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은 은밀히 황친 대성진, 대아명을 설득하고, 보국대장군 최감천, 태복경 대현사와 신득원을 비롯한 무장들을 포섭했다. 이제 하늘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가행렬은 경계가 삼엄해서 백성들은 모두 숨을죽였다. 기르는 개가 어가행렬을 보고 짖었다가 참변을 당한 전례가 있기에 백성들은짐승 단속까지 해야 했다.

잠자리에 들었던 오윤문은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군사들에게 도륙되었다. 황제를 배행했던 태자 대한상은 도끼날에 목이달아났다.
침궁으로 밀입한 박자갑은 벌거벗은 황제에게 어의를 내밀었다.

"폐하, 천명을 받으시옵소서. 천하를 농단했으니 자진하여 죄를 씻으시옵소서!"
박자갑은 날선 칼 한자루를 황제 앞에놓았다. 대위해가 엉겹결에 칼을 받았다.
"좌우를 물려라!"
박자갑이 명하자 무기 든 군사들이 물러섰다. 황제가 스스로 자진하는 걸 볼 수 없게 하려는 배려였다.
대위해는 두 손으로 칼을 부여잡았지만끝내 목에 칼을 박지는 못했다. 대위해가칼을 던지는 순간 박자갑의 칼날이 대위해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혔다.

날이 밝자 황친과 대신들은 대세를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황자 대인선을옹립했다.   
황위에 오른 대인선은 진신들의 주품을받아들여 선제 대위해의 폭정을 들어 폐위하고 연호를 파했다. 또한 백성들의 원성을들어 시호와 묘호를 추증하지 않기로 했다.천심을 거역한 황제였기에 황위에 올랐던대위해의 치세를 파하기로 했다.

대인선은 좌우를 물리고 배정을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정은 한사코 거절했다.
배정은 도성을 떠나기 전, 매를 좋아하는대인선에게 참매 한 마리를 바쳤다. 아직새끼의 때깔을 벗지 않았으나 눈매가 유난히 날카로운 매였다. 예부터 고구려는 매를해동청이라 부르며 영물로 여겼다. 대인선은 배정이 참매를 바치는 뜻을 알 것 같았다. 참매와 같은 강력함과, 번뜩이는 눈매 같은 예지로 장차 정사를 올바르게 펼치라는 충정이었다.

금사미단 계안상신.’
금실은 끊어지지 않았고, 닭의 눈은 새롭기만 하다는 뜻이었다. 대인선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 글을 풀어보면 금사(음막,처녀막)가 찢어지지 않았고, 계안(음핵)은아직 해말간 색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낭자는 교접한 적이 없는 진녀임이 분명하다는 뜻이었다

예부터 음부에 털이 없는 백, 치구가 불룩한 고, 살결이 부드러운 연, 음문이 붉은 홍, 교접 때죄는 긴, 이렇게 다섯 가지를 갖춘 여인을존귀하게 여겼다. 특히 계안이 해맑고 붉어야 했다. 곡실이라고도 불리는 계안은 작을수록 정숙하다고 했는데, 흔히 수척한 여인이 풍만한 여인보다 큰 편이었다. 그래서예부터 수척한 여인이 색을 밝힌다는 말도있었다. 그런 까닭에 대인선의 배필은 풍만한 여인으로 정해졌다.

"폐하, 옛일을 상기해야 하옵니다. 고구려가 멸망할 때 당나라는 거란과 말갈을 꾀어 선봉에 서게 했사옵니다. 지금도 강성해진 거란이 말갈부를 꾀면 삽시에 준동할 수있사옵니다. 선제께서 그들을 박대하고 조세와 부역을 무겁게 했으며 변방으로 쫓았사옵니다. 그 서러움이 분노가 되었으니 지금 진무해야 하옵니다. 통촉하옵소서."

나라가 안돈하자 사라졌던 승려 담오가법화사로 돌아와 불사를 일으켰다. 무너진채 방치됐던 석탑을 다시 쌓기로 했는데,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였다. 오윤문이 대위해에게 바쳐올린 진신사리는 진품이 아니었다. 진신사리를 지키기 위해 모조품을 만들어 사탑 밑에 두었다고 했다.
이에 황궁에 모셨던 가짜 진신사리는 폐기했다.

당나라 멸망의 가장 큰 근원이 민심 이반이었고, 발해도 그런 조짐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대인선도 알고 있기에 가슴이 무거웠다.

"어쩌다가 사직이 피폐해지고 백성이 곤궁해졌는고?"
"곤궁한 백성들은 의명선사가 살해당한뒤부터 불도를 버리고 도교를 찾게 되었사옵니다. 이것은 조서를 내려 막을 수 없고군사로도 막을 수 없사옵니다."
"짐도 선제의 명을 받아 도교 경전인 도장을 익혔도다."
백성들이 먼저 난세를 알아본다고 했다.예부터 난세에는 점복이 횡행하고 주술로가산을 탕진하며, 사술 부리는 자들이 기승했다.

"도사 자양과 여도사 백화고가 정말 귀신을 부리는고?"
대인선은 세상이 어지러운 틈에 백성들을 현혹하는 무리를 척결하지 않고는 국기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사술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면 당장 척결하라."

"지금은 때가 아니옵니다. 자양과 백화고를 따르는 무리가 너무 많아 때를 기다려야 하옵니다. 두 도사를 따르는 자들은 사물에 현혹되고, 현세에 분노한 무리들이어서 극력 저항할 것이옵니다."

달시화는 발해 여인들과 다른 눈빛 때문에 환몽 같은 신비감을 자아냈다. 무엇인지알 수 없는 게 온몸 가득 숨겨져 있는 듯했다.
대인선을 맞아 방술을 펼칠 때는 물들인비단을 비비대서 빛깔을 빨아내듯 정염을불태웠다. 대인선은 황홀경에 취하며 비로소 선제들이 여색에 빠진 까닭을 알았다.

거란의 군국사를 총괄하던 야율아보기가 8개 부족의 가한에 올랐다는 소식은 또 한번 발해 조정을 놀라게 했다. 거란의 8부는 연합하여 3년마다 한 번씩 질립제(선거제도)로 8부를 통치하는 가한을 선출했다.
야율아보기의 야심은 거대한 중원 땅을경략하는 것이었으니, 발해로선 콧등에 호랑이가 앉은 꼴이었다. 대인선은 오소도의주청을 받아들여, 담대하고 해박한 문적원소감 배구를 북서쪽 거란 땅으로 밀입케했다.

"중원 땅은 넓고 백성 또한 많사옵니다.중원을 평정하려면 반드시 발해를 먼저 짓쳐들 수밖에 없사옵니다. 중원을 공격할 때 배후의 발해가 저들의 근심이옵니다."

"군사를 길러 강병을 만드는 게 첫째요,재정을 견실히 하여 민심을 붙잡는 게 둘째이고, 말갈의 이탈을 막는 게 세 번째 현책이옵니다. 신라와 화친을 도모하고, 일본과교역을 증대하며, 주전충의 양나라와 친선하고, 아보기의 거란과도 화친해야 하옵니다. 그러나 황친국척, 백관, 사족들의 호사를 막지 못하면 결코 민심이 돌아올 수없사옵니다. 폐하, 수라상에 일곱 찬을 넘지 않게 하시고, 황후를 비롯하여 황자와공주는 물론 태후까지도 비단과 보석 치장을 금하옵소서."

해를 넘겨 무진(908)년 정월에 당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이축이 기어이 주전충에게죽임을 당했다. 주전충과 쌍벽을 이루던 사타족 출신 이극용도 천수를 다해 이승을 하직했다.

애제 이축이 붕어했다는 소식을 접한 대인선은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 황친 대진해의 주품을 받아들여 검소령을 내렸다.
배구가 예견한 대로 이축이 살해됐고, 거란은 남진을 거듭하며 위세를 높였기에 용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백성들은 검소령을 거역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무섭게 치죄하겠다는 황제의 조서를 잊지 않았다.
 
대인선은 며칠이 지나도 대진례를 치죄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지엄한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는 걸 보면서 은근히 황제를 원망했다.

문적원 소감 배구가두 차례나 상소했으나 대인선은 대진례를문죄하지 않았다. 배구가 알현을 청했지만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은 황제가 한 번 내린 조서를 황제 스스로 거스르면 국기가 문란해진다고 간쟁했다.

"사람이 귀신과 교접하는 것으로, 한번그 환몽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고들었사옵니다."
"가엾게도 대공주는 도사가 준 단약을먹고 환몽을 헤매다 귀교하게 되었도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얼마 살지 못할 텐데……."
대인선은 말을 잇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배구는 그제야 대진례에게그런 아픈 사연이 있어 징치하지 못했음을알았다.

모든 정기를 귀신에게 빼앗기며 혼비의무아경에 빠지고, 한 방울 진액마저 모두빨려 백산의 황홀경에 빠지는 동안 처참할정도로 탈기되어 죽는다.
"대공주는 환몽에 시달리다 비단옷에 치장을 하고 춤추고 노래했도다. 짐이 어찌대공주를 징치하겠는가?"
대진례를 문죄할 수도, 그렇다고 공주가귀교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황제의 심정이느껴졌다.

"마마를 출궁하여 징치하고, 통력을 가진 도사에게 치병을 명하시면 국기도 바로잡고 마마를 구원할 수 있사옵니다. 궁 밖에서는 마음 놓고 무의를 펼치고 약도 쓸수 있사옵니다."
대인선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연을 품고 있었다. 대진례의 침방에서 여러 개의쇄양으로 만든 방이 나왔다.

방이란, 물가에 배를 대거나 물이 얕은곳을 밀어갈 때 쓰는 상앗대를 뜻하지만,실제는 남자의 옥근처럼 만든 물건을 말했다. 물속을 찌르는 상앗대를 남자의 옥근으로 비유해서 쓰는 말이었다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남진하여 진동에장성을 쌓으면서 요동의 남쪽으로 진출할태세를 갖추었다. 발해와 양나라 사이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아보기 곁에는 유능한 책사와 병법에능한 장수들이 매우 많사옵니다. 기습하여우리의 전력을 탐지할 테니 칙지를 내리시어 적이 기습하면 반드시 추격하여 섬멸하라 명하옵소서. 발해를 침노하면 반드시 보복당하는 전례를 남겨 적을 방비하옵소서."

야율아보기는 전술에만 능한 게 아니라정세 판단에도 뛰어났다. 사람에게 절실한소금을 조달하기 위해 염전을 수중에 넣어백성에게 소금을 싼 값에 공급하고, 중원에서 온 당인들을 농경과 길쌈에 진력하게 하여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했다.
그들에게 철을 다루는 법을 익혀 무기를만들고, 중원의 강역을 상세히 그리게 하여중원을 공격할 때 이용했다. 그들을 길잡이로 삼아 중원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리기도했다.

"지난날에 패군이 나라를 다스려 백성이곤궁하고 나라가 어지러웠지만, 지금은 현군을 만나 군사를 증강하고 변방의 경계를엄중히 하여 민심을 수습했나이다. 우리가발해를 정복하려면 적어도 10년을 기다려야 하나이다."

진나라에도 각저라고 불리는 씨름이 있었지만, 기상이 넘치는 고구려 씨름만 못했다. 주몽이 즉위하기 전 계루부의 족장일때 고추가들과 씨름을 겨루었듯, 고구려 씨름은 그 시절부터 기개가 넘치고 독특해서각별히 요교라고 불렸다. 이런 씨름이 전승되어 지금 발해 벌을 달구고 있었다. 이를두고 상하가 한마음이 되어 큰마당을 펼치기 때문에 쾌어심이라 했다.

야율할저는 조아린 채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저런 기개와 웅혼함 때문에사방에서 고구려를 두려워했고, 발해를 범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야율아보기도 강병을 길렀지만 저 기개를 당할 수는 없으리라.
야율할저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굳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내친 김에 황제에게 주청하여 수군의 위용을 살펴보겠다고 했다. 대인선은 기꺼이 수락하고 홀한해에 다녀오라고 명했다.

"이 길로 가면 하루를 벌 수 있습니다.발해 군사들은 늘 이 길로 다닙니다."
이강국은 굳이 먼 길을 돌아가지 말고지름길로 가자고 우겼다.
"나는 황명을 받은 몸으로 상세히 표문을 올리기 위해서 천하를 살펴야 한다. 말머리를 돌려라!"
야율할저가 명했다. 황제의 명을 받아 발해 군사의 동태를 감찰하는 감군관이 아닌가. 그의 명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말머리를 돌려라!"

"누구든지 할저를 주살하면 천금을 내리겠다. 사력을 다하라!"
미사건이 소리 질렀다. 두 식경도 채 되지 않아 감군관 일행을 추격한 군사들이 무섭게 공격했다. 감군관 일행도 맞서 싸웠으며, 야율할저도 칼을 빼들었다. 군사 수효가 열세인데도 야율할저는 두려워하지않았다. 그러나 호위 군사들이 쓰러지고 큰아들 야율무정의 목이 달아나자 도망치기시작했다.
이강국은 기다렸다는 듯 용맹한 수하 몇명을 앞세우고 추격했다. 야율할저를 태운말은 대인선이 하사한 명마 중의 명마가 아닌가. 맹렬한 속도로 나는 듯 내달렸다. 흑사령 계곡으로 들어섰다면 어김없이 주살했으련만, 야율할저는 무슨 낌새를 챘는지길을 에돌았고, 명마를 휘몰아 멀리 도주했다.

그러나 변고는 엉뚱하게 번졌다. 고경단이 밝힌 전모는 놀라웠다. 호위 장수 이강국을 문초하여 캐낸 내용은 태복경 겸 보국대장군 양금당이 배후에 있고, 양금당과 공모한 자는 재상 오소도와 대성악이라고했다. 대인선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양금당과 이강국을 즉시 참수하고, 두 재상은 차마 죽일 수 없어 유배했다.

대인선은 유배된 오소도와 대성악을 참하고, 배구를 비롯한 강직한 신하들을 모두삭탈하여 하옥했다. 조정 중신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바른 정사에 후덕했던 황제가 왜 저렇게 변했는지 이해할 수없었다.

거란군은 국경을 넘어 부여성으로 진격했다. 수자리를 서며 국경을 지키던군사들은 물밀 듯 짓쳐드는 거란군을 막지못하고 도주했다.

그해 9월 초사흘, 거란의 영걸 야율아보기는 서방 정복을 마치고 환궁했다. 공신들에게 훈공을 내리고 장졸들을 호궤한 야율아보기는 황태자 야율배, 둘째아들이자 대원수인 야율요골을 비롯하여 황후 술율, 동생 야율질라와 발해를 공격할 때 선봉으로삼을 장수 척은안단, 소아고지를 불러들였다.

정월 병자(19)일에 야율아보기는 근시 강말달을 비롯한 13명을홀한성으로 보내 모든 병장기를 수습하게 했다. 분개한 발해의 패망 군사들이 일어나 이들을 모두 살해했다.

적의 공격이 사나워지자, 양지각과 이변성이 즉시 주모자를 잡아 성 밖으로 던져 항복을 알리고 성문을 열었다.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하는데, 허공에서 해동청 두 마리가 바람과눈발을 가르며 야율아보기를 향해 내리꽂혔다.

그러나 참매 한 마리는 야율아보기의 뒷머리 쪽 오목한 풍지혈을 모지게 쪼고 창공으로 한껏 날아올

대인선은 바등거리다가 사지를 쪽 뻗은 해동청을 쓰다듬었다. 참매는 숨이 멎었다.
마치 발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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