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의 쿠바 - 체 게바라와 함께 한 혁명의 현장
그레고리 토지안 지음, 홍민표 옮김, 오스왈도 살라스.로베르토 살라스 사진 / 황매(푸른바람)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피델 알레잔(한)드로 카스트로 루스,
Fidel Castro, Fidel Alejandro Castro Ruz
쿠바의 국부, 정치가, 변호사, 혁명가

출생: 1926. 8. 13. 🇨🇺
사망: 2016. 11. 25.
신장: 191cm
가족: 동생  라울 카스트로
학력: 아바나 대학교 법학사
1943~44. 쿠바 최고의 만능 운동선수 선정

1959.2~2008.2. 제16대 쿠바 총리
1976~2008.2.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어록

너희들이 지금 온갖 더러운 모함으로 나를 더럽혀도 그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1.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하리라.
2.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
3.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혁명은 패배자의 침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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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말 카스트로는 쿠바의 동쪽 끝에서 나와 섬을 가로질러 천천히 서쪽으로 진격했다. 카스트로는 1953년 몬카타에서그가 마주했던 압도적인 적과는 너무나 대비되게 총 한 방 쏘지않고도 정부군 진지들이 게릴라들에게 투항하는 것을 보았다.
반군은 10배로 늘었다. 체 게바라의 유명한 산타클라라 해방에이르러서는 그 숫자가 5만 명에 달했다. - P93

1959년 1월 1일 새벽 2시, 바티스타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달아나자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그의 군대는 라스 빌라스에서 아바나로 진격하여 캠프 콜롬비아에 위치한 바티스타의 사령부를장악했다. 체 게바라는 근처의 라 카바나 요새를 확보했다. 반군은 승리했다. - P93

카스트로는 1월 2일 산티아고 데쿠바에서 첫번째 승리의 연설을 했다. 그는 "혁명은 지금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사방에서들려오는 열광적인 갈채를 만끽하며 쿠바 전역에 걸친 6백 마일의 행진을 시작했다. - P93

카스트로는 즉시 마누엘 우루티아Manuel Urrutia를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하긴 했지만 5개월 후 그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누가 진짜 쿠바의 지도자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장‘은 바로 피델 카스트로였다. - P93

"애국이 아니면 죽음을Patria o Muerte." - P96

그들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그렇게 긴 것은 오랫동안 산속에있었기 때문이다. 산속 생활에서 면도는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었다. 긴 머리는 강렬한 햇빛과 벌레, 모기를 막아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긴 머리와 수염이저항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 P119

60년대 미국의 대학생들과 히피들은 쿠바인들로부터 그것을따왔다. - P69

모든 적들에 맞서서 피델 카스트로는 오랜 세월 동안 쿠바 ‘최대의 지도자‘로 남아 있다. 명석하고 카리스마를 가진 사나이,ㅈ웅변과 여론 조종의 달인으로서  카스트로는 조그만 섬나라를 언론과 역사의 최전선에서 머물게 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현대의가장 일관된 관심을 끄는 세계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 말은 그가가장 보편적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 P130

헤밍웨이와 함께, 사람들과 함께
1960년 바르로벤토
왼쪽의 사진은 1960년 피델 카스로와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찍은 사진이다.
이듬해 헤밍웨이는 미국에서 자살한다.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피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피델이 <누구를 위해 좋은 울리나>를 통해 게릴라전에 대해 배웠다고 한 말은 유명하다.
이 사진을 찍기 전 20년 동안 헤밍웨이는 간간히 쿠바에 살았는데그와 피델이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 피델은 대체로 물질적인 것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아주 단순하게 살았다.

게바라는 동시에 피델 카스트로가 마르크스-레닌주의식 정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결국 체게바라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카스트로의 정부가 점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되면서 쿠바 시민들은 체게바라가 미숙하고 관료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는 이에 격분했다. 그는 오직 광범위한 게릴라전을 통해서만 가능한 제국주의와의 직접적인 투쟁을 갈망했다. - P163

그 누구도, 카스트로 체제를 경멸하는 쿠바 망명자들조차도게바라처럼 살았던 사람은 없다. 그는 자신의 원칙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 P164

체게바라와 그의 딸
1960년 아바나, 체게바라와 4살 된 그의 첫딸 일디타. 딸은 체와무척 닮았다. 일디타는 1995년에 죽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나이와 같은 39살이었다. 일디타의 왼손을 잡고 있는 군인은 안토니오 누네즈지메네스로 카스트로의 측근이다. - P167

그리스도를 닮은 체
1963년 아바나, 체게바라를 찍은 강렬한 사진 가운데 하나다. 여기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말했듯이 거의 그리스도처럼 보인다. - P177

체 게바라를 위한추도 벽화
1967년 10월 17일.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체는 추격당했고, 죽었다.
당시 쿠바에 있던 사람들은그것을 몰랐다. 한 주가 지난 후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아바나에돌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사에가서 사실을 확인했다. 카스트로는 24시간 후 텔레비전에 나와서 모든 이에게 그사실을 밝혔다. - P182

케네디 행정부의 가장 커다란 재앙은 말할 필요도 없이 피그만 침공의 실패다. 이 침공 작전은 미국 정부의 훈련과 무기지원을 받은 약 1,500명의 쿠바 망명자를 주축으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취임한 뒤 3개월 후인 1961년 초, 피델 카스트로가 집권하고 있던 쿠바를 공격한 사건이다. 카스트로를 타도하려는 이 시도는 미사일 위기에 불을 당겼고 이것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을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 - P187

공산주의를 환영하다
1974년 1월 아바나, 흐루시초프의 자리를 이은 레오니드 브레즈네의 방문은 카스트로에게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를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소비에트의최고 지도자가 쿠바에 온 것은 처음이었고 라틴아메리카를 통틀어서도 그랬다. - P209

쿠바의 최대 아이러니는 천혜의 아름다움으로 축복받은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는 혼란과 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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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라. 나역시 쿠바의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완벽한 곳은 없다. 만약 내가 걸어온 길을 걷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쿠바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쿠바를 선택했다. 카스트로나 또 다른 쿠바인처럼 나도 쿠바인이다. 아무도 나를 미국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쿠바에도 있다. 나는 눈먼 박쥐가 아니다.  - P64

그러나 세계의 어느 도시의 거리를 걷더라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뉴욕? 5번가에서 쇼핑을 하는 여자는 뉴욕이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럼가에 사는 사람은 다른 의견을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옳다." - P64

"아버지는 머리와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가 좋아하던 렌즈는 180mm (망원렌즈)였다. 그는 포트레이트들을  찍었다. 그러나 그가 찍은 얼굴들 뒤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 P65

이 책에 실린 이미지들 뒤에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최고의 예는 오스왈도 살라스의 유명한 사진 중에서도 미국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을 찍은 사진이다. 그 사진은 잘 훈련된 스튜디오 사진가의 눈과 분주한 뉴스 기자의 눈이 멋지게 결합된 오스왈도 살라스의 특별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진만 보고 두 명의 세계적 인물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 P65

이때 카스트로는 새로운 선거는 시행되지 않을 것이며 독재자는 힘을 통해서만 축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젊은변호사는 쿠바의 위대한 혁명 지도자 호세 마르티의 철학에 기초한 봉기를 조직한다. 그는 호의적인 많은 동지들을 발견했다. - P71

카스트로는 재판에서 자신을 직접 변호하며 바티스타 정권을통렬하게 고발했다. 이때의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는 제목의 변론은 현대웅변의 고전으로 꼽힌다. - P72

1955년 7월 7일 그는 멕시코로 떠나면서 유명한 반정부 잡지인<보헤미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여행에서, 어떤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어깨 위에 폭군의 머리를 얹고 돌아온다." - P72

혁명의 열정으로 충만한 두 사람,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만나자마자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같은 반군 장교들과 함께 그들은 자신의 운명은 쿠바를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 P73

센트럴 파크를 거니는 피델
1955년 뉴욕,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스트로가뉴욕을 두 번(1949년과 1955년)이나 방문한 사실을 모르거나 잊어버렸다. 깨끗하게 면도하고정장을 입은 채 센트럴 파크를 거닐고 있는 피델의 사진을 찍은 사람은 나의 아버지다. 피델은 게릴라가 되기 전에 변호사였다. - P75

피델은 게릴라가 되기 전에 변호사였다. - P75

카스트로는 "얘야, 고맙다. 사진이 잘 나왔구나."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우리가 쓴 인화지 값은 10달러래요."라고말했다. 피델은 나중에 주겠다고 했고, 나는 지금 여기 돈이 있지 않냐고 대꾸했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화를 내면서 일장 연설을 했다.
나는 그때 10대였고 그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것이 내가 들은 그의 첫 번째 연설이었다. 그는 매우 분개하여 이렇게말했다. - P78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돈은 혁명을 위한 거다. 이 돈은 성스러운 거야. 우리는 이 돈에 손댈 수 없다! 가서 아버지께 혁명이 승리하고 난다음 쿠바로 돌아와서 영광스럽게 자기 돈을 수금하라고 전해라."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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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똘똘똘똘 소리는 가느다란 병목을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소주와 두꺼운 몸체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려는 소주의 속도 차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병목까지 채워가며 마시는 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내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브라보! 브라보, 병목현상!


과연?

베르누이의 정리
https://naver.me/xE1NgO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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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진실을 내놓기 전에
고트족처럼 적어도 두 번은 문제를 놓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로렌스 스턴은
이 점 때문에 고트족을 좋아했는데,
고트족은 먼저 술에 취한 상태로 토론하고
이후 술이 깬 상태에서 또 한 번 토론했다."
『다뉴브』,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내 진짜 조상을 찾았다.

나 : 제가 하나 생각한 게 있는데요. 근데 소재가 좀 마이너해서…. (언젠가부터 이 말이 내 입에도 붙어버렸다. 한숨까지 이어 붙을 필요는 없었는데.)
편집자 : 여자 축구보다 더 마이너해요?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아마도요・・・ .
편집자 : 음...?! 여자 축구보다 더 마이너하다고요? 아니, 뭔데요?
나 : ○○○○요.
편집자 : 아... 진짜로 더 마이너하네요….

나도 주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떠올랐다. 주(酒)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술이라면 내가 20년 동안 그 무엇보다도 가장 꾸준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해온 게 아닌가. 

반평생에 걸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도, 가장 많이 몸속으로쏟아부은 것도 술이었다. 나는 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술에 대해 쓰자. 술책을 쓰는 술책을 쓰자.

그래, 주류가 되기보다는 그냥 계속 주류업계의 호구로 사는 게 낫겠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

뽁뽁이를 터뜨릴 때마다 정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뽁뽁이 하나에 술과의 추억과 뽁뽁이 하나에 술을 향한 사랑과 뽁뽁이 하나에 숙취의 쓸쓸함과 뽁뽁이 하나에 그럼에도 다음 술에 대한 동경과 뽁뽁이 하나에 에세이와 뽁뽁이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우, 그래, 술책을 쓰자. 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

기억은 하나도 못 하는 주제에 먹은 것은 이렇게나 많다니, 뇌는 없고 위만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사실 나는…."

"…?"

"배추야."

"야, 야, 쟤 완전 취했네, 취했어. 미친년, 지가 배추래. 크크크크큭"

"지금 네가 나한테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배추일 리 없는 거라고. 이 말이 어렵냐?"

"어이없어. 지금까지 말하는 배추는 본 적도 없거든?"

"나 이제 더 추워지면 곧 김치 돼. 김치가 된다고. 너 수능 만점 맞을 때 난 이미 김치일걸?"

그래서 수능 D-80일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백일주도 먹었으니 이번에는 ‘80일간의 세계일주(酒)’를 먹자고 제안했다.

술에는 맛도 있고 향도 있지만 소리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술이 내는 소리까지도 사랑한다.

캐럴라인 냅이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에서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처럼.

"소리 한 번 더 안 듣고 가도 되겠어?" ‘한 병 더 시켜서 마시다 가자’는 완곡한 표현이었겠지만(친구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역시 똘똘똘똘 소리는 가느다란 병목을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소주와 두꺼운 몸체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려는 소주의 속도 차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병목까지 채워가며 마시는 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내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브라보! 브라보, 병목현상!

게다가 차가 막히거나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조직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등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을 초래하는 병목현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세싱에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소주 첫 잔을 받아들며 다시 한번 엄숙히 새길 수도 있다.

사전을 빌려보면 주사를 ‘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주사‘의례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하다. 나에게 있어 ‘주사‘란, 그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얼토당토않은‘ 영향을 끼는 걸 뜻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내가 정해놓은 주사의 경계 안에서만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다.

어쩌면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어서 경계를 정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뚜렷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중력의 영향권 안에서 허공을 날 때는 자유롭지만, 무중력 상태가 되면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한 채 단지 허공에 떠 있을 뿐인 것처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운전을 하지 말라고요!"

"네? 운전을 하지 말라고요? 그게 무슨… 오오, 왼쪽으로 왔다, 왔어!"

"네?? 이거… 2인용 게임…?"

"2인용? 아, 나 환장하겠네. 이봐요. 아가씨 지금 택시 타고 있다니까요. 내가 몇 번을 말해. 지금 택시라고요, 택시!"

꿈에 그리던 오로라를 여한 없이 본 이후여서 세상을 다 가진 자의 여유도 있었다.

(침착하고 이성적이어 봤자 술꾼이 술꾼이다).

아무튼, 술 | 김혼비

주류 코너에 즐비하게 놓인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배의 엔진이 만들어내는 동요에 따라 흔들리며 좌우앞뒤에 놓인 술병들과 살짝살짝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커다란 벽 세 면을 둘러싸고 있는 술병들 사이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은근하면서도 장대하고 맑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정종 대포나 소주병이 나올 것 같은 피맛골의 선술집에서 대뜸 앱솔루트가 튀어나온 걸 본 기분이랄까.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리베카 솔닛도 말했다.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야 한다고. 걷는 것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고.

소설의 영감을 야간 산책에서 얻곤 하던 찰스 디킨스는 친구에게 "걷는 동안 머릿속으로 쓰면서 웃음을 터뜨리다가, 흐느끼다가, 또 흐느꼈다네"라고 말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은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멋진 무기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고, 헵타포드는 지구인들에게 "offer weapon"이라고 했다.

이문재 시인이 「바닥」이라는 시에서 그랬지.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의 정수리와 나의 정수리가 맞부딪치는 우주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역시 와인은 무섭고, 나는 아직 와인을 감당할 깜냥이  안 된다…. 덧붙이자면, 와인이 무서울 때가 또 언제인 줄 아는가?
마시고 토할 때다. 무한 각혈하는 기분이 들어 너무 무섭다….

자, 이제 술 마시러 나가야겠다!

아무튼, 술 | 김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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