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화해 버린 인간의 본능 중에서 딱 하나, 아직 남아 있는 건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 헤어지고 싶지 않은 사람과 작별해야 한다는, 죽기보다 더 무서운 사실을 인식하는 코드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과거를 바꾸면 큰일 난다는 얘기 들어 본 적 있지? 그건 역사적인 큰 사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야. 개인 인생의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나름대로 배열이 정해져 있어. 그걸 움직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움직여서는 안 돼. 그런 짓을 하면 나중에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돼. 왜곡이 발생하거든……."

소리를 질러 외치고 싶었다. 기다려요. 나도 같이 갈래. 혼자 가면 안 돼요.

당신은 이십 년 전에 이곳에서 죽었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이곳에 돌아오기를 시간의 신이―아니, 신이 아니야, 시간의 규율, 시간의 법칙, 타협도 없고 용서도 없는 그 규율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자유라고 리에코는 생각한다.

그것은 그때, 영혼이 하늘에 떠 있었을 때, 차원의 틈을 넘고 시간 축을 건너 세계를 바라보고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바로 먼 미래, 이십 년 후 다시 만나게 될, 더없이 소중한 오직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죽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불러 세웠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인간이라는 말을 그녀처럼 멋들어지게 입증해 주는 작가도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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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죠?"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들었다. 카운터 건너편에서 점원이 웃고 있다. 퉁퉁한 체격의 중년 남자.

"역시. 간토 지방 말씨라서 금방 알아봤어요. 도시 분들은 화초에 대해 잘 모르시니까요."

점원은 즐거운 듯 웃었다. 나 역시 예의상 조금 웃어 보였다.

솔직히 좀 놀랐다. 나야 고급 요정 같은 곳엔 갈 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최고급만 따지는 곳이 이런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이 의외면서도 재미있다.

구원의 저수지―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았다. 구사기조메의 붉은빛마저 일순 퇴색되어 보일 정도로.

아아, 그쪽이란 말인가.

십 년 전, 그 구원의 저수지에서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오늘은 오빠의 기일. 내가 이곳까지 온 이유도 오빠의 목숨을 집어삼킨 구원의 저수지에 꽃이라도 바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사고를 만나면 ‘하느님, 살려 주세요’ 하고 구원을 비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죠."

소송이란 원고와 피고의 싸움이 아니다. 서로 세월과 다투는 싸움에 불과하다. 그만큼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날 수 없는 싸움이기도 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이제까지의 고생이 다 물거품이 된다―지난 십 년간 우리 가족을 지탱해 온 건 오직 이 한마디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위험한 도로일수록 주변의 경치가 아름답다. 악녀는 으레 미녀인 것과 비슷한 이치인지도 모른다.

꽃잎의 빨간색에 마음이 쏠려 문득 생각이 났다.

만주사화의 별명이 ‘저승화’라는 사실이.

"혼자만 살아남아 뻔뻔스럽게 돌아갈 용기가 없었어."

오빠는 조금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광객들을 물색해 쓸 만한 사람을 골라 ‘사고’를 연출한다. 그중에 살아남은 한 사람, 두 사람을 교묘한 말로 속여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어…….

그렇게 마을을 유지해 왔던 거다.

‘구원의 저수지’가 누구를 위한 구원인지, 진짜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나는 회식 자리의 분위기 메이커거든. 내가 없으면 여자들이 전부 심심해한단 말이야. 근데 회식이 끝나고 단둘이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상대는 누구냐 하면 너라는 거야. 세상 참 불공평하다니까."

"맞아, 맞아. 여자들이란 그런 걸 보기보다 상당히 확실하게 계산한단 말이지.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해도 우리 같은 아저씨들에겐 결국 경제력을 바라거든. 조심하는 편이 좋아, 사장님."

기묘한 건,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도바를 ‘봤다’는 것 하나만으로 ‘만났다’고 표현하는 그녀의 언어 감각이었다.

알 마음이 없으면 후지산이 분화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어요―.

우리 회사에서 떠도는 소문에 대해 구미코와 실없는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소문도 하나의 정보거든요. 이쪽이 얻을 생각이 없으면 귀에 안 들어오고, 얻는다 해도 알고 싶은 형태로밖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인데, 신기하다면 또 신기하지 않니? 지폐가 말을 하다니!"

크림소다에서 체리를 끄집어내며 마사코가 말했다.

"응. 그 게임, 언뜻 봐서는 흰 돌이 우세해 보여도 어느 한구석에 검은 돌을 두면 한순간에 다 뒤집혀 버리는 경우가 있잖아?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제정신인 것과 미치는 것도 아주 작은 일로 뒤집히는 거지."

이마데가와 씨는 뛰기 시작했다. 그 얼굴은 기대에 차 있었다. 옴쭉달싹도 못한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그가 무슨 장사를 하는지, 무슨 속삭임을 들었는지, ‘그놈들’이 어떻게 하라고 부추겼는지 깨달았다. 그 순간 마사코가 근무하는 은행 쪽에서 예리한 총성이 한 발 울려 퍼졌다.

"설명해 줄게요. 그러니까 잠시 입 다물고 있어요. 둘이서 동시에 말하려고 하면 혀 깨물리거든요. 당신 혀니까 나하고는 상관없지만요."

"형들 여자친구들이 오늘 하룻밤만 당신 몸을 빌릴게요 같은 말을 하는 걸 들었을 땐 항상 부럽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미인이 ‘나의 연인이 되어 주어 고마워요’라고 속삭여 주었다. 머리칼을 만지고, 손을 잡고, 두 눈을 바라보며 웃어 주었다. 그때 마코토를 만졌던 손은 마코토 자신의 것이었지만 기미에의 손이기도 했다.

공주님, 부디 행복하게 지내. 마코토는 사진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그 반대예요. 제가 당신을 ‘가와노 씨’라고 인식하고 난 후부터 당신은 가와노 씨가 된 거예요. 깊은 산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을 때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나무가 쓰러졌을 때 나는 소리는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뭐 이런 얘기도 있잖아요. 그것과 같은 이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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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딱딱. 마치 과거에서 찾아온 갈 길 바쁜 전령이 발뒤축을 동동거리는 소리 같다.

어서 문을 열어. 기억해 내. 쭉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그 발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다. 젊은 여자다. 나보다 훨씬 어리다.

그녀 때문에 죽은 사람은 나의 약혼자였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일방통행 표지를 무시한 채 내달린 그녀의 차에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좌우로 뻗은 복도의 나무 바닥 위를 시월 말의 가느다란 햇빛만이 비추고 있을 뿐. 교정에서는 아이들이 피구라도 하는지 간간히 환성이 들려올 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오질 않았다.
그리고 발소리는 멈추었다. 바로 양호실 앞에서.

문을 조금 더 열고 복도 쪽으로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아이는 없었다. 틀림없이 발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멈추었는데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마크 말인데요……. 그게 이 학교 마크랍니다."

"지금 마크와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실은 피해자의 남편인 이마자키 씨가, 이 마크는 이십 년 정도 전에 자신들이 이 학교에서 근무할 때 썼던 거라더군요. 이마자키 씨가 전근가기 직전, 그러니까 약 십삼 년 전에 학군 개편이 있었는데 그때 지금의 디자인으로 바뀌었답니다. 당시의 사진도 보여 주시더군요."

"오늘 시체로 발견된 이마자키 아키코는 옛날 제4초등학교에서 제 담임 선생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이토 아키코였습니다만. 그녀의 남편인 이마자키 유키오는 당시 학년주임이었죠."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웃지 말아 주십시오. 선생님이 몽타주에 그리신 아이는 이십 년 전의 접니다."

사람은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 간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자신은 정말로 사라지는 걸까? 육체 같은 건 어쩌면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감정, 사념, 그리고 영혼.

그것들은 남겨진다. 우리가 그것들을 절실하게 품었던 그 장소에 홀로 남겨져 외로이 기다리고 있다. 그 사념의 주인이, 혹은 그것과 공명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닌 이가 찾아와 자신을 깨워 주기를, 자신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저곳을 계속 걸을 것이다. 그녀를 찾아 해맬 것이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어느 어두운 밤거리에서, 아련한 기억이 남아 있는 길모퉁이에서 어느샌가 나와 함께 걸어가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리라. 내 손안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작고 차가운 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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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발소리만 들렸다.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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