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동무와 둘만 있어도 비좁은 비트 안에 넷이 있자니 눕지도 못하고 아이를 안은 채 앉아서 꾸벅꾸벅 졸던 그녀는 벼락같은 고함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옥남아! 뭐하고 있냐! 애기 울리지 말고 요 너머 골짝으로 가거라!"
분명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아이가 한 번이라도 울음을 터뜨렸다면 꼼짝 없이 이 세상 목숨이 아닐 판이었다. 차츰 총소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다른 동무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무래도 산사람들이 다니는 길 같아 그 길을 따라 걷던 그녀는 무심코 앞을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십 미터 앞이 온통 누랬다. 기백 명이 넘어 보이는 토벌대의 누런 군복 때문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능적으로 그녀는 이미 산비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면당으로 가기 위해 어둠을 더듬어 길을 나선 그들은 뜻밖에 사오십 명의 빨치산 부대와 마주쳤다. 이현상부대에서 보급사업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무심코 사람들을 둘러보던 그녀는 한 남자에게 문득 눈길을 멈췄다. 근 일 년 반 만에 만나는 남편 최윤호(최규복의 가명)였다.

고생했다는 말도, 뭐 어쩌라는 말도 없이 잠시 아이를 안고 있던 남편은 훌쩍 일어나 자기 부대 쪽으로 가버렸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깨어났을 때 남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대신 남편의 분신인 양 서투른 솜씨로 만들어진 새 짚신 한 켤레가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일에 지쳐 남편이 돌아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그녀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던 남편의 손길처럼 발에 꼭 맞는 짚신은 포근하고 따스했다.

아이와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한편으로는 일제시대보다 더 처참한 세상을 한탄하고 증오하며 그녀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단오 이전에는 아무 풀이나 먹어도 독이 없다던 간부들의 말이 생각나 냇가에 비죽비죽 고개를 내미는 고사리밥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참꽃(진달래)을 따먹기도 하고 닥치는 대로 나물을 뜯어먹으며 최대한 쌀을 아꼈지만, 이십 일이 지나자 가져온 식량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사나흘간은 나물만 한 솥씩 삶아 배를 채우거나 물로 끼니를 때웠다. 나물이 독했는지 계속 설사를 하는 바람에 탈진상태가 돼 움직일 수도 없었다. 처참한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굶은 지 십삼 일 만이었다. 밖에서 철썩 하는 쇳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적인가 하는 순간 잠시 정신을 잃었던 그녀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며 흔들어대는 통에 부스스 눈을 떴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눈도 침침해 흐릿하게 윤곽만 보이는 사람은 적이 아니라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연락원이었다.

"동지 여러분! 저 이옥자 동무의 참혹한 모습을 보십시오. 이옥자 동무는 아이까지 딸린 여성의 몸으로 혁명사업에 뛰어든 우리의 귀중한 재산일 뿐 아니라 해방 직후부터 혁명사업에 몸 바친 이현상부대 정치위원 최윤호 동무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이 귀중한 동지를 저 지경이 되도록 방치할 수가 있습니까? 비인간적이며 비인도적인 군책 동무와 지도층의 무책임한 처사를 규탄합니다!"

아이가 귀엽게 놀수록 그녀의 가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는 운명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아이도 남편도. 누가 먼저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도 그게 언제일 줄은 알지 못했다. 그 이별이 두어 달도 남지 않은 바로 내일모레의 일이라는 것도. 자기 혼자 살아남아 그 아이를 죽인 슬픔이 지워지지 않는 피멍으로, 평생의 짐으로 그녀와 함께 할 것이라는 사실도.

"이봐! 없어, 없어. 거긴 내가 다 뒤졌어."
그러자 토벌대원은 그들이 숨어 있는 다래덩굴을 휙 스쳐갔다. 귀찮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보고도 일부러 피해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여순사건 이전까지는 군대 내에도 좌익세력이 상당히 조직화되어 있었고, 지리산 토벌대 중에도 동조자들이 있어서 간혹 이렇게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식량과 총탄을 슬쩍 흘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해서 토벌대가 겹겹이 둘러싼 뱀사골 능선을 빠져나왔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다음날 피아골 군당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다래덩굴 아래서의 그 숨막히던 기억만, 그 다래덩굴 아래만 그녀의 머릿속을 빙빙 맴돌 뿐이었다. 아이가 죽었다는 걸 그녀는 실감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던 날 방구들을 파내던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태어난 날부터 내쫓겼던 아이, 죽는 날까지 울음 한번 시원하게 터뜨려보지 못하고 쫓겨만 다니던 아이, 네 앞에서 결코 부끄러운 어미는 되지 않겠다. 무엇이 우리에게 이토록 질긴 운명과 슬픈 이별을 강요하는가. 어미는 그것을 부숴버리고야 말겠다. 이 땅의 모든 어미가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야 말 테다.

50년 봄은 6.25 이후 빨치산이 완전히 궤멸될 때까지 근 7년여의 남한 유격투쟁 동안 가장 참혹한 시기였다.

며칠 후 뿔뿔이 흩어졌던 광양군당이 다시 합류했는데, 그 사이 사람은 반으로 줄어 있었다. 합류하지 못한 반은 족제비나 까마귀 밥으로 산에 널려 있을 것이었다.

해방의 그날까지 우리가 살아있다면 그때쯤엔 웃으며 오늘을 기억할 수 있겠지. 어쩌면 혁명사업이란 소태 같은 것이 아닌가. 쓰디쓰지만 먹고 나면 몸에 좋은 것. 쓰디쓴 날을 웃으며 기억할 수 있는 해방은 기어코, 기어코 오고야 말 테지. 그러나 살아서 그 서글픈 추억을 되씹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좋은 추억이 되겠다던 김선우도, 영원히 잊지 않겠다던 오금일도 54년 빨치산 최후의 무렵에 적과 대항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사람 좋은 미소만 띠고 있던 구례의 ‘각시순사’ 김병추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다. 소태처럼 쓰디쓴 혁명의 물결에 그들은 하나뿐인 생명까지 던져버린 것이다.

잠시 후 군책이 그녀를 불러 이현상부대에서 부른다며 소환장을 내놓았다.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남편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녀는 소환이 적당치가 않은 것 같았다. 아직 행군도 제대로 버텨내지 못할 정도이니 전투부대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