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대륙에서 유태인들이 산 역사는 최소한 2천 년은 족히 된다. 유태인 파울로스(바울)가 1세기 중엽 기독교 복음을 전하러 그리스로 들어왔을 때(돌 1장 참조), 그를 환대하거나 박해한 주역들은 이미 로마 제국 도시들에 자리 잡고 살던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가며 때로는 추방당하고 때로는 죽임도 당하며 늘 차별받으면서도 유태인들은 유럽 여기저기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유럽 대륙에 살던 유태인은 9백만 명에 육박했다. 전쟁 기간에 나치스에 의해 6백만 명에 가까운 유태인이 학살당한 후 유럽의 유태인들은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대거 빠져 나갔다.

스페인 바야돌리드Valladolid를 구글에서 검색하면 축구 관련 기사들이 검색 페이지를 메운다. 축구 명가인가? 스페인 프로 축구 리그에서 바야돌리드가 차지하는 위상을 점검하기에 앞서 이 도시를 존중하고 기억해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도시는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 ‘인권’ 개념이 처음으로 학술적인 논쟁 주제로 다뤄진 곳이다. 죄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무참히 죽인 스페인 사람들의 행위를 비판하는 쪽과 옹호하는 측은 이 도시의 대학에서 1550년에서 1551년에 걸쳐 역사적인 논쟁을 벌였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omé de las Casas(1484~1566). 그는 세비야Sevilla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살며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을 학살하고 학대하는 광경을 생생히 목도했다. 본인도 한때는 그 대열에 낀 적이 있다. 그는 가톨릭 사제의 신분이었음에도 노예 농장주를 겸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는 본국에서 온 도미니코회 수사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만행을 꾸짖는 설교를 듣고 양심의 가책이 날로 심해져 자기 소유 노예를 모두 총독에게 반납했다. 그 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문, 수사로 살며 원주민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라스 카사스는 스페인과 아메리카를 오고가며 본국 정부와 교황에게 아메리카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진력했다. 본국의 일반인들도 아메리카 식민지의 실상을 알 수 있도록 『인디오 땅 파괴에 관한 짧은 역사Brevísima relación de la destrucción de las Indias』를 써서 1552년에 출간했다. 그는 국왕을 움직여 원주민 보호법령을 제정하게 했고, 교황을 설득해 원주민의 인권을 존중하라는 칙령을 얻어냈다.

‘상그레 데 토로Sangre de Toro’(황소의 피)는 스페인 서민들이 부담 없이 마시는 대중적인 레드 와인이다. 음식의 동반자 레드 와인 브랜드가 ‘황소의 피’일 정도로, 스페인은 황소를 찔러 피 흘려 죽게 만드는 투우의 나라다. 오늘날 반대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동물의 권리를 존중한다며 2013년 카탈루냐Cataluña주 의회가 투우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2016년 헌법 재판소가 그 결정을 뒤집었다. 정치인들이 스페인 문화에서 투우를 도려낼 권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유럽인은 여러 형태의 돼지고기를 즐긴다. 반면에 유럽 남쪽 이슬람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발 7장 참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경전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한다. 그런데 오늘날 유럽에서는 종교적인 이유와 상관없이 육식을 거부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개중에는 조용히 자신의 식습관을 고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들의 육식도 방해하려는 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그단스크Gdańsk 구도심 부두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것은 붉은색 원형 건물 두 개를 양쪽에 거느린 채 우뚝 솟아 있는 검은색 구조물이다. 폴란드 내륙에서 싣고 온 곡물들을 이곳에서 배에 싣던 15세기 크레인이다.

이 고색창연한 크레인이 분주히 돌아가던 시대에 도시 경제를 주도한 사람들은 독일인들이었다. 이 도시의 독일식 이름은 ‘단치히Danzig’. 단치히에서 곡물을 실은 배들은 뤼베크(돈 7장 참조) 등 한자 동맹 도시들로 출항했다.

독일군은 단치히에 진주하자마자 1천 500명의 ‘열등 인간’ 폴란드인을 색출해 총살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망자들은 전혀 열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폴란드 혈통의 교사, 종교인, 언론인 등 폴란드인의 지도자들이었다. 먼저 지식인들을 제거한 후 나머지 폴란드인들은 그야말로 열등한 상태로 만들어 노예로 부려서 멸종시키는 것, 그것이 그들의 작전이었다.

와인 애호가들이 가장 선호하고, 따라서 가장 값이 비싼 포도주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에서 나온다. 부르고뉴의 중심 도시 디종Dijon에서 코트 드 본Côte de Beaune까지 50킬로미터되는 거리 안에 최고급 부르고뉴 와인 ‘그랑 크뤼Grand Cru’ 원산지가 집중되어 있다. 디종에서 출발하는 ‘그랑 크뤼’ 와인 투어는 이 도시만이 제공할 수 있는 문화 체험 관광 상품이다.

제노바의 꿈은 당찼다. 지중해 동편은 베네치아가 장악했으나 서편은 자신들이 지배하길 원했다. 같은 꿈을 꾸던 이웃 공화국 피사를 제치고(돌 3장 참조) 제노바의 꿈은 실현되는 듯했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제노바 전성기의 별칭은 ‘바다의 지배자’. 근대가 열리며 원대한 꿈이 점차 왜소한 현실로 바뀔 무렵에도 제노바는 18세기 말까지 독립 공화국의 지위를 지켰다.

파리 관광 코스에 빠짐 없이 끼어 있기 마련인 베르사유의 넓고 긴 궁전을 둘러보려면 끝없이 몰려드는 단체 관광객의 물결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이 도시와 궁전을 건축한 왕이 혹시 살아서 다시 돌아온다면 펄쩍 뛸 상황이다.

‘내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별의별 얼굴색의 오합지졸에게 구경거리가 되라고 이 궁을 지었나?’

루이 14세Louis XIV(1638~1715)가 멀쩡한 루브르궁을 놔두고 이곳에 새로 궁을 지은 이유는 파리의 인파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일이 많은 그 도시를 왜 싫어했을까? 루이는 아직 어릴 때 파리의 시민과 법관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혁명 사태를 겪었다. 미성년자 왕은 루브르궁에 가택 연금 상태로 여러 달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성인이 되면 파리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말 많은 법관들과 파리 시민들 눈치 보지 않고 내 뜻대로 통치할 것이다."

러시아의 표트르Pyotr 대제(1672~1725)는 사냥터였던 시절의 베르사유보다 훨씬 더 열악한 땅에 새로 석조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를 건설하고 1712년에 수도를 모스크바Moskva에서 그곳으로 옮겼다. 이곳에 거주할 궁전을 짓고 ‘몽플레지르Mon plaisir’(나의 기쁨)로 명명했다. 표트르는 이 궁을 유럽인들이 ‘러시아의 베르사유궁’으로 불러주기를 기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은 베르사유궁 공사에서 죽은 인원보다 수십 배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갔으나, 표트르 대제가 그런 사사로운 문제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도 권세를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야심에 있어서는 루이 14세든, 표트르 대제든, 그 누구에게도 밀릴 사람이 아니었다(피 6장 참조). 그는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포츠담Potsdam에 베르사유궁을 닮은 궁을 지어 ‘상수시Sanssoucci’(근심거리 없는)라고 이름 붙였다. 상수시궁을 지은 프리드리히 2세는 1747년에 궁을 완공한 후에도, 그 전이나 마찬가지로 주변 왕국들과 끝없이 전쟁을 벌였고 많은 이들에게 많은 근심거리를 듬뿍 선물했다.

1621년 6월 4일. 스웨덴 예테보리Göteborg는 생일이 분명한 도시다. 이 도시를 낳은 사람은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Gustav II(구스타브 아돌프Gustav Adolf, 1594~1632). 도시의 ‘아버지’는 스웨덴 예타Göta강이 북해로 빠지는 하구에 태어난 이 항구 도시가 스웨덴이 북해를 주름잡는 강국이 되기 위한 교두보가 되기를 기대했다.

예테보리는 스웨덴 도시이지만 네덜란드인이 건설했다. 독일인과 스코틀랜드인도 도시 개발에 적극 참여했다. 초기에는 도시 건설에 공로가 컸던 네덜란드인의 입김이 매우 강했다. 스웨덴인이 도시의 권력을 장악한 것은 1650년대 이후의 일이다.

마케도니아의 미친 자에서 그 스웨덴 사람까지,

이른바 영웅이라는 자들이 사는 목적은 괴상하게도

온 인류를 적으로 간주하거나 적으로 삼는 것.

― 『인간론Essay on Man』, 편지 4번

때는 19세기 초, 장소는 앙굴렘Angoulême 한구석에 있는 낡은 인쇄소 겸 주택. 인쇄된 종이가 널려 있고, 인쇄기가 돌아가기는 하나 일감은 많지 않고, 수입은 초라하다.

인쇄소 사장은 젊은 청년. 인쇄소는 부친의 소유였다. 부친은 지독한 구두쇠다. 읽지도 쓰지도 못하지만 사업 수완이 좋아 인쇄소를 운영하며 제법 돈을 모았다. 그러나 그 돈은 한 푼도 자식에게 줄 뜻이 없다. 외아들을 파리에 보내 최신 인쇄 기술을 배우게 한 것, 그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했다고 자부한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1888~1978)의 그림들에는 도시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도시의 정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을 안다고 해도 별 도움이 안 된다. 1914년 작품 〈몽파르나스 역(우울한 출발)Gare Montparnasse(The Melancholy of Departure)〉에서 당시 파리 몽파르나스 역의 우아한 원형 아치나 삼각형 지붕의 조화로운 자태, 바글거리는 이용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적막한 콘크리트 기둥들과 경사진 평면이 화폭을 지배한다.

"이 도시는 놀랄 거리가 많다. 근사한 유령들이 출몰하고 섬세한 아름다움 속에 중세가 아직 살아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페라라의 ‘형이상적’ 매력은 과거와 현재가 겹쳐 있는 역사성이다. 그가 근무했던 페라라의 ‘산탄나Sant’Anna’ 병원도 당시에는 아직 15세기에 건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페라라는 자치 도시 자격을 13세기 후반에 상실하였으나, 도시를 다스린 에스테Este 가문은 자신들의 궁궐만 치장한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아름답게 가꾸는 데도 열심이었다.

메스Metz(독일어로는 ‘메츠’)는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만나고 충돌해온 로렌Lorraine의 중심 도시다. 메스가 도시로 변하는 시점에서 만남과 충돌의 주역은 로마 군대와 갈리아인들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의 갈리아 원정대는 오늘날 프랑스 땅을 두루두루 정복한 후 모젤Moselle강까지 진격해 이 지역을 평정한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프랑스에서 독일로, 다시 독일에서 프랑스로, 또다시 프랑스에서 독일로 국적이 바뀌는 혼란을 겪던 메스. 이 도시는 독일과 프랑스를 화해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정치가 한 사람을 배출한다.

로베르 슈만Jean-Baptiste Nicolas Robert Schuman(1886~1963). 이름은 프랑스식, 성은 독일식으로 발음한다. 슈만은 룩셈부르크Luxemburg에서 태어났으나 메스에서 중등학교를 다녔고 독일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유럽인들이 계속 꿈꿨던 바를 실현하려 합니다. 그 꿈은 전쟁을 종식하고 영원한 평화를 보장하는 기구를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음악은 끝나기 위해 시작한다. 한 음악의 끝은 다른 음악의 시작. 음악은 순수한 과정 그 자체다. 끝을 향하는,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름다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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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케임브리지 시 한가운데 시원하게 펼쳐진 파커스 피스 한쪽에는 이곳이 축구 규칙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생들이 만든 규칙이 새겨져 있다. 또한 ‘축구’를 뜻하는 세계 각 나라의 언어가 기념물을 장식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숱한 학자와 위인들을 배출했지만, 이 학교 학생들은 학문과 상관없는 스포츠 발전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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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아메리카, 인도, 아시아의 해안을 지배하는 해상 제국으로 부상한 15세기 말. 수도 리스본Lisboa에서는 이제껏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 없던 신기한 장터가 열렸다.

부둣가에서 멀지 않은 도시 한복판, 펠로리뉴Pelourinho(형틀) 광장. 구매자들이 어슬렁거리며 살 ‘물건’을 살펴본다. ‘물건’들은 꿈틀거린다. 네 발 달린 짐승들? 아니다. 꼿꼿하게 두 발로 서서 앞을 응시하는 인간들이다. 벌거벗은 몸, 늠름한 몸매, 검은 피부. 이들의 손과 발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다. 각 사람의 목에는 헝겊 조각 같은 것이 걸려 있다. 양피지에 적어 놓은 ‘가격표’이다.

크레모나Cremona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주의 도시 중에서도 결코 큰 편은 아니지만 바이올린의 세계에서만은 홀로 우뚝 솟아있는 거봉이다. 크레모나가 바이올린의 성지가 된 것은 과르네리Guareri와 스트라디바리Stradivari(라틴어로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라는 두 현악기 명장의 가문이 크레모나 출신으로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지중해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모나코Monaco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국가다. 면적이 2.1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 서울 여의도의 면적도 채 안 되는 크기인 데다 여의도처럼 고른 평지도 아니다.

이 좁은 나라는 모든 이에게 활짝 문이 열려 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부동산을 취득할 수 있다. 집값이 좀 비싸긴 하다. 평균 1제곱킬로미터당 10만 유로로, 한국 돈으로는 1억 3~4천만 원이다.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나라가 없다. 소득세는 한 푼도 내지 않는다.

그러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까? 이 나라 재정의 비밀은 이름 하나에 담겨 있다. 몬테카를로 카지노Casino de Monte Carlo.

몬테카를로 카지노. 세계 어디에서 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 없는 거액을 물 쓰듯 하는 외국 손님들만을 위한 이 도박의 성전은 다른 이들에게는 몰라도 그리말디 가문에게는 무한한 축복이다. 카지노 덕에 소득세를 안 내는 모나코 시민들에게도 복덩어리임은 분명하다.

뤼베크에 남아 있는 것은 한 위대한 작가의 자취만은 아니다. 돈을 벌되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신용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상업을 지탱했던 자랑스러운 전통이 그 도시에 서려 있다.

짧게는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넘게 스페인 북쪽 도시 산티아고Santiago까지 매일 걷고 또 걷는 오늘날의 ‘순례자’ 대부분은 일반 관광객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관광 상품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85년만 해도 불과 690명만이 그 길을 완주했으나 2017년부터는 그 수가 30만 명을 넘었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관광객이 아니라 ‘순례자’의 발길을 안내했다.

‘산티아고’는 도시이자 한 사람의 이름이다. 인종은 유태인, 원래 이름은 ‘야고보Jakobus’.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활약한 예수의 제자로,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 죽임을 당했다. 최초의 순교자 중 한 명인 그는 일찍이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라틴어 ‘성 야고보’(스페인어로는 Sant Iago)가 스페인 토착어로 변하며 ‘산티아고’가 됐다.

주교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왕도 와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즉각 거기에 교회를 지을 것을 명령했다. 교황도 이 소식을 듣고 지체 없이 기적임을 인정했다. 귀한 성인의 시신을 찾는 데 별빛이 결정적으로 기여했기에 산티아고의 지명에는 ‘별의 들판’이라는 뜻의 ‘데 콤포스텔라de Compostela’가 덧붙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중세 유럽인 사이에서는 기독교 문명권의 3대 순례지 중 하나로 꼽혔다. 다른 두 성지는 예루살렘과 로마. 둘 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도시다. 반면에 산티아고는 오로지 성 야고보의 시신 덕분에 생겨난 소도시로, 엄청난 영예가 아닐 수 없었다.

‘비첸차Vicenza’라는 도시의 이름은 한 인물의 이름, 안드레아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가 남긴 건물들은 이 도시가 자랑하는 문화 자산이다.

비첸차 시내와 외곽에 흩어져 있는 23개의 팔라디오 건축물을 감상하려면 장시간의 산책을 각오해야 한다. 눈이 즐거우려면 발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할 때뿐만 아니라 건물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여럿이 모여 공 하나를 차는 놀이를 영국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축구football’라고 불렀다. 정확한 규칙은 알려진 바 없으나 이 ‘축구’는 일종의 민속놀이로, 마을과 마을이, 도시의 한 동네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집단으로 대결하는 경기였다. 공놀이는 쉽게 패싸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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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의 맛은 뜨거운 물과 뜨겁게 볶은 원두가 합작해서 만들어낸다. 차는 잎을 말리기만 하면 되지만, 커피 원두는 최소 섭씨 200도에서 최대 섭씨 280도까지 강한 불에 볶아야 한다. 센 불에 익어 까맣게 변신하지 않은 녹색 커피 원두는 푸석푸석한 푸성귀 맛밖에는 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Ethiopia 사람들이 즐기던 커피가 16세기에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의 본부인 터키Turkey로 유입된다. 오스만 제국은 무슬림 제국. 술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알코올이 차단된 제국의 백성들에게 커피는 강렬한 기호 식품으로 퍼져나간다. 통치자들은 처음에는 커피를 금지하기 위해 맹렬한 조치들을 취했다. 커피 가게에 평민들이 모여서 나랏일에 대해 떠드는 꼴을 두고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터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커피는 반드시 마셔야 했다. 전쟁에 나갈 때도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커피를 두둑이 챙겨가야 했다.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랜 원수. 서로 영토가 닿아 있고 종교가 달랐으니 싸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1683년에는 터키군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 문턱까지 진격한다. 이들은 화약통 곁에 커피 자루를 높이 쌓아놓았다. 연일 대포로 빈의 성벽을 가격했으나 적은 항복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병사들은 커피로 무료함을 달랬다.

교회 안에서 불온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었다. ‘평화의 기도 모임’을 한다며 반동분자들이 거기서 모인 지는 벌써 여러 해됐다. 집회가 끝나고 교회 문이 열린다. 그런데 이날따라 안에서 나오는 인원이 평소보다 많다. 대략 7천에서 8천 명? 놀랍기는 하나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다.

라이프치히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가 개신교 종교 개혁을 일으킨 작센Sachsen 지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20세기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정치 혁명의 진원지 니콜라이 교회는 18세기 초, 감동적인 교회 음악을 수없이 창조해낸 한 거장이 활동하던 곳이다. 그의 이름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1685~1750).

코린토스 Korinthos (코린트)가 위치한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지르는 직선거리는6.3킬로미터밖에 안 된다. 이 좁은 지협은 양편의 두 바다, 사로니코스만과코린토스만을 연결해준다. 고대 그리스시대에는 여기에 육로 디올코스Diolkos를 건설해 배를 끌어서 반대편 바다에내려놓았다.

아프로디테의 고유 영역은 성적 욕구와 섹스. 코린토스항에 정박하는 배들에는 성욕이 들끓는 사내들이 넘쳐났다. 선원과 상인 외에도 순전히 섹스 관광이 목적인 자들도 많았다. 이들이 코린토스에 도착하면 언덕 위에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지어놓은 아프로디테 신전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이도시의 섹스 산업을 주도하고 관리하는본부였다.

기원전 1세기에 지중해 지역을 두루두루 여행했던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n(B.C.64?~A.D.23?)은 언덕 위 신전에서 1천 명 정도의 ‘여사제’가 ‘신도’들을 맞이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이 여신을 섬기는 방식은 ‘신도’들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스트라본이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섬김’의 장소가 신전 내부는 아니었다. 아크로코린토스에서 발굴한 신전 터는 그다지 크지 않다. 여사제들이 열성 신도들을 맞이할 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신전으로 올라온 사내들은 언덕 아래도시의 주점들이나 ‘여사‘들의 거처에서 일을 치렀다. 사내들은 정해진 액수를 미리 지불했다. 이들의 아프로디테 경배는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스트라본은 코린토스에 온 남자들이 가져온 돈을 모두 탕진하는 일도 빈번했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생긴 격언마저 있었다. "코린토스 여행은 아무나 할게 아니다."

포르나이급이건 헤타이라이급이건,
코린토스에서 이들이 섹스를 팔아 받은돈은 온 도시를 살찌웠다. 코린토스가섹스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극진히 섬긴이유다.

단테는 『신곡』의 「천국Paradiso」 11곡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1182~1226)의 위대함을 이렇게 칭송한다. 프란체스코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그녀’와의 결혼이다. 그녀의 이름은 ‘포베르타Povertà’(가난). ‘포베르타’는 예수가 첫 ‘남편’이었으나 예수가 부활, 승천한 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일천백 년이 넘도록 천대받던 이 여인은 1200년대 초, 드디어 새로운 짝 프란체스코를 만난다.

그는맨발에 사시사철 옷 한 벌만 입고 이탈리아 도시들을 걸어 다니며 설교했다.
"돈의 종이 되지 마세요, 가난한 이들을돌보세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세요."
돈 버는 재미에 푹 빠진 이탈리아 도시 상인들로서는 매우 듣기 싫은 소리였다. "어디 조용한 수도원 하나 지어줄테니, 거기서 기도나 하고 지내지?"
돈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제안했으나
‘가난‘과 결혼한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프라하 동쪽에 있는 아담한 중세 도시 쿠트나호라Kutná Hora는 세들레츠Sedlec 납골당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수만 개의 뼈와 해골로 온갖 형상들을 만들어놓은 것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든다. 미사용 제단이나 기둥 장식은 물론이요, 천정에 걸어놓은 샹들리에도 사람 뼈와 해골로 만들었다. 납골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매년 20만 명에 육박한다. 이들이 쿠트나호라나 프라하에서 쓰고 가는 돈도 만만치 않다.

세월이 흘러 금화도 은화도 아닌 지폐와 신용 카드가 결제 수단인 시대에 쿠트나호라는 세들레츠 납골당의 하얀 뼈와 해골들과 함께 관광 도시로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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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는 유럽 연합 국가들 사이에 있지만 유럽 연합 회원국이 아니다. 자국 화폐도 스위스 프랑을 쓰지 유로를 쓰지 않는다. 고집스레 지켜온 자주성을 자랑하는 스위스의 도시들도 자주독립의 역사를 자랑한다. 제네바의 ‘에스칼라드L’Escalade’(방벽 기어오르기)가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1602년 12월 12일, 제네바 성벽을 타고 야밤에 침투하려던 적을 무찌른 싸움을 기념하는 에스칼라드는 이 도시 최대의 축제다.

런던 남쪽 서식스Sussex 지방의 루이스Lewes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우즈Ouse 강가에 자리 잡은 아름답고 조용한 소도시다. 시골 마을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이곳은 1년에 한 차례 어마어마한 불꽃놀이 축제로 타오른다. 그 이름은 ‘루이스 본파이어Lewes Bonfire’. 엄청난 화톳불 축제다.

우리 시대 브리스틀Bristol의 명소 리스트에서 ‘토바코 팩토리 극장Tobacco Factory Theatres’은 빠질 수 없다. 원래 담배 공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었기에 이름이 그렇다. 이 건물에서는 1910년대부터 담배를 생산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회사가 다른 도시로 옮긴 후에는 철거 직전의 흉물로 전락했다. 브리스틀 시는 1990년대에 이 건물을 인수해 다목적 공연장으로 개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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