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주위
명나라의 영락제1402-1424)가 만주의 남쪽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위(재위를 이른다. 위는 본디 군사상의 요충지에 설치한 일정 규모의 부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라 밖에설치하면서 부대가 주둔하는 부락의 명칭이 됐다. 주위는 1403 년 처음 설치되었으며, 장소는 길림(지원) 부근의 휘발천 상류라고 한다. 얼마 후 두만강 가의 회령에 주위으며, 이어 동쪽에증설됐다. 주위는 나중에 흔하우위가설치됐가위강) 부근으로 이전했는데 이때 좌·우위가 같이 이동했다. 주위는 세력을 계속 확대했으나, 1567년에 명나라와 조선의협공을 받은 이후 주춤했다. 1589년에 건주좌위 추장 누르하치가 건주 3위를 통일하고 만주 일대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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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추들이 언제나 이르기를 ‘대두인은 두렵다‘고 하는데, 이번에 조선 포수들을 와 달라고 요청한 일을 견부락 사람이라면 모르는 경우가없으니, 부락 사람으로 적에게 빌붙은 자가 상당히 많아 반드시 기밀이누설됐을 것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라고 하더라도, 저들이 말하는 게 간혹 이와 같다. 청나라사람들은 저 적들을 가리켜 노추라고 부른다고 한다. - P42

0 이번 5월에는 가뭄이 무척이나 심했다. 4일에는 온종일 비가 내렸으나 대지를 고루 적시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 후에 소나기가 자주 내렸지만 티끌을 적시는 데 불과할 따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날마다 불어 들판의 풀포기는 죄다 시들었고, 배는 무거운데 강물은 줄어드니 가야 할 물길이 걱정스럽다. - P49

이제부터 이곳에서 40일치 식량을 더 지급받는다. 그런데 만약 이 양식마저 떨어진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돌아갈 기약이 더욱 아득해지니 가슴속 심사는 더욱 절절하고 아득하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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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헤이룽장성 黑龍江省 무단장시牧丹江닝안현寧安縣에 해당한다. 17세기 중반 당시 영고탑에는 청나라 군대의 사령부가 있었는데, 현재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일대를 관할했다. 따라서 당시 흑룡강을 따라 횡행하던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위한 원정군은 일단 영고탑에 집결한 후 출정했다. 이는 1654년의 제1차 원정 때도 마찬가지였다. - P32

○ 고두례 叩頭禮
공경하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를 땅에 세 번 조아리는 인사법이다. 고두례는 본디 명·청의 황제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행하는 예법이었으나, 황제의 칙서 앞에서도 실행하곤 했다. 따라서 일개 성주가 조선군 장수에게 고두례를 강요한 것은 예법에 어긋난다. - P35

8기를 말한다. 팔기는 만주족이 군대를 기의빛깔에 따라 여덟로 나눈 군사조직이자 행정조직이다. 처음에는 만주족만으로 조직한 만주8기뿐이었으나, 태종(홍타이지, 재위 1626~1643) 때에 몽골족과한족에게도 확대해 몽골8기와 한인기 등 모두 24기를 두었다. - P36

송가라강宋加羅江
지금의 송화강(쑹화강)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송화강은 북으로 흘러 눈강과 합류하기까지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을 관통하며 흐르다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인 흑룡강으로 들어간다. 총길이는 1960킬로미터다. - P38

지나온 지역에는 10리나 5리를 사이에 두고 마을이 이어져 있었다. 두 강이 합류한 잔잔한 물결은 넓고 멀어 아득하고, 텅 비고 넓은 벌판은 끝이없어 두 눈은 하늘 끝까지 다다랐다. 고국을 떠난 회포와 어버이 생각에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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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제 위상이 높아진 요즘에는 UN평화유지군 자격으로 국군이 해외에 출병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역사에서 보면, 어떤 나라의 해외파병이 반드시 그 국가의 국제 위상이나 국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파병을 원치 않으면서도, 강대국의 압력에 못 이겨 끌려나가다시피 한 사례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 P4

조선의 독자적 해외원정으로 알려진 사례는 아마도 세종 때 단행한 대마도원정(1419)일 것이다. 이종무가 지휘한 이 원정이 조선의 자체 필요에 따른 출병임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왜구 소탕을 위해 명나라가 일본원정을 감행할지도 모르던 당시 정세 판단도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명나라가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일본을 직접 공격할 경우, 명나라 육군이 한반도를 통과할 것은 자명했다. 엄청난 군수물자 징발도 큰일이었다. 이럴 경우에 조선이 입을 피해가 어떨지는 200여년전 몽골의 일본원정 경험을 통해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차라리 조선군을 미리출병시켜 독자적으로 대마도를 침으로써, 명나라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할 명분을 미연에 없었던 것이다. - P5

이 책에서 역주한 자료 <북정록>은 바로 이런 심경으로 어쩔 수 없이 만주로 출병한 조선군 사령관 신류가 남긴 진중일기다. 따라서 이 역주를 읽을 때, 단지 전투상황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기록의 행간에 넘쳐나는저자의 미세한 심리 상태까지 엿보고 느낄 수 있다면 매우 훌륭한 자료 읽기가 될 것이다. 이런 ‘읽기 재미‘를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역주본은 대학생은 물론이고,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고등학생이라 해도 읽기에 충분할 것이다. - P6

정벌은 국가사이의 상하 질서와 선악의 구분을 강조한 유교적 가치가 강하게 투영된 용어로, 21세기 역사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선정벌‘에 대한 대안으로 ‘나선원정‘이라는 용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원정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나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조선군의 두 차례 원정 모두 흑룡강까지 진격한 점을 중시해, ‘흑룡강원정‘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다만 나선정벌이라는 명칭이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현실도 감안해, 여기서는 ‘흑룡강원정(나선정벌)‘으로 표기한다. - P8

1619년 조선은 명나라를 도와 후금과 싸우기 위해 강홍립姜弘立(1560~1627)이 이끄는 1만2000여 병력을 요동에 파견한 적있는데, 이때 조선군은 비록 명나라 사령관의 지휘를 받기는 했으나, 독립적 예하부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흑룡강원정(나선정벌 때 조선군은 처음부터 청군 속으로 분산됨으로써, 독립부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는 명-조선 관계보다, 청-조선 관계가 훨씬  더 수직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북정록》은 청-조선 관계의 상하 질서가 얼마나 엄혹하고 현실적이었는지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자료다. - P14

흑룡강黑龍江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총길이 4352킬로미터의 강으로, 몽골 북부의 오논강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오호츠크해로 들어간다. 러시아어로는 아무르강, 중국어로는 헤이룽강이라고 부른다. - P23

함경도 북병영은 본디 경성에 두었으나, 두만강이 얼어붙는 겨울철인 10월에서 3월 사이에는 종성으로옮겼다. 당시는 4월이지만,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종성을 이용한 듯하다. - P26

화승식 점화법을 이용해 화승총이라고 했다. 1589 년(선조 22) 황윤길 일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쓰시마 도주로부터 몇 자루 받아온 것이 시초다.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1655년(효종 7) 조선에온 하멜 일행이 조총 제작에 참여하면서 성능이 향상됐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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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세와 자연환경은 마야문명의 생성에 상당한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을 세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① 각지에 다양한 독자적 지방문화를 탄생시킴으로써 서로가 유무상통하며 보완하는 하나의  복합적 문명을 이루었다. 
② 화산지진·홍수·한발 등 가혹한 자연환경은  주민들의 대응 능력을 키워, 그 극복 과정에서  찬란한 고대문명을 창출하고 꽃피울 수 있었다.
③ 다양하고 가혹하며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은 그 불가사의에 대한 특유의 우주관과 세계관, 종교관을 탄생시켰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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