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왕이 태어날 땅인가?

개성은 고려왕조 500년의 수도였으나 고려 이전의 역사는 그리 풍부하지 않다. 온조 재위 10년(기원전 9년)에 말갈이 백제의 북쪽 경계를 침입하자 직접 출정해 싸웠는데 패배하고 청목산으로 후퇴해 겨우 패망을 면했다고 전해지며, 이 청목산이 바로 송악(옛 개성)이라는 게 『신동국여지승람』의 추정이다. 이후 어느 시점에 고구려로 편입되면서 부소갑扶蘇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555년에는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부소갑도 신라의 땅이 되었고, 694년 ‘송악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 것을 보아 그 이전 어느 순간부터 ‘송악’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다.

남북의 지도자들은 조선왕조의 천대, 전쟁, 일제의 침략 등도 꿋꿋이 버텨냈던 개성 송상의 끈기와 지혜를, 창의성과 연대 의식을 배워야 한다. 그리하여 남북한 사이에 다시 봄이 오고, 그 봄이 여름도 견뎌내 마침내 가을의 결실을 보게 될 때, 통일 수도의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개성은 다시 찬연히 빛나게 될 것이다. 수백 년 전 고려의 황도인 개경에서 연등회가 벌어지던 밤처럼.

사마천은 『사기』에서 군주를 제외한 역대 유명 인물들을 엮은 「열전」 중 1번째로 백이와 숙제를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은 고죽국이라는 작은 나라의 형제였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할 때 "아무리 주왕이 무도해도 신하 된 도리로 임금을 칠 수는 없습니다"라며 말렸다. 하지만 끝내 무왕이 은나라를 치자 주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긴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백이와 숙제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해주 경내의 가장 높은 산 이름이 수양산이고 앞바다에는 형제도라는 섬도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이 아닐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고죽국은 지금의 요서 지방, 그러니까 베이징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죽국과 고조선, 고구려와의 연관성도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고려 이후 오랫동안 한반도 사람들은 해주에 가서 여기가 고죽국이거니, 수양산을 바라보며 저기서 백이와 숙제가 절개를 지켜 죽었겠거니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수양산에는 두 사람을 기리는 청성묘淸聖墓가 있고, 묘 앞에는 "영원히 맑은 기풍이 남아 있네百世淸風"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임금이 총제 이숙번과 대언 박신을 불러 넌지시 말했다. "경들! 요즘 날이 참 좋소이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놀겠소?" 그리고 해주에 가서 놀며 사냥하자는 계획을 풀어놓으니 이숙번이 조용히 말했다. "해주에서 사냥이라! 매우 즐거울 겁니다. 다만 민폐가 꽤 있겠지요."
- 『태종실록』

율곡도 스무 살에 노씨盧氏와 혼인한 뒤로는 벼슬에서 물러나면 처가의 해주로 가서 연구하고 후학을 키웠다. 조선 대표 향약 중 하나인 『해주향약』도 그가 만든 것이고, 그의 호 중 하나인 석담石潭도 해주의 석담동에서 딴 것이다.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옛날의 평양

고구려 국내성이 부루내(너른 강)로 불렸다면 평양은 부루나(너른 벌판)로 불렸다.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아사달 혹은 왕검성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땅이 아사달인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먼저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가 나중에 아사달로 옮겼다고 한다. 두 도시는 서로 다른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에서는 아사달이 곧 평양이라고 보고 있다. 애당초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없다 보니 아사달이 평양인지, 평양이라 쳐도 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인지도 불확실하다. 또한 중국의 『사기』에 우거왕이 한나라와 싸우다가 멸망한 고조선의 수도가 왕검성이라고 적혀 있지만, 평양과 아사달, 왕검성, 세 도시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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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의 제주도 같은 독립 왕국의 오랜 꿈

수도권에서 강릉으로 가기 위해선 태백산맥을 넘어야 한다. 2015년 대관령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높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가기도 꽤 힘들었는데, 사람이나 동물의 발에 의존해야 했던 옛날에는 얼마나 더 어려웠을까. 18세기 초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대관령을 넘던 소년 이중환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나흘이 지나서야 겨우 숲길을 빠져나왔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독립 왕국이 상당히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성정이 강릉에서 형성된 셈이다. 집집마다 글공부하는 면학 분위기와, 그러면서도 놀고 잔치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강릉의 풍습은 논리적으로 철저하면서도 동시에 기氣와 실용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그의 독특한 철학 세계가 이뤄지는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푸른 바다가 일어났다가 구슬처럼 하얗게 빛나는 바다에 꺼져 들고
푸른 난새는 요란한 빛깔의 난새에 가려 버리네
부용꽃 삼 구, 이십칠 송이 붉게 떨어져 흩어져 버리니
이 한 밤 서리에 달빛 비쳐, 더욱 차갑기만 하여라

- 허초희(허난설헌), 「꿈에 광상산에 노닐다」

그러한 한가로움과 여유, 오래전 신선 화랑들과 몇백 년 전 시인 묵객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발걸음의 이면에는 안보 도시로서 강릉의 숙명이 숨어 있다. 진정으로 강릉이 육지의 제주도로서 가벼운 마음으로 솔향을 즐기며 나들이도 하고, 커피도 즐기는 도시가 되려면 남북 간에 풀리지 않은 매듭을 풀어내는 일이 먼저 이뤄져야만 할 것이다.

육로로는 1899년에 한국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으며 지금은 그 구간을 확장해 서울지하철 1호선이 달리고 있다.

1967년에 착공해 1968년에 개통한 경인고속도로도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통신에서도 1898년 서울 경운궁과 인천 사이에 한국 최초의 전화선이 가설되었다.

무의도에서 400미터쯤 떨어져 있으며 썰물 때는 무의도와 연결되는 작은 섬 실미도다. 1968 년 이곳에서 북파 특수부대를 양성하다가 계획이 취소되자 부대원들이 무기를 들고 서울까지 침입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군사정권 시기의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슬픈 역사였던 이 사건은 2003년 영화 「실미도」로 비로소 널리 알려졌다.

경순왕(이제는 고려 상주국 김부)은 그의 부인이자 왕건의 딸인 경순공주가 지어준 도라산 영수암에 매일처럼 올라가 머나먼 경주 땅을 바라보며 한숨 쉬고 눈물지었다. 그래서 산 이름도 ‘신라의 수도를 돌아본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같은 산에서 천 년을 사이에 두고 나라 잃은 왕은 남쪽을, 고향 잃은 시민들은 북쪽을 애타게 바라보는 셈이다.

동인 계열이 주류였던 당시 조정에서 두 사람은 입지가 불안했으나, 선조가 ‘나도 이이, 성혼의 당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믿음이 두터웠으며 두 사람, 특히 이이의 사상적 깊이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이후 성혼을 기리는 파산서원과 이이를 기리는 자운서원, 그리고 백인걸을 기리는 용주서원은 선비의 고향인 파주의 자랑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자운서원 일대만이 관광지처럼 번화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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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바다를 잃어버린 내륙 도시

김해金海는 말 그대로 풀어 쓰면 황금 바다이다. 전라남도 금빛 바다의 도시 여수처럼 경상남도에도 금빛으로 찬연한 바다의 도시가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의외로 김해는 내륙 도시다. 한 부분도 바다와 닿아 있지 않다. 왜 그럴까? 김해는 본래 번영하는 해안 도시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행정적 조치에 따라, 김해는 바다를 잃어버렸다.

서울(3·1 운동, 4·19 혁명, 6·10 항쟁), 광주(5·18 민주화 운동), 부산(부마민주항쟁) 등처럼 거대한 저항의 선봉이 된 적은 없었는데, 어느새 민주화의 성지 비슷한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46년 김해에서 태어나고, 2009년 김해에서 죽은 한 사람 때문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거치고, 3김을 거친 다음 노무현을 거치게 됨으로써 상당히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충격과 비탄을 안긴 그의 죽음 이후, 김해의 봉하마을은 서울 동작동 현충원, 광주 망월동 묘역처럼 정치인들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 참배하는 순례지가 되었다.

고래와 용왕의 아들의 도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소리치는 고래 잡으러!

1970년대의 답답한 청춘들의 마음을 울렸던 송창식의 곡 「고래사냥」은 배창호 감독에 의해 1984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고래를 잡으러 떠난 여주인공의 고향은 동해 끝의 우도인데, 동해에는 우도가 없다. 오류인지 의도적 설정인지 궁금해진다. 가사에도 있는, 고래를 잡으러 떠나는 동해 바다는 구체적으로 어디였을까. 작사가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울산이었을지 모른다. 울산은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나타나는 것처럼 신석기 시대부터 고래를 잡던 고장이었고, 근대 포경도 1899년에 국내 최초로 시작해서 1986년까지 이어진 고래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울산은 또한 처용의 도시이기도 하다.

신라의 황금기를 맛보다

고대 경주의 맨해튼은 구황동이라고 한다. 이곳과 인왕동 일부가 박혁거세가 서라벌을 세운 최초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궁과 기타 기간 시설이 들어서 있던 구황동을 중심으로 6부의 구역이 둘러 있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같은 시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우파 - 기독교 세력이 주름잡던 평양은 붉은 도시로, 조선의 모스크바는 한국 보수우파의 수도로 뒤바뀌도록 만들었다.

1961년 이후, 한국의 주류 엘리트가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에서 대구 경북 출신의 사람들로 교체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런 굴곡진 헤게모니의 역사는 오늘날 겉보기로는 마냥 평화롭기만 한 고분과 경상감영공원 터에 깃들어 있다.

일제가 국권의 대부분을 잠식했던 1907년에 서상돈, 김광제 등의 제창으로 ‘국채보상운동’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을 갚지 못해 국권 침탈의 빌미가 되고 있으니 민간에서 돈을 모아 국채를 대신 갚아주자는 운동이었다.

지역을 안정시키는 나라의 요새

안동이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까닭은 산지가 많고, 공업이 덜 발달하여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안동이 내세우는 구호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다. 그러나 안동이 처음부터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였던 것은 아니다.

고타야古陁耶, 고창古昌, 길주吉州, 순주順州, 복주福州, 영가永嘉, 화산花山. 모두 안동의 옛 이름 또는 별칭이다.

화엄종의 가르침은 ‘전체는 하나이며 하나는 전체이다’라는 원융圓融을 근본으로 한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봬,

고인을 못 봬도 가시던 길 앞에 있네.

가시던 길 앞에 있다면 아니 가고 어찌하랴.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고, 이황의 14대손이다. "내 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의 고향은 바로 그의 생가가 몇 대를 이어온 안동의 원천동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무런 꾸밈도, 잡음도 없는 태평함과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를 짓고 글씨를 쓰면 집안 노인들이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상으로 맛난 것을 쥐여주던 때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로 이원록이 성년이 될 즈음 가세도 기울었다. 뒤엎어진 세상에서 그는 신식 학문을 배우고, 시를 쓰면서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했다. ‘이육사’라는 그의 필명은 대구 조선은행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을 때 죄수번호 ‘264’에서 나온 것이다.

고성 이씨 참판공파의 시조인 이증이 15세기 중반에 안동에 내려왔다가 그 아들 대에 세운 것이 임청각이다. 안동에 있는 여러 고택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었으며(물론 그 전부가 당시 지은 그대로는 아니나), 임진왜란을 겪고도 불타지 않아 흔히 보는 조선 후기 양반가 건축양식과는 색다른 조선 초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성 이씨는 내내 이 집에 살면서 평화와 풍류 그리고 작은 세도를 누리며 자족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러다가 이증의 19대손인 석주 이상룡에 이르러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다.

문화는 그렇게 흘러간다. 바뀌지만 없어지지는 않는다. 옛사람이 아니더라도 가볼 만한 생각이 드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화와 더불어 정신 역시 사라지지 않는 한, 안동은 평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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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들 가운데 몇 명이나 제주도의 갈등과 고난의 역사 현장을 일정에 넣을까. 누가 삼별초가 최후의 항전을 벌인 항파두리성을 찾을 것인가. 몇 명이나 관덕정을 둘러보며 그 앞에서 벌어진 이재수 민군과 천주교도들의 치열한 혈투를 떠올릴 것인가. 몇 명이나 제주4·3평화공원과 제주4·3평화기념관을 찾아 이 땅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참극을 알아보고, 왜 이름에 ‘평화’가 붙어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할 것인가.

(나, 내가 일정에 넣고, 항파두리성에 오르고, 관덕정을 둘러보고, 4.3을 찾고, 평화를 생각했다.)₩&@

제주도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의 섬이 되는 그날까지, 이 섬은 편안히 잠들지 못할 것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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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녁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 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 노래를 찾는 사람들, 「잠들지 않는 남도」

이승만은 공과가 있는 인물이라 한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모든 공은 제로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보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통령이 그 국민을 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물론 보도연맹 학살 등도 있지만 그것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광주 학살도 있지만 당시 전두환은 명목적으로 대통령이 아니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평시에 민간인을 학살토록 지시한 경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4·3 사건뿐이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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