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제 위상이 높아진 요즘에는 UN평화유지군 자격으로 국군이 해외에 출병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 그런데 역사에서 보면, 어떤 나라의 해외파병이 반드시 그 국가의 국제 위상이나 국력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는 파병을 원치 않으면서도, 강대국의 압력에 못 이겨 끌려나가다시피 한 사례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 P4
조선의 독자적 해외원정으로 알려진 사례는 아마도 세종 때 단행한 대마도원정(1419)일 것이다. 이종무가 지휘한 이 원정이 조선의 자체 필요에 따른 출병임은 분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왜구 소탕을 위해 명나라가 일본원정을 감행할지도 모르던 당시 정세 판단도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명나라가 왜구를 근절시키기 위해 일본을 직접 공격할 경우, 명나라 육군이 한반도를 통과할 것은 자명했다. 엄청난 군수물자 징발도 큰일이었다. 이럴 경우에 조선이 입을 피해가 어떨지는 200여년전 몽골의 일본원정 경험을 통해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차라리 조선군을 미리출병시켜 독자적으로 대마도를 침으로써, 명나라 군대가 한반도에 진입할 명분을 미연에 없었던 것이다. - P5
이 책에서 역주한 자료 <북정록>은 바로 이런 심경으로 어쩔 수 없이 만주로 출병한 조선군 사령관 신류가 남긴 진중일기다. 따라서 이 역주를 읽을 때, 단지 전투상황에만 열중할 것이 아니라, 기록의 행간에 넘쳐나는저자의 미세한 심리 상태까지 엿보고 느낄 수 있다면 매우 훌륭한 자료 읽기가 될 것이다. 이런 ‘읽기 재미‘를 함께 나누기 위해, 이 역주본은 대학생은 물론이고,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고등학생이라 해도 읽기에 충분할 것이다. - P6
정벌은 국가사이의 상하 질서와 선악의 구분을 강조한 유교적 가치가 강하게 투영된 용어로, 21세기 역사학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선정벌‘에 대한 대안으로 ‘나선원정‘이라는 용어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원정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나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조선군의 두 차례 원정 모두 흑룡강까지 진격한 점을 중시해, ‘흑룡강원정‘으로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다만 나선정벌이라는 명칭이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는 현실도 감안해, 여기서는 ‘흑룡강원정(나선정벌)‘으로 표기한다. - P8
1619년 조선은 명나라를 도와 후금과 싸우기 위해 강홍립姜弘立(1560~1627)이 이끄는 1만2000여 병력을 요동에 파견한 적있는데, 이때 조선군은 비록 명나라 사령관의 지휘를 받기는 했으나, 독립적 예하부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흑룡강원정(나선정벌 때 조선군은 처음부터 청군 속으로 분산됨으로써, 독립부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상실했다. 이는 명-조선 관계보다, 청-조선 관계가 훨씬 더 수직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북정록》은 청-조선 관계의 상하 질서가 얼마나 엄혹하고 현실적이었는지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자료다. - P14
흑룡강黑龍江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이루는 총길이 4352킬로미터의 강으로, 몽골 북부의 오논강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오호츠크해로 들어간다. 러시아어로는 아무르강, 중국어로는 헤이룽강이라고 부른다. - P23
함경도 북병영은 본디 경성에 두었으나, 두만강이 얼어붙는 겨울철인 10월에서 3월 사이에는 종성으로옮겼다. 당시는 4월이지만,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종성을 이용한 듯하다. - P26
화승식 점화법을 이용해 화승총이라고 했다. 1589 년(선조 22) 황윤길 일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오는 길에쓰시마 도주로부터 몇 자루 받아온 것이 시초다. 임진왜란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1655년(효종 7) 조선에온 하멜 일행이 조총 제작에 참여하면서 성능이 향상됐다. - P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