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는 수트케이스에서 전보용지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뒤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썼다.
가쓰코 사망. 긴다이치 씨 보내줘.

수신인은 자기 아내였다.
긴조는 그 전보를 가지고 직접 가와 촌 우체국으로 출발했다.

글씨 자체가 아주 악필인 데다가 갈기갈기 찢은 것을 이어 맞춘 것이라 읽는 데 힘이 들었다. 하지만 기무라 형사와 지혜를 모아 경부가 겨우 판독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섬의 약속, 조만간 지키겠다. 어둠을 틈타든 갑자기 기습하든, 어떤 수단을 써도 상관없다는 약속이었지.

이른바 네 ‘평생의 원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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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원고를 쓰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그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던 집을 보아두고 싶어서, 어느 이른 봄날 오후 산책을 겸해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홀연히 집을 나섰다.

그들 상당수는 아직 이 사건의 진짜 무서운 점을 모르고 있었다.

흔히 남이 들려주는 내용 중 이야기하는 사람의 생각만큼 재미있는 사건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소설 재료가 될 만한 이야기였던 적은 적어도 내겐 한 번도 없었다.

미스터리 작가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한 번쯤 다뤄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이 ‘밀실 살인사건’이다.

범인이 들어갈 곳도 나올 곳도 없는 방 안에서 자행된 살인사건, 그것을 멋지게 해결한다는 것은 작가에게 있어 엄청 매력적인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미스터리 작가라면 대개 반드시 한 번은 이것을 취급했다.

존경하는 친구 이노우에 에이조(井上英三)의 말에 따르면 딕슨 카의 모든 작품은 밀실 살인의 변형이라고 했다.

한데 이 사건에는 또 한 가지 나를 흥분시키는 기묘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시종일관 사건에 얽혀 있는 거문고다. 변사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이 들었다는 황량한 거문고 소리!

밀실 살인, 붉은 방, 그리고 거문고 소리. 다분히 흥분할 만한 요소를 갖춘 이 사건을 내가 기록해두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작가의 명분에 어긋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곳이야말로 이치야나기 살인사건과 중대한 관련이 있는, 이상한 세 손가락 사나이가 처음으로 발길을 멈춘 곳이었다.

이 사람이 이치야나기 가문의 당주인 겐조(賢蔵)였다. 인력거는 그런 이치야나기 가문의 주인을 태운 채 그들 앞을 지나 금세 저편 모퉁이로 사라져버렸다.

"이치야나기 나리가 몇 살이더라. 마흔……?"
"딱 마흔이랴. 근데 초혼이지."
"중년의 사랑이란 젊은 사람보다 더한 모양이지."

"근데 색시는 스물다섯인가 여섯이라던데. 린(林) 씨 따님이라잖아. 그 집 형편으로는 굉장한 상대를 얻은 거지. 꽃가마에 탄 거라 해야 하나. 그런데 그렇게 예쁘장해, 아줌마?"

남자의 오른쪽 뺨에는 커다란 흉터가 있었다. 다친 자리를 꿰맸는지 입술 오른쪽에서 뺨에 걸쳐 깊은 상처가 있었는데, 마치 입이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 남자가 마스크를 한 것은 감기를 예방하기 위해서도, 먼지를 막기 위해서도 아니고 그 상처를 가리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세 사람이 기분 나쁘게 느낀 것은 컵을 든 남자의 오른손 때문이었다. 그 손에는 손가락이 세 개밖에 없었다. 새끼손가락과 약지는 반쯤 잘리고 온전한 것은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뿐이었다.

정말 여주인은 그 컵을 두 번 다시 쓰지 않으려고 선반 구석에 밀어놓았는데, 훗날 이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안광이 종이를 뚫을 만큼 예리한 독자가 여기까지 읽었다면,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진즉 알아차렸어야 한다.

거문고를 뜯는 손가락은 세 개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거문고는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만으로 뜯는다는 사실을…….

농촌에 들어가 보면 도회지에서는 거의 사장된 ‘문벌’이라는 말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만사를 지배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패전 이후 사회의 혼란 때문에 농민들도 지위, 신분, 재산 등을 이전만큼 숭상하지는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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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실 혹은 가설을 바탕으로 외삽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1) SF는 과학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문학이다. 2) SF는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장르다. 과학적 소재가 아니어도 다루는 태도가 과학적이면 SF다. 3) SF는 경이감의 장르다. 4) SF는 인지적 소외의 문학이다. 5) SF는 세계의 변화를 다루는 장르다. 6) SF는 다른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다. 7) 작가가 SF라고 썼으면 SF다. 8) 전부 틀렸다. 하드 SF만 진정한 SF다. 9) 무슨 소리, 고전 SF가 진정한 SF다. 이후는 전부 모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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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공생은 어디에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쉽게 인간적 교훈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개별 작품마다 인간에 치우치거나 비인간에 치우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SF에서 비인간 존재들-자연, 우주, 행성, 테크놀로지, 동물, 식물, 외계 생물-은 인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는 이 행성의 꽤 많은 사람이 비인간 존재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는 사실을, 또 그들 중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부가 SF를 읽고 쓴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버려진 장소들은 이제 가장 번성한 생태계다. 물과 바람, 흙, 그리고 식물들이 가장 먼저 인간이 떠난 장소를 점령하고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러면 인간 대신 다른 동물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운다.

인간 없는 세상에 무엇이 가장 먼저 퍼져나갈지 답은 분명했다. 불모지, 폐허, 무인도를 뒤덮어버리는 식물들. 식물은 황무지를 개척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존재다. 지구의 거의 모든 생물이 식물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들은 말없이 뿌리를 뻗고 세상을 지탱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미루기를 주제로 한 여러 문헌을 조사하고 취재 장소를 여행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글쓰기를 미루어왔는지를 털어놓는데, 저자의 말마따나 "자료 조사야말로 글쓰기에 있어 우리 모두가 가장 선호하는 미루기의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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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책이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우린 충분할지도.

무엇보다 우리가 살며 예기치 못하게 만나는 책들이 우리의 세계를 이전보다 더 흥미롭고 복잡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나의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책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 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일단 저 밖에 있는 세계를 경험하고 오면 남은 평생 인간의 관점에 매여 살아간다고 해도 적어도 이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연결망의 한 점으로, 조그만 구성요소로, 수천수만 가지 현실의 단면 중 오직 일부만을 감각하는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지위를 생각하게 된다.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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