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봄밤에 어울리지 않는, 동지섣달 칼바람같이 서늘한 미소를 보고 한돌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때로는 증오와 복수심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할멈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아지는 주인의 실수를 보고 지적하지 않고, 주인의 발뒤꿈치를 물지도 않는다. 그저 주인의 행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할멈은 다시 한번 등골에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 말하지 않았니. 증오와 복수심은 자칫하다가는 상대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태워버린다고 말이다."

사내들은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투기를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요. 한 공간에서 한 남자의 애정만 바라고 사는 여자들이 투기를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오래 살다 보니 남을 죽도록 미워하는 게 결국은 제 살 깎아 먹기란 생각이 듭디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자신이 낳은 증오가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니 말이오. 그런데 그 둘은 이걸 몰랐던 거요."

"그것도 다 운명이고, 타고난 팔자 아니겠습니까?"

그날도 주막 안은 시끌벅적 활기가 돌았다. 술 한잔 걸친 손님들이 제각각 떠들어 왁자지껄한 게 주막의 여상한 풍경이라지만, 오늘은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비극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귀돌이 일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일남이 눈이 좀 이상했다.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정확하게 어떤 건지 표현할 길은 없었다. 그냥 비어 있는데, 굳이 말해보라면 어두운 동굴 같았다. 눈이 어둡고 텅 빈 동굴 같이 느껴지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남과 눈이 마주친 무당의 눈에 순간적으로 놀라는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로부터 전해져 왔다던 저주를 거는 방법이오. 항아리 속에 독사나 독충을 잔뜩 넣어놓고 뚜껑을 닫으면 서로를 잡아먹다가 결국 마지막 한 마리만 남지. 그게 바로 고독이오. 수많은 독이 농축돼 만들어진 거지. 그러니 고독으로 거는 저주가 얼마나 지독하겠소."

인간은 대체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을 도구처럼 사용했던 무당 일행을 떠올리곤 다들 가슴이 답답한 것 같았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게 약자라고 하더이다. 염매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많다는 건, 세상이 그만큼 어지럽다는 뜻 아니겠소."

화롯불 앞에서 비웃(청어)을 굽고 있는 선노미는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미인도 그림처럼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걸 보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밤새 수풀에서 너구리와 씨름이라도 했는지 밤이슬을 홀딱 맞은 꾀죄죄한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미처 털어내지 못한 나뭇잎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과거를 보려면 관직에 오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관직에 오르는 건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릴 사람이 된다는 걸 의미하지. 비록 네가 글재주가 있다 하나, 아직 속은 다 여물지 못했다. 진정으로 준비가 될 때까지 마음을 갈고 닦는 데 더 힘쓰도록 하거라."

"전라도 순천에서 따온 작설차요. 조선에서 나는 작설차 중에선 최고로 치지요."

"글을 읽는 궁극의 목적이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라는 걸 귀공께서도 잘 아실 게요. 이 몸은 배움이 얕기도 할 뿐더러 내가 가진 걸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소."

"하오나 관직에 오르는 게 자신만을 위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덕과 재주를 갖춘 인물이 벼슬에 올라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면 그게 바로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관직에 오르는 건 권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오. 물론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는 데 그 힘을 쓰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관료는 자신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남들이 가진 것을 뺏기 위해, 혹은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사람들을 짓밟기 위해. 나는 살면서 그런 이들을 질릴 정도로 보았소. 권력은 가진 자에게 힘을 부여할 뿐 아니라, 권력을 쥔 자를 조종하는 힘까지 갖고 있소. 그래서 때로는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지."

‘내 인생 전체가 내 생부와 친형제의 피를 딛고 일궈낸 것이었던가. 나는 이제껏 원수를 아비로 알고 살아왔던가.’

옥이가 입가를 실룩이더니 급기야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죽은 지 십 년이 넘도록 따라 죽기는커녕 온몸에 생명력이 펄펄 넘치는 주모는 겉보기엔 분명 선비들이 말한 정숙한 여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옥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딱히 무리는 아니었다.

"괴짜로 치자면 연암(燕巖) 형님 역시 만만치 않지요. 적성(積城: 현재의 경기도 파주) 현감 부임을 축하한다 하시면서 이런 주막으로 불러내시다니요."

그때 상대방은 이 선비를 연암이라고 불렀다.

선노미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일상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이야기,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는 언제나 선노미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그리고 있을 때면 주막집 허드렛일을 하는 자신의 신분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네가 그린 이야기는 지식을 알려주지도, 충효를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백년 묵은 여우나 처녀 귀신 같은, 어찌 보면 황당하고 뜬구름 잡는 얘기지. 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지?"
선비는 선노미를 질책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얼굴엔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선노미가 간신히 대답했다.

"저는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할 때 사람들은 울고 웃었습니다. 저도 먼발치서 이야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같이 기뻐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니 황당하고 뜬구름 잡는 얘기라도 얕잡아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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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개주막은 한양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십 리쯤 떨어진 마포나루 어귀에 있었다. 마포나루, 혹은 삼개나루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한강을 거슬러 오는 장삿배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젓갈 중에선 특히나 새우젓이 유명해 한양 사람들은 길 가다 새우젓 장수만 보면 출신을 묻지도 않고 그냥 ‘마포 새우젓 장수’라고 불렀다.

뱃사람이든, 장사치든, 옹기장이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한다. 자연스레 객주와 여각이 문을 열었다.

이렇듯 마포나루엔 다양한 직종을 가진 사람들이 부대끼고 어우러져 특유의 활력이 넘쳤다.
나루터에서 이름을 따온 삼개주막은 시끌벅적한 선착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주막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문 앞에 내다 건 ‘주(酒)’자를 볼 수 있을 정도로는 가까웠다. 선착장과 너무 가깝다면 손님들이 소음 때문에 마음 편하게 탁주를 마시기 어려웠을 것이고, 너무 멀다면 하룻밤 묵을 곳을 찾는 투숙객들이 모르고 지나칠 수 있으니 딱 안성맞춤인 곳에 터를 잡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한일(一) 자를 세로로 세운 형태로 구성된 아래채는 객실과 외양간, 뒷간이 나란히 붙어 있어 아래채 객실에서 묵는 손님은 돗자리 아래서 들끓는 빈대, 다른 투숙객의 몸에서 나는 쾨쾨한 발 냄새, 땀 냄새뿐 아니라 뒷간에서 나는 구린내까지 감내해야 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는 음식의 비결은 주모 김씨의 손맛에 있었다.

하지만 한창때도 인물 좋다는 칭찬은 들어본 적 없었을 삼개주막 주모 김씨는 죽었다 깨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을뿐더러 설사 자신이 전설 속 달의 여신 항아처럼 아름답다 하더라도 가볍게 웃음을 팔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몸은 고되더라도 새벽부터 일어나 손발이 부르트게 바지런히 노동해서 버는 돈이 더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씨는 자신의 굵은 허리와 팔뚝을 창피해하기는커녕 일종의 훈장처럼 여겼다.

"애들은 걱정 마소. 내가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새끼들은 책임지고 잘 키울 테니."

도통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외양으로는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주모와 그에 못지않게 내세울 게 없었던 남편이 어떻게 저렇게 멀끔한 아들놈을 만들 수 있었느냐 하는 건데, 어쩌다 조물주는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서른 남짓 보이는 보부상이 삼개주막에 들어선 것은 아직 땅거미가 내려앉기 전, 늦은 오후였다.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는
보상(褓商)과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는 부상(負商)을 합쳐 보부상이라고 한다.

"지금은 술이 깰 때가 아니라 술을 마실 때지. 일도 마쳤겠다, 술 한잔 못 할 이유가 뭐가 있나?"

"이곳저곳 다닌다고 어디 다 좋습니까.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낯선 데서 쪽잠 자며 돌아다니는 것도 고달픕니다."

"그래도 덕분에 세상 구경 많이 할 수 있잖소. 보고 듣는 게 다 공부인데, 형씨는 우리보다 훨씬 더 공부를 많이 한 것 아니겠소."
"물건만 팔았지 보고 들은 게 그리 많지도 않습니다."

"혹시 귀신을 만난 적은 없소? 외딴 산길을 걷거나, 늦은 밤 노숙하는 일도 많을 터인데."
"이 사람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나. 세상천지에 귀신이란 게 어디 있어? 다 사람이 만들어낸 얘기지."

"귀신이란 게 실제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희한한 일들은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저건 그냥 그림이 아니라오. 배우자 그림이지."
"배우자 그림이라니요?"
"저 노인은 복동이 얼굴만 보고서 일면식도 없는 복동이 안사람을 그려낸 거요."

"나는 당신 얼굴만 보고서도 당신 안사람 얼굴을 똑같이 그릴 수 있소. 아직 상투를 안 튼 사내아이나 댕기 머리 계집애도 얼굴을 보면 미래에 어떤 사람과 혼인할지 초상화를 그려줄 수 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저만 보고서 얼굴도 모르는 제 마누라를 그린다니요. 과장이 심하십니다."

"미래를 읽는다……. 그건 너무 거창한 말일 것 같고. 나는 다만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만 보는 능력이 있을 뿐이오. 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일 것 같군. 수많은 인연 가운데서도 남녀 관계로 맺어지는 배우자 운만 보니까. 하지만 인생에서 배우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지. 그러다 보니 어떨 땐 타인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 건지 대충 짐작하게 되는 일도 생기는 거고. 그건 꽤나 성가신 일이오."

"결혼 전에 내 마누라 얼굴을 미리 알았더라면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갔을 것 같거든."
"예끼, 이 사람아. 그러는 자네 안사람은 자네가 서방이 될 거란 걸 알면 좋아서 춤이라도 췄을 것 같은가? 모르긴 몰라도 자네 얼굴 보고서 적잖이 실망했을 걸세."

"당신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성년이 될 때까지 살지 못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다 결혼을 하게 마련이고, 부부의 인연은 하늘이 정해주니까. 또 부부의 연이라는 건 한번 맺으면 어느 한쪽이 죽거나 인연을 끊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거든."

"당신 얼굴을 보면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오르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 얼굴은 뚜렷하지 않고 잡힐 듯 말 듯 윤곽이 희미하게 보인다오. 그건 당신이 그 여인을 취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지. 이제껏 이런 사람은 당신 말고 한 명밖에 본 적이 없소."

"신이 왜 인간에게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안 알려주는지 아시오? 그건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자비요. 알아봤자 인간이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그나마 관가에 가서 자수라도 했으면 사고로 정상 참작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공포에 사로잡힌 두 남녀는 이성을 잃고 그대로 도주해버렸다. 그런 도주 행각이 오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관가로 끌려온 팔생은 살인죄로, 함께 도망가던 여자는 간통 및 남편 살인 교사죄로 같이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사람 속은 참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때는 성실하고 예의 바르다고 평이 자자한 팔생 형님이었는데, 뒤에선 남의 여자를 탐하고 뻔뻔하게 살림까지 차리려 했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쨌든 그 일 때문에 임방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의 선택 역시 그가 뜻한 바대로 되지 않았던 건가.’
후, 후, 후.
노인의 귓가에 아주 오래전 들은 적 있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자식이라는 게 애물단지나 마찬가지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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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에게는 세 가지 습성이 있다고 했다.
‘첫째, 그것은 늘 속삭인다우. 먹잇감을 유혹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이가 들으면 안 되기 때문이지. 떳떳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는 것들이 꼭 속삭이잖수?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 때문에 속삭이는 버릇이 남아 있지. 둘째, 그것은 상대방의 욕망을 부추긴다우. 아무도 찾지 않는 육병달의 집을 어떻게 가게 했을까? 기다란 혀로 저들을 조종했을 거야. 기생충이 메뚜기를 물가로 가게 하듯 말이야. 흐흐흐…. 마지막 셋째, 마귀들은 신을 팔아! 신에게 맹세하니 어쩌니…. 그거 다 거짓말이야. 신을 기만하는 자, 그가 마귀이자 악마야! 그리고 이거 받아.’

괴이한 미스터리 : 괴담 편 | 전혜진,김재회,윤자영,김영민,문화류씨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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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월영시. 현재 신도시 계획이 잡혀 있으며 일부 아파트가 들어서고 분양이 들어간 상태.

이곳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이한 존재들은 인간들로부터 자신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지키고자 한다.

인간과 괴이의 중간지대를 오가는 폐지 줍는 할아버지는 저주받은 물건을 모으러 돌아다니고, 이 지역 토지신인 노란 스웨터를 입은 할머니는 괴이를 막고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만 그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기말고사 무렵, 나는 시험공부를 하다 말고 앱을 켰다.

시험기간일수록 딴짓을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 같은 거라서, 나는 우리 학교 커뮤니티의 중고장터 게시판에 들어가 이것저것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커뮤니티에서는 1학년 1학기 성적이 별 볼 일 없으면 바로 군대 가라고, 그게 그나마 돈 버는 길이라고들 했다.

"그런 생각 하지 말고 성적을 잘 받으면 될 것을, 너희 학교 애들은 왜 그러는 거냐?"

‘당신도 유튜버가 될 수 있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방송장비 팝니다.’
이거 괜찮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오르내리다가 어딘가에 내리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다는 이야기지."

월영시. 경기도의 소도시로, 괴이한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곳.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 소문은 들어본 적 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왜… 무섭냐?"
그때 광희 형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일부러 소리내어 웃었다.
"무섭긴 누가 무서워요. 저거 그냥 병원이잖아요."
"아무것도 안 느껴지면 다행이고."

"레이어라고 알지? 그림 파일 수정하거나 할 때 많이 보잖아. 우리가 아는 이 세계도 겹겹의 레이어로 이뤄져 있어. 괴담은 그러니까 다른 레이어에 속한 세계를 엿보는 거지. 수고해라."

하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할머니의 목소리를. 지닌 것을 버리지 말라던 그 말을.

고물상이란 원래 쓰레기를 치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있는 고물들 중에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서로 붙여서 고치기도 하는 게 고물상이라고.

고해진은 ‘뱀탕에 뱀열마리’를 문자로 자신에게 보냈다. 매일 아침 10시마다 하는 일이었다.

해진은 마흔여섯 살이 된 자신이 아침마다 이 문자를 보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들끓는 성욕도.

일본 AV를 케이블이나 인터넷에서 보기도 했고, 여성용 자위기구를 사용해보기도 했지만 그런 것으론 욕망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터치해주는 촉감을 느껴봤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런 마음은 어느 날 아이패드로 남편 계정의 클라우드에서 20대 베트남 여성과 남편이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을 보고 나서 더욱더 간절해졌다. 그 사진은 아이패드가 남편의 폰과 연결돼 있어 자동으로 뜬 것이었다.

"대학교 나오고 그냥 평범한 직장 다니다 인스타그램에 이것저것 사진 올리고 그러면서 상업사진을 찍게 됐죠. 꿈은 김중만이나 구본창인데 아직은 이런 일만 해요. 첨에 사진 입문했을 때 사진과 카메라 역사도 좀 팠었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카메라 오브스쿠라에서 기원이 된 게 카메라인데, 1826년 프랑스 화학자 니엡스가 찍은 게 세계 최초입니다. 1839년에 다게르가 은판사진술을 완성하면서 발전해서 코닥이나 라이카 렌즈회사 등이 탄생했죠. 지루하죠?"

"산중에 사는 구렁이가 처녀로 변신해서 자신의 집을 방문한 남자를 잘 모셨대요. 한참 지나고 남자가 본처와 아이들을 만나려 하니까 구렁이 처녀가 남자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고, 음식도 넘치게 해줬다죠. 남자가 다시 구렁이 처녀에게 돌아가는 길에 한 노인을 만나게 돼요. 노인은 구렁이가 요괴라면서 죽이는 방법을 알려주죠. 남자는 자신의 처와 아이들까지 잘살게 해준 구렁이를 차마 죽이지 못해요. 구렁이 처녀가 감동해서 남자를 잘살게 해주었답니다."

"나도 그게 어이없어서 인터넷 찾아봤는데, 원래 그런 식으로 고혼을 달래는 풍습이 있다나봐. 장례식장서 망자가 입었던 옷을 들고 흔든다고 하더라고. 조선시대에는 지붕 위에 올라가서 했고. 말하자면, 셀프 고혼이지 뭐."

모든 학교에는 괴담이 있기 마련이다. 월영시에는 올해로 99년 된 월영고등학교가 있는데, 오래된 만큼 전해지는 괴담도 많고 내용도 괴기했다.

‘늦은 밤에 별관에 가지 마시오. 학창시절 괴롭힘으로 자살한 원기들이 가득함.’

새벽 3시가 넘어서야 회원의 집인 월영아파트 앞에 겨우 도착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수업이 다 잘린 탓에 서울의 노른자 대치동에서 쫓겨나 월영시라는 낯선 곳으로 좌천됐다.

골목을 헤매다가 할아버지 한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차로 칠 뻔했다. 할아버지는 빈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새벽 3시에 말이다. 길을 헤매던 나를 보더니 갈라지는 목소리로 "좋은 물건 있어? 바꿀 껴?"라고 물었다.

그나저나 가장 의아한 건 굳이 새벽 2시 반에 수업 전 상담을 진행하겠다는 중3 과외생 박세준과 그의 어머니 송인애이다.

"박세준 학생 어머님이시죠? 학생은 어디 있나요?"
"세준이는 외출했어요."
침을 꿀꺽 삼켰다. 새벽 3시에 중학교 3학년이 외출을 하다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어머니도 보통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2시 반까지 기다리다가 볼일이 있어서 나갔어요."
그러니까 늦게 온 내 잘못이란 뜻인가.
"무슨 볼일인가요?"
"그게 말이에요."
갑자기 송인애가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하마터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갈 뻔했다. 원피스 앞섶이 살짝 벌어지며 삐쩍 마른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도 몰라요."

숨이 턱 막혔다. 그건 파란색 가짜 보석이 달린 반지였다. 하수구에서 발견한 귀걸이와 세트임이 틀림없었다.

"어머, 고마우셔라. 덕분에 살았어요. 아들놈이 제가 들고 있던 칼을 뺏으려 달려들지 뭐예요. 하마터면 역으로 당할 뻔했는데, 감사해요. 세준이는 제가 자기 엄마인지 몰랐겠지만."

"아들놈이 괜히 길고양이를 돌본답시고 새벽에 싸돌아다니니 불안해서 일을 할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선생님에게 미행을 부탁한 건데, 뭐 결과적으론 잘됐네요. 어머, 선생님 혹시 뭔가 착각하신 건가요? 세준이는 괜히 길고양이 치료해준 것 말고는 아무 죄가 없어요."

송인애가 땅에 떨어진 식칼을 주워들었다.
"으…."
"선생님은 잘생기셔서 살려두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목 뒤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의식이 끊겼다.

지금 이 시간에도 괴이한 일은 벌어진다. 악귀에 씌어 일가족을 살해하기도 하고, 이사 간 집에서 귀신에게 시달리기도 한다. 공포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매년 뉴스에 보도되는 내용이다.

1999년, 월영시 괴촌면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현재는 재개발 지역이라 사람이 살지 않지만 과거에는 길게 줄을 선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무당 육병달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통하기로 소문난 그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기세가 대단했다.

그가 선택한 건 새로운 신을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내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신이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지 사람이 신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육병달은 새로운 신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육병달의 집 앞에 무속인과 종교인들이 모였다. 그들은 육병달이 신내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마귀를 불렀다고 했다. 여론은 그들이 시기심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잘못으로 마귀를 불렀습니다. 그것이 이곳에 머무는 자들을 죽이고 제물로 삼을 것입니다. 어서 이곳을 나가세요. 가족들이 그것에게 당했습니다. 이 집에는 마귀가 삽니다.’

"경찰도 기자도 그곳에 들어가는 걸 멈추세요. 행여 호기심에 들어갈 생각은 마세요. 육병달은 들여서는 안 되는 걸 들였어요. 그건 동쪽 저 멀리에서 온 마귀예요. 인간의 마음을 건드려 자신의 제물로 삼는 거죠. 마귀가 바라는 건 인간의 비극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고…."

"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육병달이 부른 마귀를 신봉하는 단체가 있었어요. 인류 종말의 시대에 악마를 섬겨야 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그 사람들이 무당의 집을 다녀왔더라고요. 여기 인증사진도 있어요."

‘에베소서’ 4장 26‐27절이 나왔다. 그녀는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라."

모두 경악했다. 최 작가의 머리가 접시 위에 놓여 있었다. 멍석에는 그녀의 사체가 칼에 찔린 채 널브러져 있었다. 육병달의 가족들이 죽어 있던 모습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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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2세의 죽음을 둘러싼 기묘한 미스터리

노이슈반슈타인성에서 루트비히 2세의 유령을 만난 열세 살 소녀 엘리자베타

유럽의 성은 왕가의 거주용 궁전이나 전쟁을 위한 요새인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성은 궁전도 요새도 아니다. 한 왕이 거액의 국가 예산을 쏟아부어 자신의 탐미적 꿈의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세운 꿈의 궁전이다. ‘광인 왕’, ‘건축 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바이에른 국왕 루트히비 2세(1845~1886)가 이 성을 지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자살이었으나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이 지금도 난무하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노인슈반슈타인성에서 루트비히 2세의 모습을 보았다", "산기슭에 있는 호텔 부근에서 목격했다" 등 여러 가지 소문이 퍼졌다. 그 호텔은 성에서도, 루트비히 2세가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호엔슈방가우성에서도 가까웠다. 고인이 된 왕이 옛날을 그리워하며 유령이 되어 나타났다는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온통 베일에 싸인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

1806년에 수립된 바이에른 왕국은 연방 국가와 여러 공국이 패권을 다투던 13~19세기 독일에서 역사와 품격을 자랑하던 비텔스바흐 가문이 1918년까지 통치하던 나라다. 왕국의 수도는 현재 바이에른주의 최대 도시 뮌헨이다.

과거에는 호엔슈방가우성을 ‘슈반슈타인성’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노이슈반슈타인성(새로운 슈반슈타인성)’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다만 이 이름은 루트비히 2세 사후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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