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라. 나역시 쿠바의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러나 완벽한 곳은 없다. 만약 내가 걸어온 길을 걷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쿠바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쿠바를 선택했다. 카스트로나 또 다른 쿠바인처럼 나도 쿠바인이다. 아무도 나를 미국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쿠바에도 있다. 나는 눈먼 박쥐가 아니다.  - P64

그러나 세계의 어느 도시의 거리를 걷더라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뉴욕? 5번가에서 쇼핑을 하는 여자는 뉴욕이 훌륭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슬럼가에 사는 사람은 다른 의견을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옳다." - P64

"아버지는 머리와 얼굴의 사나이였다. 그가 좋아하던 렌즈는 180mm (망원렌즈)였다. 그는 포트레이트들을  찍었다. 그러나 그가 찍은 얼굴들 뒤에는 이야기가 있었다." - P65

이 책에 실린 이미지들 뒤에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최고의 예는 오스왈도 살라스의 유명한 사진 중에서도 미국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와 피델 카스트로와의 만남을 찍은 사진이다. 그 사진은 잘 훈련된 스튜디오 사진가의 눈과 분주한 뉴스 기자의 눈이 멋지게 결합된 오스왈도 살라스의 특별한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진만 보고 두 명의 세계적 인물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 P65

이때 카스트로는 새로운 선거는 시행되지 않을 것이며 독재자는 힘을 통해서만 축출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젊은변호사는 쿠바의 위대한 혁명 지도자 호세 마르티의 철학에 기초한 봉기를 조직한다. 그는 호의적인 많은 동지들을 발견했다. - P71

카스트로는 재판에서 자신을 직접 변호하며 바티스타 정권을통렬하게 고발했다. 이때의 ‘역사가 나를 자유케 하리라‘는 제목의 변론은 현대웅변의 고전으로 꼽힌다. - P72

1955년 7월 7일 그는 멕시코로 떠나면서 유명한 반정부 잡지인<보헤미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여행에서, 어떤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어깨 위에 폭군의 머리를 얹고 돌아온다." - P72

혁명의 열정으로 충만한 두 사람,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만나자마자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같은 반군 장교들과 함께 그들은 자신의 운명은 쿠바를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 P73

센트럴 파크를 거니는 피델
1955년 뉴욕,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스트로가뉴욕을 두 번(1949년과 1955년)이나 방문한 사실을 모르거나 잊어버렸다. 깨끗하게 면도하고정장을 입은 채 센트럴 파크를 거닐고 있는 피델의 사진을 찍은 사람은 나의 아버지다. 피델은 게릴라가 되기 전에 변호사였다. - P75

피델은 게릴라가 되기 전에 변호사였다. - P75

카스트로는 "얘야, 고맙다. 사진이 잘 나왔구나."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그러시던데 우리가 쓴 인화지 값은 10달러래요."라고말했다. 피델은 나중에 주겠다고 했고, 나는 지금 여기 돈이 있지 않냐고 대꾸했다. 그러자 카스트로는 화를 내면서 일장 연설을 했다.
나는 그때 10대였고 그 이야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것이 내가 들은 그의 첫 번째 연설이었다. 그는 매우 분개하여 이렇게말했다. - P78

"네가 지금 보고 있는 돈은 혁명을 위한 거다. 이 돈은 성스러운 거야. 우리는 이 돈에 손댈 수 없다! 가서 아버지께 혁명이 승리하고 난다음 쿠바로 돌아와서 영광스럽게 자기 돈을 수금하라고 전해라."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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