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바다를 잃어버린 내륙 도시

김해金海는 말 그대로 풀어 쓰면 황금 바다이다. 전라남도 금빛 바다의 도시 여수처럼 경상남도에도 금빛으로 찬연한 바다의 도시가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의외로 김해는 내륙 도시다. 한 부분도 바다와 닿아 있지 않다. 왜 그럴까? 김해는 본래 번영하는 해안 도시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행정적 조치에 따라, 김해는 바다를 잃어버렸다.

서울(3·1 운동, 4·19 혁명, 6·10 항쟁), 광주(5·18 민주화 운동), 부산(부마민주항쟁) 등처럼 거대한 저항의 선봉이 된 적은 없었는데, 어느새 민주화의 성지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46년 김해에서 태어나고, 2009년 김해에서 죽은 한 사람 때문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치고, 3김을 거친 다음 노무현을 거치게 됨으로써 상당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충격과 비탄을 안긴 그의 죽음 이후, 김해의 봉하마을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 광주 망월동 묘역처럼 정치인들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참배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고래와 용왕의 아들의 도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1970년대의 답답한 청춘들의 마음을 울렸던 송창식의 곡 「고래사냥」은 배창호 감독에 의해 1984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고래를 잡으러 떠난 여주인공의 고향은 동해 끝의 우도인데, 동해에는 우도가 없다. 오류인지 의도적 설정인지 궁금해진다. 가사에도 있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동해 바다는 구체적으로 어디였을까. 작사가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울산이었을지 모른다. 울산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를 잡던 고장이었고, 근대 포경도 1899년에 국내 최초로 시작해서 1986년까지 이어진 고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울산은 또한 처용의 도시이기도 하다.

신라의 황금기를 맛보다

고대 경주의 맨해튼은 구황동이라고 한다. 이곳과 인왕동 일부가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세운 최초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궁과 기타 기간 시설이 들어서 있던 구황동을 중심으로 6부의 구역이 둘러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같은 시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우파 - 기독교 세력이 주름잡던 평양은 붉은 도시로, 조선의 모스크바는 한국 보수우파의 수도로 뒤바뀌도록 만들었다.

1961년 이후, 한국의 주류 엘리트가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에서 대구 경북 출신의 사람들로 교체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런 굴곡진 헤게모니의 역사는 오늘날 겉보기로는 마냥 평화롭기만 한 고분과 경상감영공원 터에 깃들어 있다.

일제가 국권의 대부분을 잠식했던 1907년에 서상돈, 김광제 등의 제창으로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해 국권 침탈의 빌미가 되고 있으니 민간에서 돈을 모아 국채를 대신 갚아주자는 운동이었다.

지역을 안정시키는 나라의 요새

안동이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까닭은 산지가 많고, 공업이 덜 발달하여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안동이 내세우는 구호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다. 그러나 안동이 처음부터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였던 것은 아니다.

고타야古陁耶, 고창古昌, 길주吉州, 순주順州, 복주福州, 영가永嘉, 화산花山. 모두 안동의 옛 이름 또는 별칭이다.

화엄종의 가르침은 ‘전체는 하나이며 하나는 전체이다’라는 원융圓融을 근본으로 한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봬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다면 아니 가고 어찌하랴.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고, 이황의 14대손이다.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의 고향은 바로 그의 생가가 몇 대를 이어온 안동의 원천동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꾸밈도, 잡음도 없는 태평함과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면 집안 노인들이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상으로 맛난 것을 쥐여주던 때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이원록이 성년이 될 즈음 가세도 기울었다. 뒤엎어진 세상에서 그는 신식 학문을 배우고, 시를 쓰면서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이육사’라는 그의 필명은 대구 조선은행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을 때 죄수번호 ‘264’에서 나온 것이다.

고성 이씨 참판공파의 시조인 이증이 15세기 중반에 안동에 내려왔다가 그 아들 대에 세운 것이 임청각이다. 안동에 있는 여러 고택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었으며(물론 그 전부가 당시 지은 그대로는 아니나), 임진왜란을 겪고도 불타지 않아 흔히 보는 조선 후기 양반가 건축양식과는 색다른 조선 초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성 이씨는 내내 이 집에 살면서 평화와 풍류 그리고 작은 세도를 누리며 자족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러다가 이증의 19대손인 석주 이상룡에 이르러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문화는 그렇게 흘러간다. 바뀌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옛사람이 아니더라도 가볼 만한 생각이 드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화와 더불어 정신 역시 사라지지 않는 한, 안동은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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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제주도의 갈등과 고난의 역사 현장을 일정에 넣을까. 누가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을 찾을 것인가. 몇 명이나 관덕정을 둘러보며 그 앞에서 벌어진 이재수 민군과 천주교도들의 치열한 혈투를 떠올릴 것인가. 몇 명이나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 땅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극을 알아보고, 왜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

(나, 내가 일정에 넣고, 항파두리성에 오르고, 관덕정을 둘러보고, 4.3을 찾고, 평화를 생각했다.)₩&@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섬이 되는 그날까지, 이 섬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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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이승만은 공과가 있는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공은 제로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그 국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연맹 학살 등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광주 학살도 있지만 당시 전두환은 명목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평시에 민간인을 학살토록 지시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4·3 사건뿐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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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새로운 삼다

제주도는 삼다도로 잘 알려져 있다. 바람 많고, 돌 많고, 여자가 많은 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역사를 훑어보면 또 다른 삼다도라고도 할 수 있다.

첫째, 특산물이 많았다. 한국 땅에서 유독 이 제주에서만 나는 특산물이 많고, 따라서 예부터 공납과 진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둘째, 이방인이 많았다. 풍랑에 휩쓸려 표착한 외국인부터 침략자들, 변방 중의 변방인 이곳에 귀양살이를 온 벼슬아치들까지, 제주 땅에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

셋째, 반란이 많았다. 그것은 이미 이야기한 두 가지 역사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 특산물을 바칠 것을 강요당하다 보면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변방 중의 변방으로 푸대접을 받다 보면 아예 육지 것들에게서 독립하자는 생각이 꿈틀대기 마련이다.

실질적으로 탐라를 가장 먼저 세력권에 넣은 본토의 나라는 백제였다. 476년, 백제 문주왕 때 탐라가 공물을 바치자 ‘탐라왕은 좌평에, 사신은 은솔에 임명한다’라는 왕명이 떨어졌다. 좌평은 백제의 관료조직에서 최고위급이었으며 은솔도 제3품의 고위직이었음을 보면 백제가 탐라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498년, 백제 동성왕은 탐라가 조공하지 않는다 하여 대규모 정벌군을 일으켰다. 다만 무진주(광주)에 군대가 이르렀을 때 탐라가 사신을 보내 항복했기에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백제는 항복을 받는 대신 앞으로 고구려, 신라와 일절 통하지 말 것을 못 박았다. 그리하여 이후 160여 년 동안 탐라는 백제의 속국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조선의 남쪽 변방으로서 제주도의 역사는 흐르고, 1896년부터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었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독립 도道로 분리되었다. 제주읍이 제주도 도청소재지로서 행정과 본토와의 교류 중심지가 되고, 다시 제주시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고려 말의 문장가 이규보는 "이 귤은 제주 이외에는 없다. 더구나 머나먼 바닷길로 보내왔음에랴? 귀족의 집에서도 얻기 어려운 것이니, 황금 포탄처럼 둥글고 윤기 나는 보배일세"라고 노래했다.

"과인이 듣기로는 귤의 공납도 폐해가 심하다 하오. 이 나무가 나면 반드시 끓는 물을 부어 죽인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소?"

"과연 그렇습니다. 민가에 이 나무가 나면 관청이 집주인을 과주果主로 정하고 앞으로 매년 열매를 따서 바치라고 합니다."

다양한 목적의 이방인들이 찾아오다

제주를 찾아온 이방인들.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표류자들일 때도 있고, 유배자들, 침략자들일 때도 있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이승만은 공과가 있는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공은 제로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그 국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연맹 학살 등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광주 학살도 있지만 당시 전두환은 명목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평시에 민간인을 학살토록 지시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4·3 사건뿐이다.

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제주도의 갈등과 고난의 역사 현장을 일정에 넣을까. 누가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을 찾을 것인가. 몇 명이나 관덕정을 둘러보며 그 앞에서 벌어진 이재수 민군과 천주교도들의 치열한 혈투를 떠올릴 것인가. 몇 명이나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 땅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극을 알아보고, 왜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섬이 되는 그날까지, 이 섬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세계의 심장’ 나이가 들다

"난 세계에서 가장 활력을 뿜어내고 있는 곳이 자갈치시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기야 도시치고 숨을 쉬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느냐만, 모든 지리적 여건 때문에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이는 곳은 이곳뿐이야."

부산 출신으로 부산을 종종 무대로 다루었던 유명 만화가, 박봉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에서 주인공 최강타에게 등장인물 김대풍이 하는 말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박시춘, 「굳세어라 금순아」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노상직이 1926년에 쓴 「고운 선생 문집」 증간 서문에도 "선생께서 일단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된 뒤에는 해운대, 임경대, 월영대에서 외로운 신하의 분을 삭일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을 만큼 어느새 정설처럼 된 이야기다.
해운대라는 누대는 어느 사이엔가 없어지고 지명만이 남았는데, 동백나무 숲이 유난히 빽빽이 우거져 있으며 그 동백숲은 바다 건너 동백섬까지 이어져 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 노래를 부른 조용필을 일약 유명가수의 반열에 올렸으며, 어느새 부산을 대표하는 노래가 되어 1987 년 대통령 선거 때 김영삼의 ‘로고송’으로도 쓰였다.

부산은 삼국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끝없이 의식해야 했다. 결국 일본이 이 땅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강제한 문명개화는 부산을 ‘삐까번쩍’한 동네와 잡스러운 동네로 나눠 놓았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부산은 잡스러움을 바탕으로 이를 악물고 성장했다. 그리고 싸웠다. 한국 자체가 나이 먹어가는 지금, 그런 잡스러움을 되살려서 다시 이 나라에 활력을 불러올지, 세련되고 첨단을 걷는 방식으로 새 길을 개척할지, 부산의 앞길이 곧 한국의 앞길이다.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척박한 땅

고려에서 조선까지, 한국과 중국의 대마도 관련 문헌에는 한결같이 "한반도에서 거리가 가깝다"와 "토질이 나빠서 사람 살기에 좋지 않다"라는 내용이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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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이 남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때는 진흥왕의 후대인 문무왕이 삼한을 통일하고, 이곳에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南原京을 설치하고부터다.

신라가 5개밖에 없는 소경小京 중 하나를 이곳에 두었음은 특별한데, 그것은 예향이라서가 아니라 당시 남원이 전주(대략 지금의 전북), 무주(전남), 강주(낙동강 서편의 경남)가 접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남원은 또한 종교에서도 고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했는데, 이 사찰은 한국사 최초의 선종 계열 사찰이었다.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의 정기가 동영東瀛(일본)으로 건너간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만복사는 실상사, 선원사보다 더 발전해 남원 최대의 사찰이 되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승려들이 아침에 시주를 받으러 나갈 때와 저녁에 돌아올 때의 행렬이 실로 장관이어서 만복사귀승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힐 정도였다.

도선이 ‘이 땅의 기운을 눌러야 한다’고 본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절을 짓자. 그래서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마련해 주고, 한과 울분이 맺힌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자. 그래야만 남원으로 모여든 나쁜 기운이 해원 상생의 길을 통해 스러지리라. 이것이 도선이 남원에 여러 사찰을 지은 참뜻이 아니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 개화기 이전의 남원은 두 가지 주제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광한루이다. 광한루는 처음에 황희가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바꾸는 일에 반대하다가 남원으로 귀양을 왔을 때(1419년) 짓고는 광통루廣通樓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앉아서 술 마시며 독서하던 곳이다. 황희는 귀양이 풀려 조정에 돌아간 뒤로 자신이 반대했던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명재상이 된다.

하지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현대의 지성, 이어령은 이렇게 말했다.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의 유명한 옛이야기는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진다. ‘사람의 뜻이 지극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기적을 베푼다’라는 것이다.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심, 흥부의 자애는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대부분의 민초들의 비원이었다.

마음에 황금을 비춰주는 금빛 바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 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이를 막기 위해 보강 설치된 진지가 여수의 전라좌수영과 돌산 방답진이었다. 그리고 1591년에 마지막 묘수가 두어진다. 바로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이었다.

들불처럼 번진 반란은 또한 빠르게 진압되고 말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의 지원까지 받아 철저하게 역도들의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내에 10대밖에 없던 비행기가 모조리 여수 하늘로 날아왔을 정도로 정부는 진압에 진심이었다. 숫자와 무기에서 밀린 반란군은 견디지 못하고 상당수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등장하는데, 정부의 진압은 군인들만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아니, 반란군이 자취를 감춘 여수, 순천을 접수한 진압군은 오직 민간인만을 무력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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