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경찰들은 동부와 서부의 연락선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연락선을 잡으면 동부와 서부를 각기 고립시킬 수 있어 토벌작전을 수행하기가 용이해지는데다 정보를 많이 갖게 돼 큰 건수를 올릴 수도 있고, 연락선은 유격부대가 아니니 생포하기도 용이했다. 연락원들은 날마다 연락을 다녀야 하니 일이 고되기도 하려니와 백아산 요소요소에 그들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결찰들이 잠복해 있어 사잣밥을 싸 가지고 다녀야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단한 사람이드만요이. 광주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해갖고 시방 총사에 와 있다만요. 두 사람이 탈출을 했다는디, 그 악명 높은 포로수용소에서 워트케 탈출을 했는가 몰라요. 유격대원도 아니고 당일꾼임서."
수많은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대는데 다행히 총이 목 근처로 스쳐 지나갔다. 옆 사람이 푹푹 쓰러지기에 자기도 죽은 척하고 시체더미 위로 쓰러졌는데 시체가 워낙 많으니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국방군이 사라졌다. 시체더미 속에서 하루 종일 쓰러진 그 자세로 꼼짝도 않고 있다가 밤이 되자 자기 위로 수북이 쌓인 시체를 걷어내고 그 길로 입산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멸해가는 당과 죽음을 선택했다. 그렇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는 어디에도 없다. 역사에도 남아있지 않고 더러는 자신의 호적에조차 남아있지 않다. 후손들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아예 살다 간 흔적조차 지워버린 것이다. 자신의 부모를, 형제를 그렇게 부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당연히 당의 명령에 따라야지요."
"아이, 아가…… 니가 안 죽고 살아 있었냐. 살아 있었어이……."
밥이라도 싸올 것인디, 니를 만날 줄 알았으먼 보리밥이라도 한 뎅이 싸올 것인디…….
김정식은 그 후에도 오래도록 그가 붙잡혀 그날 얘기를 불까봐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그날 옆에 같이 있던 친구가 김정식에게 혁운이는 절대 그럴 친구가 아니니 우리 입만 다물면 알 사람이 없다고 계속 달래 주어서 마음을 놓았던 김정식은 훗날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나온 그를 붙잡고 술을 사라며 난리였다. "나 아니었으면 자네가 시방 여그 서 있을 목숨이 아니네. 내가 그날 총만 댕겼어 보라고." "아따, 내 총은 어디 있었간디." "사실 자네가 총을 댕길까봐 얼마나 겁이 났는지 앙가. 나도 총을 쏠까 어쩔까 그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다 들대. 하여간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놈이여."
친구고 부모고 없던 그 험난한 시절에도 어디에나 아름다운 사연은 많았다.
8월 19일. 일주일 후면 김춘옥은 산을 떠난다. 1950년 9.28후퇴와 함께 입산했던 만 2년의 산생활이 끝나는 것이다. 이제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이다. 과연 그녀가 자신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까. 바깥사회의 고통은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가는 총알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스며들어 어느 날인가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안일함이나 긴장의 이완이다. 어쩌면 그것은 눈앞에 보이는 적보다 훨씬 어려운 적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피해갈 수 없는 길이었다. 숨막히는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갔다. 백운산의 여름은 점점 뜨겁게 타올랐다.
죽고 사는 것도 자신의 자존심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다. 죽는 것은 깨끗하고 단순하고 고결하지만, 그럼 그에게 맡겨졌던 임무는 어쩔 것인가.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서 임무를 완수하시오, 완수하시오, 완수…….
운명? 그렇다. 이제 그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가야 했다. 미처 준비도 끝나기 전에 갑작스레 다가와 버린 일이지만 어차피 그의 임무는 지하조직의 건설이었다. 그의 운명도, 전남도당의 운명도, 이 땅 사회주의운동의 운명도 그가 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지프는 어둠을 가르며 보성-화순 간 국도를 달려갔다.
도민증을 만들려면 사진 위에 철인을 찍고 경찰서 관인과 서장의 개인도장이 있어야 했다. 그까짓 것, 하던 홍고는 정말 쉽게 도민증을 만들어왔다. 서장실에 무시로 출입하던 홍고가 서장 옆에서 조는 척하고 있다가 서장이 홍고만 두고 나간 사이 몰래 찍어 나온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일수록 죽음은 집요하게 쫓아다닌다. 권상수뿐만 아니라 수많은 배신자들의 최후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왕규는 나를 심판할 자격이 없는 친일파이며 민족반역자요. 나는 적어도 우리 조선민족을 외세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김왕규는 일제시대에 일본정부의 관료로 출세한 친일파요. 그런 친일파가 해방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애국자 행세를 하며 설치고 있소. 나는 그런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싸웠던 사람이오. 김왕규는 자기 입으로 자기를 애국자라 하며 나를 비애국민으로 매도하지만 과연 누가 애국자고 누가 비애국민이오? 내가 취조를 받기 위해 검사 방에 갈 때마다 김왕규는 양담배를 수북이 쌓아놓고 피워댔소. 전쟁이 끝나고 우리 민족의 경제를 부흥, 발전시켜야 할 이 마당에 양담배를 피워대다니! 그가 과연 애국자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오. 누가 애국자였고 누가 이 민족을 위해 살았으며, 누가 사형을 언도받아야 할지는 역사가 반드시 증명할 것이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이 아니라 능지처참형을 선고한다 할지라도 나는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애국적 행위를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미제의 앞잡이들이 선고하는 무엇도 인정하지 않소!
"사내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 법이다! 대세를 따라가는 것은 소인배의 삶이지……."
역사는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들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꿈꾸었던 해방의 날은 멀어지고 당분간 반동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미제의 식민지정책은 더 노골화될 것이고, 권력을 잡기 위해 조국을 미제에 팔아먹은 반동권력의 횡포도 점점 더 심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영원한 후퇴란 없다. 언제일지는 모른다. 그들이 다 죽고 난 뒤, 어쩌면 한 세기 뒤일 수도 있다. 세게 눌린 용수철일수록 더 거세게 튀어 오르듯이 억압당하는 인민들은 언젠가 다시 자신들의 피로써 항거할 것이고, 미래의 새로운 세대는 한국현대사의 초기에 피로 씌어진 역사의 바탕 위에서 더욱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그 밑거름만 되어도 좋다. 자기가 반드시 살아서 그날을 봐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단지,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권상수 같은 비겁한 배신자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지 않고 일본으로 가는 밀항 루트를 개척할 수 있었을 테고, 그랬더라면 얼마 남지 않은 빨치산 동지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자책감만이 그를 괴롭힐 뿐이었다.
박영발도 54년 1월 뱀사골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권총으로 자결(최근 박영발이 자결한 게 아니라 함께 비트에 있던 주치의 박 모에 의해 사실되었다는 빨치산 출신 박남진의 증언이 있었다. 당시 박영발이 지리산 비트에서 운영한 ‘조국출판사’ 필경사로 일하던 박남진에 의하면 주치의 박 모가 총상을 입은 후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다 1954년 2월 21일 비트 보초를 서던 중 박영발과 무전사, 여성비서 등에게 30연발 카빈 소총을 난사했다고 한다)했으며, 오금일도 김선우가 자폭한 직후 통명산에서 부상당한 채 포로로 잡혔으나 연행 직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남의 최고지도부는 최고지도부답게 장렬한 최후를 맞아들인 것이다.
투쟁인민 중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유격대나 당기관으로 배치돼서 사상훈련을 받았지만 노인네들은 사상이랄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저 좌익보다 우익의 탄압이 더 심하고 자기들이 보고 겪어보건대 좌익들이 더 나으니까 그저 좌익을 따라온 사람들에 불과했다. 죄라곤 그것밖에 없는데도 투쟁인민의 대부분은 무기수였다.
"선생님,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저의 임무가 바로 조직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대부집 아씨처럼 안방에만 갇혀 산다면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 아닙니까?"
"선생님, 저는 지하조직 사업을 하기 위해 위장자수한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저의 임무가 바로 조직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사대부집 아씨처럼 안방에만 갇혀 산다면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대중과 같이 호흡하며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임무 아닙니까?"
나는 무엇인가? 살아남아서, 세상으로 나와서 무엇을 했는가? 스스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철저하지 못한 사상성 때문인가, 아니면 반동의 시대 때문인가?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아무튼 그는 전향을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김규호는 그대로 특사에 남았다. 그가 사랑했던 많은 동지들은 남녘의 산과 들에서 죽었다. 남한에서의 치열했던 사회주의 운동은 교도소 특사에 갇힌 채 막을 내렸다. 그의 앞날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과 치욕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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