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봄밤에 어울리지 않는, 동지섣달 칼바람같이 서늘한 미소를 보고 한돌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때로는 증오와 복수심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할멈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아지는 주인의 실수를 보고 지적하지 않고, 주인의 발뒤꿈치를 물지도 않는다. 그저 주인의 행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할멈은 다시 한번 등골에 서늘한 냉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까 말하지 않았니. 증오와 복수심은 자칫하다가는 상대뿐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태워버린다고 말이다."
사내들은 여자에게만 일방적으로 투기를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요. 한 공간에서 한 남자의 애정만 바라고 사는 여자들이 투기를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지요.
"오래 살다 보니 남을 죽도록 미워하는 게 결국은 제 살 깎아 먹기란 생각이 듭디다. 증오가 증오를 낳고, 자신이 낳은 증오가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니 말이오. 그런데 그 둘은 이걸 몰랐던 거요."
"그것도 다 운명이고, 타고난 팔자 아니겠습니까?"
그날도 주막 안은 시끌벅적 활기가 돌았다. 술 한잔 걸친 손님들이 제각각 떠들어 왁자지껄한 게 주막의 여상한 풍경이라지만, 오늘은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비극은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혀지는 법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귀돌이 일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일남이 눈이 좀 이상했다.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정확하게 어떤 건지 표현할 길은 없었다. 그냥 비어 있는데, 굳이 말해보라면 어두운 동굴 같았다. 눈이 어둡고 텅 빈 동굴 같이 느껴지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남과 눈이 마주친 무당의 눈에 순간적으로 놀라는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 ‘그럴 리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예로부터 전해져 왔다던 저주를 거는 방법이오. 항아리 속에 독사나 독충을 잔뜩 넣어놓고 뚜껑을 닫으면 서로를 잡아먹다가 결국 마지막 한 마리만 남지. 그게 바로 고독이오. 수많은 독이 농축돼 만들어진 거지. 그러니 고독으로 거는 저주가 얼마나 지독하겠소."
인간은 대체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 남의 목숨을 도구처럼 사용했던 무당 일행을 떠올리곤 다들 가슴이 답답한 것 같았다.
"나라가 어지러우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게 약자라고 하더이다. 염매로 목숨을 잃는 아이들이 많다는 건, 세상이 그만큼 어지럽다는 뜻 아니겠소."
화롯불 앞에서 비웃(청어)을 굽고 있는 선노미는 전에 없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미인도 그림처럼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 걸 보니 골똘히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밤새 수풀에서 너구리와 씨름이라도 했는지 밤이슬을 홀딱 맞은 꾀죄죄한 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미처 털어내지 못한 나뭇잎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과거를 보려면 관직에 오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관직에 오르는 건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릴 사람이 된다는 걸 의미하지. 비록 네가 글재주가 있다 하나, 아직 속은 다 여물지 못했다. 진정으로 준비가 될 때까지 마음을 갈고 닦는 데 더 힘쓰도록 하거라."
"전라도 순천에서 따온 작설차요. 조선에서 나는 작설차 중에선 최고로 치지요."
"글을 읽는 궁극의 목적이 자신을 수양하기 위해서라는 걸 귀공께서도 잘 아실 게요. 이 몸은 배움이 얕기도 할 뿐더러 내가 가진 걸 남에게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없소."
"하오나 관직에 오르는 게 자신만을 위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덕과 재주를 갖춘 인물이 벼슬에 올라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면 그게 바로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관직에 오르는 건 권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오. 물론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는 데 그 힘을 쓰는 사람들도 있지. 하지만 훨씬 더 많은 관료는 자신을 위해 권력을 사용하오.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남들이 가진 것을 뺏기 위해, 혹은 이해관계가 어긋나는 사람들을 짓밟기 위해. 나는 살면서 그런 이들을 질릴 정도로 보았소. 권력은 가진 자에게 힘을 부여할 뿐 아니라, 권력을 쥔 자를 조종하는 힘까지 갖고 있소. 그래서 때로는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지."
‘내 인생 전체가 내 생부와 친형제의 피를 딛고 일궈낸 것이었던가. 나는 이제껏 원수를 아비로 알고 살아왔던가.’
옥이가 입가를 실룩이더니 급기야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죽은 지 십 년이 넘도록 따라 죽기는커녕 온몸에 생명력이 펄펄 넘치는 주모는 겉보기엔 분명 선비들이 말한 정숙한 여인과는 거리가 있었다. 옥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딱히 무리는 아니었다.
"괴짜로 치자면 연암(燕巖) 형님 역시 만만치 않지요. 적성(積城: 현재의 경기도 파주) 현감 부임을 축하한다 하시면서 이런 주막으로 불러내시다니요."
선노미도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순 없었다. 일상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이야기,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는 언제나 선노미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그리고 있을 때면 주막집 허드렛일을 하는 자신의 신분도, 매일같이 반복되는 고된 노동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네가 그린 이야기는 지식을 알려주지도, 충효를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백년 묵은 여우나 처녀 귀신 같은, 어찌 보면 황당하고 뜬구름 잡는 얘기지. 왜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거지?" 선비는 선노미를 질책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얼굴엔 순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거기에 용기를 얻은 선노미가 간신히 대답했다.
"저는 어떤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을 할 때 사람들은 울고 웃었습니다. 저도 먼발치서 이야기를 엿들으며 속으로 같이 기뻐하고, 화를 냈습니다. 그러니 황당하고 뜬구름 잡는 얘기라도 얕잡아볼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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