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 터졌어, 터……."
"이거, 원,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나. 뭐가 터져, 터지긴?"
"사, 삼팔……선. 삼팔선이, 터졌다구!"
"뭐?"
"뭐?"
너나없이 다들 놀라서 뭐, 뭐만 연발하고 있었다.
"버버거리지 말고 자세히 얘기 좀 해보라구."

최석태가 순식간에 쏟아낸 말은 엄청난 것이었다. 인민군이 25일 삼팔선 전역에서 총공격을 시작해 어젯밤 서울시내까지 진입하여 서울 함락이 목전에 있고, 국군은 지금 전 군을 긴급소집하여 북으로 북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는 거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한시라도 빨리 전달하기 위해 식량이고 뭐고 팽개치고 계속 뛰었다는 것이다.

"언제는 무서워서 피했가니라. 경찰 놈들이 하도 닦달을 해쌍께 어짜요? 산사람들헌티 꼬치장만 줘도 죽이는 세상인디. 시방이야 머가 무사서 피하것소. 고생들이 많제라?"

이 날만을 위해 살았던 것처럼 사람들은 미친 듯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해방의 첫 밤을 보냈다. 희미한 어둠 속에 드러난 동지들의 흥겨운 모습을 보면서 핑 눈물이 돌았다. 이 밤의 감동을 즐기는 백여 명 중에 구 대원은 서른 명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전쟁 이후 한 달 사이에 새로 규합한 동지들이었다. 그 어려운 날들을 버티며 이날을 위해 싸워온 수천 명의 진짜 투사들은 곳곳의 산기슭에서 썩어가고 있거나 이미 한 줌의 흙으로 변했을 것이었다.

백운산에서 도당과 유격대가 박살나던 날, 그는 눈물도 없이 동지들의 시체를 그러모아 돌무덤을 만들면서 눈물보다 더 뼈아픈 맹세를 했었다. 살아남은 우리가 당신들의 못 다한 꿈을 이루겠노라고, 당신들의 원수를 갚겠노라고. 그리고 이제 해방은 왔다.

동지들이여 들리는가! 백주대낮에 대로를 걷는 우리의 힘찬 발소리가, 가슴 터지는 감동의 함성이 들리는가. 우리의 피로 찾은 이 해방을 영원히 인민의 것으로 하기 위해 먼저 간 당신들이 죽으면서도 꿈꾸던 세상, 그 무산계급의 평등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도 기꺼이 당신들의 뒤를 따르겠노라.

백아산 능선마다 봉우리마다 힘차게 버티고 선 동지들은 열심히 손을 흔들어댔다. 그제야 그는 미련 없이 되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다. 발전하는 역사와 더불어 지나간 슬픈 역사를 묻고 우리는 전진한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해방 광주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존경하는 부모 형제자매 여러분! 이렇게 만나게 된 감격, 뭐라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존경하는 부모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의 이 감격을 있게 해준 우리의 위대한 영도자 김일성 장군과 영용무쌍한 인민군, 그리고 우리와 함께 남조선 방방곡곡에서 적과 용감히 싸우다 무주고혼이 된 빨치산 동지들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시다!"

"…… 우리 동지들의 시체요. 놈들이 후퇴하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사람들과 광주형무소에 있던 정치범 등 칠백여 명의 동지들을 저 모양으로 죽여 놓았소."
악취 때문에 지산동 부근은 발도 디딜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어서 쪼개라고 말한 손님은 그 큰 수박을 몇 조각이나 맛있게 먹었다. 오후 3시경 점심을 마친 손님은 타고 왔던 전북 넘버의 자가용 트럭을 타고 배웅도 마다한 채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로서는 꿈결 같은 만남이었다(그러나 최근의 어떤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은 비밀리에 낙동강 전선 시찰을 다녀갔을 뿐 광주에는 들른 적이 없고 아마 장시우 상업상을 김일성으로 착각한 모양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김선우나 박영발이 장시우를 김일성으로 둔갑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누가 옳은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유혁운은 지금도 당시 만났던 사람이 수상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지금까지 광주의 일반 시민에게서 느낄 수 없던 활기가 넘쳐흐르는 분위기였다. 그렇구나. 그는 무릎을 쳤다. 광주 시민의 분위기가 달랐던 것은 그들이 무산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혁명으로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많은 자들의 표정이 밝을 리가 없었다. 농민들의 표정이 그렇게 밝았던 것도, 이 노동자들의 표정이 이렇게 싱싱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어쩌면 혁명가란 이렇게 어찌할 수 없는 이별이나 슬픔과 친숙해지면서 강철로 단련되어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번 전쟁 결정은 무엇을 근거로 내린 것인가. 미국의 방대한 물자, 대대적인 참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말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뭉게뭉게 피어났다. 어쩌면 이번 전쟁은 전쟁을 바랐던 미국의 덫이 아닐까. 그렇지 않기를, 제발 그렇지 않기를, 페달을 다시 밟으며 그는 간절하게 기원했다.

언제쯤 그리운 사람들을 다 만나볼 수 있을까. 언제쯤 좋은 세상이 올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올 겨울을 넘길 정도의 식량을 비축해두기야 했지만, 추위만으로도 두려운 겨울은 점점 깊어가고 적들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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