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진실을 내놓기 전에
고트족처럼 적어도 두 번은 문제를 놓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로렌스 스턴은
이 점 때문에 고트족을 좋아했는데,
고트족은 먼저 술에 취한 상태로 토론하고
이후 술이 깬 상태에서 또 한 번 토론했다."
『다뉴브』,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내 진짜 조상을 찾았다.

나 : 제가 하나 생각한 게 있는데요. 근데 소재가 좀 마이너해서…. (언젠가부터 이 말이 내 입에도 붙어버렸다. 한숨까지 이어 붙을 필요는 없었는데.)
편집자 : 여자 축구보다 더 마이너해요? (에이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아마도요・・・ .
편집자 : 음...?! 여자 축구보다 더 마이너하다고요? 아니, 뭔데요?
나 : ○○○○요.
편집자 : 아... 진짜로 더 마이너하네요….

나도 주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떠올랐다. 주(酒)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술이라면 내가 20년 동안 그 무엇보다도 가장 꾸준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해온 게 아닌가. 

반평생에 걸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도, 가장 많이 몸속으로쏟아부은 것도 술이었다. 나는 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술에 대해 쓰자. 술책을 쓰는 술책을 쓰자.

그래, 주류가 되기보다는 그냥 계속 주류업계의 호구로 사는 게 낫겠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

뽁뽁이를 터뜨릴 때마다 정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뽁뽁이 하나에 술과의 추억과 뽁뽁이 하나에 술을 향한 사랑과 뽁뽁이 하나에 숙취의 쓸쓸함과 뽁뽁이 하나에 그럼에도 다음 술에 대한 동경과 뽁뽁이 하나에 에세이와 뽁뽁이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우, 그래, 술책을 쓰자. 술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

기억은 하나도 못 하는 주제에 먹은 것은 이렇게나 많다니, 뇌는 없고 위만 있는 인간이 된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사실 나는…."

"…?"

"배추야."

"야, 야, 쟤 완전 취했네, 취했어. 미친년, 지가 배추래. 크크크크큭"

"지금 네가 나한테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네가 배추일 리 없는 거라고. 이 말이 어렵냐?"

"어이없어. 지금까지 말하는 배추는 본 적도 없거든?"

"나 이제 더 추워지면 곧 김치 돼. 김치가 된다고. 너 수능 만점 맞을 때 난 이미 김치일걸?"

그래서 수능 D-80일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백일주도 먹었으니 이번에는 ‘80일간의 세계일주(酒)’를 먹자고 제안했다.

술에는 맛도 있고 향도 있지만 소리도 있다. 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술이 내는 소리까지도 사랑한다.

캐럴라인 냅이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이라는 책에서 "와인 병에서 코르크가 뽑히는 소리, 술을 따를 때 찰랑거리는 소리, 유리잔 속에서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처럼.

"소리 한 번 더 안 듣고 가도 되겠어?" ‘한 병 더 시켜서 마시다 가자’는 완곡한 표현이었겠지만(친구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역시 똘똘똘똘 소리는 가느다란 병목을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소주와 두꺼운 몸체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려는 소주의 속도 차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계속 병목까지 채워가며 마시는 한, 소주 한 병을 마시는 내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브라보! 브라보, 병목현상!

게다가 차가 막히거나 컴퓨터가 느려지거나 조직의 원활한 흐름을 방해하는 등 대부분 부정적인 상황을 초래하는 병목현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세싱에 다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소주 첫 잔을 받아들며 다시 한번 엄숙히 새길 수도 있다.

사전을 빌려보면 주사를 ‘술 마신 뒤에 버릇으로 하는 못된 언행‘이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쓰는 ‘주사‘의례에 비해 지나치게 협소하다. 나에게 있어 ‘주사‘란, 그 행위로 인해 타인에게 ‘얼토당토않은‘ 영향을 끼는 걸 뜻한다.

나는 가능하다면 내가 정해놓은 주사의 경계 안에서만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다.

어쩌면 마음껏 흐트러지고 싶어서 경계를 정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경계가 뚜렷이 있어야만 그 안에서 비로소 마음 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중력의 영향권 안에서 허공을 날 때는 자유롭지만, 무중력 상태가 되면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한 채 단지 허공에 떠 있을 뿐인 것처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운전을 하지 말라고요!"

"네? 운전을 하지 말라고요? 그게 무슨… 오오, 왼쪽으로 왔다, 왔어!"

"네?? 이거… 2인용 게임…?"

"2인용? 아, 나 환장하겠네. 이봐요. 아가씨 지금 택시 타고 있다니까요. 내가 몇 번을 말해. 지금 택시라고요, 택시!"

꿈에 그리던 오로라를 여한 없이 본 이후여서 세상을 다 가진 자의 여유도 있었다.

(침착하고 이성적이어 봤자 술꾼이 술꾼이다).

아무튼, 술 | 김혼비

주류 코너에 즐비하게 놓인 온갖 종류의 술병들이 배의 엔진이 만들어내는 동요에 따라 흔들리며 좌우앞뒤에 놓인 술병들과 살짝살짝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였다.

커다란 벽 세 면을 둘러싸고 있는 술병들 사이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은근하면서도 장대하고 맑다 못해 신비롭기까지 했다.

정종 대포나 소주병이 나올 것 같은 피맛골의 선술집에서 대뜸 앱솔루트가 튀어나온 걸 본 기분이랄까.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리베카 솔닛도 말했다.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야 한다고. 걷는 것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라고.

소설의 영감을 야간 산책에서 얻곤 하던 찰스 디킨스는 친구에게 "걷는 동안 머릿속으로 쓰면서 웃음을 터뜨리다가, 흐느끼다가, 또 흐느꼈다네"라고 말했다.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은 문학평론가 정여울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멋진 무기가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고, 헵타포드는 지구인들에게 "offer weapon"이라고 했다.

이문재 시인이 「바닥」이라는 시에서 그랬지.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라고. 그러니까 이것은 지구의 정수리와 나의 정수리가 맞부딪치는 우주적 모멘트였던 것이다.

역시 와인은 무섭고, 나는 아직 와인을 감당할 깜냥이  안 된다…. 덧붙이자면, 와인이 무서울 때가 또 언제인 줄 아는가?
마시고 토할 때다. 무한 각혈하는 기분이 들어 너무 무섭다….

자, 이제 술 마시러 나가야겠다!

아무튼, 술 | 김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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