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 소리에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새벽 두시 반. 동생 말대로 어김없이 정각이었다.

벨은 계속 울렸다. 착신을 가리키는 빨간 등이 조급하게 깜빡였다. 나는 동생을 채근해서 수화기를 들게 했다.

아까도 얘기했죠? 물건에도 영혼이 깃들 때가 있어요. 영혼이 있는 존재에는 반드시 자정 작용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언제든지 자신을 가장 좋은 상태로 유지해 두려는 기능이요.

왜 그렇게 웃으세요? 네? 만든 얘기? 제가 지어낸 얘기로 당신을 협박하려고 한다는 겁니까?

엄마인 이사코는 다소 무리하더라도 이왕이면 고급품을 사라고 했다. 어차피 또다시 신용카드 신세를 지는 꼴이 되기야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불과 사흘 전에 회사 근처 부티크에서 사만 팔천 엔짜리 가을 정장을 산 참이었다. 엄마 말대로 고가의 물건에 손을 댔다가는 다음 달 카드 값 막기가 엄청나게 버거워지고 만다.

점원의 명쾌한 주장을 듣고서 디자인이 약간 귀엽고 실루엣이 예쁜 상복을 골랐다. 상복을 입으면 여자는 누구든 삼십 퍼센트쯤 예뻐진다.

당신은 말했어요. 인간은 내일 덜컥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플 만큼 절실히 깨달았다, 사는 동안에 하고 싶은 걸 해 두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거다, 자신의 마음에 정직하게 살지 않으면 죽어도 죽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나랑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해 주었어요.

우리의 추억이 훼손될 만한 일은 그만두고 모든 걸 찬란했던 기억 속에 담아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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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무늬의 넥타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다. 분명히 그 무늬다. 쪽빛 천에 손으로 그린 붉은 동백.

잊을 리가 없다. 용서 없는 붉은 빛깔을.

하지만 우리는 괜찮은 짝. 흩뿌려진 퍼즐에서 옆에 놓여야 하는 올바른 조각.

지각을 해도 웃으며 용서해 줄 사람을 기다리게 한 여자들만의 특권. 그녀들은 웃는 낯으로 혼잡한 인파를 밀치면서 이렇게 말한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를 기다리는 남자가 있어서요─.

인간이 ‘행복’을 느끼는 곳은 분명 심장이리라. ‘행복’한 일을 만날 때마다 심장은 쿵쾅거린다. 애인과 단둘이 있을 때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이유는 상대의 손이 그 행복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너는 나를 죽여 놓고서 "잘 지내"라고 손을 흔들며 헤어질 생각인 거야.

‘어머니가 끝내 반대하셔서.’
‘이대로는 너도 불행해질 뿐이고.’
‘잘해 나갈 자신이 없어졌어.’

‘그때 나타난 그녀에게 끌리고 말았어.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미안,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녀를 사랑해. 거짓말 못하겠어. 미안, 정말 미안.’

몇 번이고 반복되는 공허한 말. 알맹이를 잃은 병 속에서 울리는 배신의 목소리. 미쓰루는 그걸 봉인해 버리는 대신 번쩍 치켜들어 아사코를 쳤다.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약혼과 결혼 준비에 든 돈. 일실 이익逸失利益. 사내 연애였기 때문에 아사코는 약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기업이었으니 그대로 다녔다면 괜찮은 월급을 계속 받을 수 있었으리라. 그걸 일실 이익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위자료.

"여자에게는 일과 사생활이 이상한 식으로 불리하게 엮이는 일이 잦죠."

"사장 비서."
"멋지네요."
"겸 내연녀. 그쪽이 끝나서 잘렸어."

택시 운전사나 아사코 같은 웨이트리스, 신칸센에서 옆에 앉았을 뿐인 처음 본 승객─그런 낯선 이에게 속내를 얘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뒤탈 없이 흘려들어 주겠지,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당연히 했지. 소용없었어. 부인은 내 일부터 시작해서 전부 알고 있더라고. ‘여자 놀음은 남편의 병이에요. 죽을 때까지 낫지 않을 테죠’라던데? 내 꼴만 우스워졌지."

"계속 지하에 있으면 비가 내려도, 줄곧 내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 그런데 어느 순간 별생각 없이 옆 사람을 보니 젖은 우산을 들었어. 아, 비가 내리는구나, 그때 비로소 알지. 그러기 전까지 지상은 당연히 화창하리라고 굳게 믿었던 거야. 내 머리 위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고."

‘나도 사실은 웃는 게 아니야’라는 비웃음일 때는 괜찮다. 하지만 ‘나는 웃어 주겠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위험하다. 웃고 웃고 웃으면서 역 승강장에서 뛰어내리는 꼴이 되기 십상이니까.

"돈 문제가 아니야. 나는 남겨지고 싶지 않아. 세상이 나만 따돌리는 걸 허락하고 싶지 않아. 다들 잘하고 있잖아. 왜 나만 안 되지?"

아사코와 그녀, 조금 전 ‘모리이 요코’라고 이름을 밝힌 여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 보고 우뚝 섰다. 서로 이름을 들은 순간 천적이었음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요코는 핸드백을 열고 아쓰시의 명함을 안에 쓱 집어넣더니 소리 내서 닫았다. 손놀림이 꼭 ‘붙잡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사코, 비슷한 재난을 당한 사람이 둘 있으면 말이야. 너만 먼저 빠져나가게 할까 보냐 하는 기분이 드는 법이야. 누구든 그래."

"넥타이를 주는 건 ‘나는 당신에게 목맸다’라는 뜻이야."

요코는 그렇게 말하고 웃더니 날카롭게 찌르는 것처럼 아사코를 보며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배신하면 이걸로 목을 졸라 버리겠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쥐 죽은 듯 조용한 늦은 밤의 도시는 그 자체가 부드러운 사람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알과 비슷한, 어디로도 깰 수 없고 침입할 길이 없는 하나의 물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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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장 행복한 탐정 시리즈 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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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넓은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그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막연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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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새로 임대 물건을 지으면 집세가 올라가는 점인데요."
모로이 사장이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스기무라 씨, 분발할 수 있겠어요?"
나는 즉시 대답했다. "무리입니다."

‘지도 모른다’에 의미는 없다. 하지만 신장개업한 나의 사무소에 첫 번째 의뢰인이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의 일이었다.

인터폰에 대답하고 나서 문을 연 뒤 서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신문 구독에서부터 신흥 종교까지, 권유당할 가능성을 여러 가지 떠올렸지만 의뢰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골판지상자를 열고 내용물을 정리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손이 더러웠고, 트레이닝복 차림에 목에는 수건을 감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래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말할게. 미안하지만 나는 미성년자의 조사 의뢰를 맡을 수 없어. 이건 나뿐만 아니라 대개의 조사 사무소나 탐정 회사가 그럴 거야."
아스나는 속삭이듯이 작게 말했다. "돈이라면 낼 수 있어요."
"돈의 문제가 아니란다. 우리의 직업 윤리 문제지."

―받은 건지 빌린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스나의 어머니는 그 돈으로, 학교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에게 새 스니커즈를 사 줄 수 없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다.

표면상으로는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그룹이란 학교 밖으로 나와도 영향력을 갖고 있다. 연장자가 끼어드는 일도 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다.

중년 남녀의 흐뭇한 교제다.

"스기무라 씨, 쓸데없는 참견이지만 그 안건은 지진에 얽힌, 그, 뭐라 할까요,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부분은 제쳐 두고, 단순한 행방불명 안건임을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미증유의 대재해에 의한 비극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부분을 제쳐 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한마디를 가슴에 담아 두었다.

그때 처음으로 아키미 사장은 내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기업의 수장에게 검사당하는 일이라면, 나는 경험치를 쌓은 바 있다. 힘을 주지 않고, 자기를 낮추지 않고, TV 뉴스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 소녀는 정말로 손해 보는 성격을 가졌다. 나는 새삼 그렇게 생각했다.

―대학도 중퇴해 버렸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진 적도 없는, 부모한테 빌붙어서 사는 멍청한 아가씨예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의 꿈을 꿀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한 좋은 꿈을 꿔 보려고 열심히 발버둥 치면서.

아키미 유타카 씨가 갑작스러운 횡사 전에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났는지 어떤지, 이제 와서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하지만 나는 도플갱어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유타카 씨가 아니라 마쓰나가 군의 이중신이다. 교활하고 사악하고, 사랑이나 부나 행복이나, 그가 그때까지 얻을 수 없었던 모든 것에 굶주려 있는 또 한 명의 그다. 살아 있는 그에게서 떠나 죄를 저지른 불길한 유령이다. 유령이었기 때문에 현실의 위협을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일도 없이 그저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 행동할 수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그렸는데 시체의 그림처럼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일까요."

토니는 아직도 아버지로부터 원전 그림을 그리러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악의를 품을 수 있다!

"이 넓은 세상에는 우리의 상식 범위 안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고를 가지고 그 사고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막연히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행복 속에서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불안해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배짱이 필요한 걸까. 그게 양동이 하나의 분량이라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건 한 컵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컵이 양동이로 자라리라는 전망도 없다. 결혼한 지 칠 년. 나는 언제나 내 컵을 소중히 들고 다녔다. 작지만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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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삶은 오늘도 죽음의 서곡을 노래하였다.
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

세상 사람은
뼈를 녹여내는 듯한 삶의 노래에
춤을 춘다.
사람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
이 노래 끝의 공포를
생각할 사이가 없었다.

(나는 이것만은 알았다.
이 노래의 끝을 맛본 이들은
자기만 알고,
다음 노래의 맛을 알으켜 주지 아니하였다.)

하늘 복판에 아로새기듯이
이 노래를 부른 자가 누구뇨.

그리고 소낙비 그친 뒤같이도
이 노래를 그친 자가 누구뇨.

죽고 뼈만 남은
죽음의 승리자 위인들 - P15

내일은 없다-어린 마음에 물은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
내일은 없나니
... - P17

거리에서

달밤의 거리
광풍이 휘날리는
북국의 거리,
도시의 진주
전등 밑을 헤엄치는
쪼그만 인어 나,
달과 전등에 비쳐
한 몸에 둘셋의 그림자
커졌다 작아졌다,

괴롬의 거리
회색빛 밤거리를
걷고 있는 이 마음,
선풍(旋風)이 일고 있네
외로우면서도
한갈피 두 갈피
피어나는 마음의 그림자,

푸른 공상(空想)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 P18

공상

공상
내 마음의 탑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와 허영의 천공에다
무너질 줄도 모르고
한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 지욕(知)의 수평선을 향하여. - P24

꿈은 깨어지고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霧)에서.

노래하는 종다리,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 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 탑이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 P25

기왓장 내외

비오는날 저녁에 기왓장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웁니다

대궐지붕 위에서 기왓장내외
아름답던 옛날이 그리워선지
주름잡힌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쳐다봅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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