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히고설킨 거대한 역사의 덩어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역사의 발전과 진보를 확신하면서도 웬일인지 정체 모를 허전함은 마음 깊숙이 똬리를 틀고 사라지지 않았다. 생성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아름답고 분명한 법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에는 슬픔도 있는 것일까. 한 인간, 그 개체는 죽되 인류는 발전한다는 위대한 진리 앞에서도 그는 가끔씩 섬뜩한 두려움과 슬픔을 느꼈다.
"신령님이 꿈에서 일러주더구만." 우스갯소리로 받았지만 그가 생각해도 참 신기했다. 그가 꿈 얘기를 들려주자 사람들이 신기한 듯 무릎을 쳤다. 아마도 이전부터 트를 옮겨야 되겠다고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데다가 수년간 빨치산 생활을 하면서 훈련된 동물적인 감각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의 꿈 덕분으로 어쩌면 곡성군당의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을 날을 오히려 성공적인 반격으로 끝낼 수 있었다.
"박종하 동무, 전사했소." "전사를 해요?" 되묻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김흥복이 눈을 껌벅였다. 박종하가 죽다니, 불사신일 것 같던 그가? "어디서 언제 그랬소?" "팔월 중순 가회전투에서 희생됐소. 소총 사격거리가 멀어 늘 하듯이 서서 지휘를 하다가 총탄에 머리를 맞았는데 즉사했소. 부대에 타격이 너무 커서 지금껏 비밀에 부치고 있소. 전투부대야 사기가 최고의 무기인데 박종하 동무 전사 소식을 대원들이 알아보시오. 박종하 동무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던 대원들인데……."
둘 다 구례 간전 출신으로 박종하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고 처음에는 박종하부대를 따라다니며 식사를 해주던 사람들이었다. 무장부대를 따라다니다 보니 급한 경우도 만나게 되어 총을 잡기 시작하고 그 능력이 남자보다 낫다 하여 박종하가 그들을 유격대원으로 발탁한 것이었다(이태의 《남부군》에 나오는 그 유명한 여걸 김희숙이 바로 이 양봉순이다).
"아따! 요걸 지금 트라고 만들어놨소?" 고함소리에 뒤돌아봤더니 양봉순이 들고 다니던 엠원으로 기껏 만들어놓은 트의 지붕을 확 잡아챘다. 트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붕알을 싹 짤라다가 개 밥통에나 던져뿌씨요이. 사내들이 이까짓 트 하나를 못 만들어 찔찔매고 있소 시방?"
방어가 만만치 않자 섬진강의 병력까지 백아산으로 몰려들었다. 그 틈을 타 남부군은 곧장 통명산을 거쳐 섬진강을 건너 구례 서산까지 밤사이에 밀어붙였다. 남부군이 이미 지리산으로 들어간 다음날에야 적의 병력이 남부군의 꼬리를 따라잡았지만 닭 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위원장 동무! 꼭 살아계시씨요이. 구빨치 때부텀 얼매나 고생했는디 꼭 살아서 좋은 세상 봐야지라." 눈물을 글썽이며 살아서 좋은 세상 보자던 양봉순은 그 뒤로 다시 볼 수 없었다. 그것이 서로의 마지막 모습인 줄도 모르고 그들은 오랜 동지를 아쉽게 떠나보냈다. 그렇게 살아있자고 다짐했던 양봉순이 먼저 세상을 뜨게 될 줄은 그도 양봉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후세의 평가가 어찌 됐든 전남도당의 역사상 가장 처참한 시기가 다가왔다. 얼마 전부터 정찰활동을 시작했던 수도사단의 대공세였다. 51년 11월 말부터 다음해 2월까지 계속된 수도사단의 공세가 끝나자, 지리산으로 2천여 명을 파송하고 난 뒤에도 천여 명이 넘었던 전남도당은 불과 3백 명으로 줄어 있었다. 여수, 순천, 담양 등의 몇 개 군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멸했다. 그 무렵 전남의 모든 산에서는 빨치산들의 해골이 발 닿는 곳마다 툭툭 채일 정도였다. 곡성군당에도 수도사단의 공세는 물론 피해가지 않았다.
아직 하늘이 밝아오지도 않았는데 떠나온 트 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리더니 불길이 치솟았다. 잡혔구나! 잡히면 트를 불라고 지시했으면서도 왠지 서운함이 밀려왔다.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처럼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깨끗하게 지킬 수 없는 것일까. 살아날 희망이 좁쌀만큼이라도 보였을 때 풀뿌리라도 잡고 싶은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일까?
신이 난 그들은 대피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적의 주둔지를 찾아다니며 실탄을 주워 모았다. 실탄만이 아니었다. 포탄에 수류탄, 입다 버린 의복, 군화, 양말 등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어느 으슥한 곳에는 기관총 실탄과 내의 한 벌, 담배 세 갑이 상자에 넣어진 채 버려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곱게 쓴 쪽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동지들! 용기를 내서 열심히 싸우십시오. 이곳에도 당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여앉아 쪽지를 읽던 사람들 모두 숙연해졌다.
"그래도 내가 그날 운이 짱짱해서 자네를 만났응께 살았제. 다른 사람 같으면 나를 살려 뒀것는가. 고맙네이." 그렇게 소박하고 순박한 이였다. 다를 것 없는 그들이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던 세상, 누가 그런 세상을 만든 것일까. 순박한 그 형사의 말대로 그가 그 형사를 살린 거라면 한호현은 바로 그를 살린 장본인이었다.
결론은 지금까지의 조직활동 방식으로는 식량문제를 해결할 방법도, 돌아서는 인민들의 마음을 돌이킬 방법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사업의 전환이 필요했다. 인민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당을 보존하고 인민과 함께 싸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10년 뒤일 수도 있고 어쩌면 50년 뒤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뿌린 싹이 해방의 그날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좋았고, 살아서 볼 수 없는 날을 위해 준비하는 것도 좋았다. 단지 이 결정적 시기를 해방으로 성공시키지 못한 쓰라림이 남는 것뿐이었다. 이제 밀알이 되는 것, 땅에 뿌려져 더 많은 밀로 태어날 그날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그것이 남은 그들의 자리였다.
이런저런 궁리 속에 산은 점점 검푸르게 자신을 불태우며 여름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이 산에서, 동지 곁에서 보내는 마지막 여름이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한치 앞의 역사를 알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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