부탁받은 분이 이름을 짓기 위해 9개월간 고민했는데어느 날 좌선 중에 신안(神)이 열려 한글로 ‘소금정‘이라는 이름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글자의 획수 풍수와 주역의 원리를 도입하여소금정이라는 한자를 끼워붙인 것이니 한글도 한자도 아무 뜻이 없다는것이다. 참으로 귀신에 홀린 것만 같다. 내가 아니고 단양 사람들이!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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