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탄일을 맞아 어화원에는 푸짐한연석이 차려졌다. 권지국사를 비롯한 만조백관이 모였고 황친국척과 구신은 물론, 변방의 도독과 자사들도 참여했다. 겉보기에는 황제의 탄신을 하례하러 온 듯했지만 사실은 내일 아침 등극하는 대건진을 경하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때 진단대장군 장복사가 썩 앞으로나섰다. "폐하, 지금 칙계하시면 진신들이 엎드려 받들겠사옵니다." 대현석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천하를 농단한 권지국사를 어찌하여 치죄하지 않으시옵니까?"
"진신들은 모두 국사의 명을 따르라." "신이 설사 죽더라도 폐하의 뜻을 따를수 없사옵니다." 그리고는 표정이 일그러진 대건진을 향해 소리쳤다. "진단대장군 장복사는 칙지를 받들어 권지국사 대건진을 대역죄로 포박한다."
그때 대건진의심복이었던 금군대총관 임천중이 칼을 높이 들고 외쳤다. "황상을 받들지 않으면 누구든 처단하겠다." 임천중의 목소리가 살을 벨 듯 살벌했다.
"황상께 맹약의 삼배를 올리시오!" 경기군대총관 김진문이 목청을 갈았다.한두 사람씩 일어나 황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진신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에게예를 갖추었다. 그렇게 살벌한데도 황제를 등지고 당당히 걸어나가는 사람이 일곱명이나 되었다.
"참으로 순려하도다. 저것이 발해의 기상이거늘……." 무혈반정을 일으켜 황휘를 찬탈하려던대건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를 옹립하려 했던 측근들은 죄의 경중에 따라 정배되거나 삭탈당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참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치자라면 사무치는 자비심을 가져야 하오. 관용과 용서는 강자의덕목이오. 보살심이 없으면 군자가 아니니치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오." 양아림은 공신들에게 자비심을 잊지 말라고 했다.
"구신과 공신들을 함께 중용하는 게 어떠한고?" "폐하, 대국을 다스림에 있어 친근하다고 해서 가까이해도 아니 되고, 소원하다고멀리해도 아니 되옵니다. 이익이 된다고 추구하거나 손해가 된다고 해서 버려도 아니되옵니다. 사람도 너무 귀중히 여겨도, 너무 천하게 여겨도 아니 되옵니다. 무릇 벼슬에 있는 자들은 모두 불안하여 밤잠을 설치고 있으니, 지난날의 죄업을 모두 사면하옵소서. 오히려 창검 앞에서 굴하지 않고폐하를 논힐한 운칠현에게 관작을 높여주는 게 발해의 기상을 살리는 길이옵니다.그러면 천하가 모두 엎드려 폐하를 숭상할것이옵니다."
"경은 어찌하여 마음이 하해와 같은고?" "폐하, 신의 마음은 비온 뒤 생긴 소발자국에 괸 물처럼 흐리고 얕사옵니다.다만……." 장복사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마는 눈치였다. "듣고 싶도다." 대현석이 채근했다. "신은 은밀히 의명선사의 가르침을 받고있사옵니다." "의명선사는 입적하지 않았는고?" 대현석은 의명선사가 스스로 법화사 대웅전에 불을 질러 혜진옹주와 함께 산화했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산대사와 의명선사만을 노린 게아니라 모든 절을 폐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는 폐불을 단행하려 했기에, 덕산대사는스스로 대웅전에 불을 지르고 홀로 몸을 살라 소신공양을 했다. 그 덕분에 폐불이 단행되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성각사와 법화사가 중건되었다.
역신 대건진의 반정을 부추겼던 대소신료들의 지난 죄를 모두 사면하고 부화뇌동했던 황친과 구신들의 죄도 묻지 않기로 했다. 게다가 반정을제압한 공신들조차 훈공하거나 초천하지않아 더욱 의아해했다. 대현석의 성덕은 널리 퍼져나갔다. 황제를 흠경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대현석의 탄신일에어화원의 살벌한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큰소리로 황제를 나무랐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배정을 따라 함께 걸어나갔던 일곱 명을가리켜 사람들은 운칠현이라고 불렀다. 배정을 비롯한 다섯 남자들은 벼슬이 높지 않았으나, 그 기개가 널리 알려져 청5현이라불렀다. 또한 홍2현은 문관 이정심과 무관고서운을 가리키는데, 청5현 못지않은 기개와 시문을 뽐내는 인재였다.
불안한 정정의 당나라에 변화가 왔다. 임인(882)년에는 승승장구하던 제국의 황제황소가 쇠하기 시작했다. 황소의 측근 심복이었던 주온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에 투항했기 때문이다. 황소가 파견한 감군의 간섭과 압력을 견디지 못한 주온은 감군의 목을 베고 투항했는데, 당제 이현은 크게 환대하여 그에게 주전충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대현석은 크게 기뻐한 나머지 배정을 문적원 원감으로 삼고, 후하게 사급하여 그의공을 기렸다. 당나라는 쉽게 원기를 회복하지 못했다.3백 년 가까이 지탱해온 당조는 화북의 번진들을 회유하여 전세를 조금 역전시켰다.주온이 투항한 게 그 계기였다.
요충지 변주를 근거지로 삼은 주전충과,산서의 태원을 본거지로 삼은 이극용은 수많은 군사를 거느린 군벌로, 천하를 호령하면서 상호 견제했다. 주전충이 베푼 성대한위로연에서 술에 취한 이극용이 주전충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은 게 화근이었다.분노한 주전충은 성문을 닫아걸고 이극용의 군사들을 무차별 도륙했다. 이극용은 겨우 탈출했지만 거느렸던 군사는 거개가 화를 면치 못했다.
"당나라는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어두워졌지만 군벌들이 녹록지 않도다. 거느린 군사도 수십만이니 어찌 우리가 군사를 길러 대비하지 않겠는고? 당나라가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북방에서 거란이 흥성하고 있도다. 국고는 채울 수 있지만 사직이 무너지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도다."
"당나라는 해와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어두워졌지만 군벌들이 녹록지 않도다. 거느린 군사도 수십만이니 어찌 우리가 군사를 길러 대비하지 않겠는고? 당나라가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북방에서 거란이 흥성하고 있도다. 국고는 채울 수 있지만 사직이 무너지면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도다."
이 무렵, 발해 황제 대현석이 군사들을이끌고 행궁으로 나가 사냥과 군사 조련을하다 쓰러졌다. 중풍으로 쓰러진 대현석은반신불수가 되어 자리에 누웠다. 군사를 길러 강성대국을 만들어 내란으로 쇠락한 당나라를 치고, 북방의 거란도 평정하겠다던대현석은 혼자서 수라를 들거나 옥음을 내릴 수조차 없었다.
은밀히천하를 평정하여 강성대국을 꿈꾸던 무장들은 통곡했다. 발해 조정은 황자 대위해를 태자로 봉하라 주청했다. 대현석은 자신의 붕어를 예견했는지 서둘러 장자 대위해를 태자로 책봉했다.
여왕은 진골의 반란으로 어지러워진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진력하던 터였는데, 남편이자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수한 상대등위홍이 죽자 정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왕의 숙부이기도 한 위홍은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편찬할 만큼학문이 깊었다.
신라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이 들어 많은 고을에서 공물을 바치지 못했다.이렇게 나라가 어지러워진 틈에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켰고, 견훤과 양길이 각기 무리를 모아 반란의 싹을키웠다.
당나라에서는 이극용이 또 반란을 일으켜 중원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 국가들이 쇠락하고 있을 때 발해는 겉으로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곪아가고 있었다.
황제 대현석이 중풍으로 쓰러져 병석에누우면서 발해 조정은 사분오열되었다. 대현석이 치세하는 동안 탕평책으로 지그시눌러놓았던 적손과 방계손의 대립이 극에달했고, 황제의 근신과 태자를 받드는 신하들 간에 갈등이 첨예해졌다. 더구나 군세를업은 무신들과 오랫동안 권세를 누려온 문신들 사이의 암투는 목불인견이었다. 태풍을 예고한 것은 황후 양아림의 급서였다.
참기 어려운 신고의 세월을양아림이 곁에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황후의 죽음으로 대현석은 한쪽 날개가 꺾여버렸다. 황후의 급서에 대현석은 눈물 흘리며 힘들여 입술을 들먹였다. "홀로 어찌 살라고 먼저 가셨는가……."
"황상께서는 병석에 계시고, 당나라와신라는 내란에 휩싸여 있다. 이럴 때 준동하면 하늘이 노한다." 장복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장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분노하는 군심을 가라앉힐 묘책이 달리 없습니다." 김진문도 군심이 심상찮음을 걱정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당나라와북방의 거란이지, 적손이나 문신들이 아니다. 경거하고 망동하지 말라." 장복사가 군심의 동요를 알면서도 무장들을 다독거리는 이유는 한번 준동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이었다. 크게 나누어보면 적손과 문신들이 한패를 이루었고, 방계손과 무신들이 또 한패가되어 서로 다투었다.
계위하게 될 대위해는 황제가병석에 누워 신음하는데도 미소년을 불러들여 남색에 취했다. 대위해는 황후가 서거하자 마치 천하를 수중에 넣은 양 위세를부렸다. ‘붓다시여! 정의의 칼을 들어야 하나이까?’
태자는 성정이 용렬하고 포악하여 흉금이 좁으니, 대국을 다스릴 만한 그릇이 아님을 어찌 감출 수 있으리오." 장복사를 은밀히 부른 까닭을 짐작할 수있었다. "신에게는 현책이 없사옵니다." "천신만고 끝에 천재일우라고 하더이다.황상이 혼암하면 만백성이 신고를 겪게되니……."
이미 그 세가 만만치 않은데, 태자를 폐하고 작은아들 대봉예를 책봉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대위해가 남색에 빠져 호화방탕하며 포악하지만, 조정을 장악하고 있으니 태자를 폐하려면 한바탕 회오리가 불어야 했다. "황상께서는 천추를 다하신 듯하니 서두르시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이것은 나라를 흥하게 하고 백성을 살리는 길이니 성심을 다해주시오."
"새벽녘에 기이한 꿈을 꾸었습니다. 공께서 관복을 벗고 삭발한 채 산사의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흉몽이 분명한 까닭은 대장부인 공께서 비구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심복을 먼저 궁궐에 보내 정황을 알아본 뒤입궐하십시오. 아녀자의 어리석은 생각도때로는 명약이 될 수 있습니다. 공의 어깨에 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밤늦게 입궐하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아내의 간청을 귓전으로 흘린 장복사는서둘러 입궐했다.
장복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금관조복을 뚫은 창검이 수십 개나 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군 장복사는 즉시 들것에 실렸다. 그날 밤, 장복사를 따르는 임선중과 김진문을 비롯한 맹장들도 비슷한 시각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궁궐 안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렇게 참화가 들끓는데도침궁에 누워 있는 황제는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대위해는 태자를 폐하고 대봉예를 책봉하려는 황후의 계책을 미리 알았다. 만약아우 대봉예가 태자위에 오르면 그는 천하에 낯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황후와 장복사의 밀약을 알아낸 사람은태의 임선도였다. 황제 곁에서 치병하는 임선도를 황후는 철석같이 믿었는데, 임선도는 이미 대세의 흐름을 간파하고 대위해의심복을 자청했다.
남쪽 신라의 정세도 당나라 못지않았다.신해(891)년에는 양길의 부하 궁예가 신라의 여러 군현을 공격하여 천하를 어지럽혔고, 이듬해 임자(892)년에는 견훤이 무진주를 치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갑인(894)년, 발해 황제 침소인 침궁에곡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졌다. 황제 대현석은 참으로 질긴 목숨이었다. 병석에 누운지 7년 동안 초인처럼 버텼지만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승하했다.
장복사와 그 추종 세력을 처단하고문관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사 수효를 줄이고, 태복경 대현사에게 명해 군부를 손질했다.
대위해의 침궁에는 얼굴과 몸매가 고운미소년들이 항시 대기했다. 황제에게는 이미 정궁인 고승지가 낳은 장자 대인선과 대소순이 있고, 후궁이 낳은 대우모와, 오미랑이 은밀히 낳아 기른 대한상을 비롯하여여러 공주가 있었다.
누구 한 사람 대위해의 단수를 논힐하는 자가 없었다. 세간의 수군거림을 걱정해 은밀히 총애하라고 간했던 신하가 삭탈당했다. 그러면서 벼슬아치와 사족들은 운칠현 일곱 사람이 뭔가를 도모해주길 은근히 기대했다.
"백성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죽음 앞에 나약한 자요, 막강지권 앞에 용렬한 자요, 백성들 앞에 비겁한 자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고서운의 심정은 비통했다. 그들은 새벽까지 격론을 벌여 옳은 일에 목숨을 바치는게 도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상소문을 닦기로 했다. 그리고 배정의 집으로 달려가 가족에게 피신하라고 종용했다.
또 한번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소식을듣고 열네 살 난 배구가 말했다. "옛날 우왕은 바른말 하는 사람을 보면그 자리에서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비록제 나이가 어리고 천단하나 부모님 가르침대로 바른길을 가려는데 어찌 현자들께서말리겠습니까?"
배구가 붓을 내려놓자 운칠현은 일필휘지한 상소문을 읽어보았다. 담대한 필치요,거침이 없는 문장이요, 글자 사이에서 천둥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하늘이 있으면 별이 있고, 땅이 있으면초목이 있듯 나라가 있으니 이런 인재가 있구나. 설사 우리가 죽는다 해도 후세에 또의로운 자가 줄을 잇겠구나!"
운칠현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를 어람한대위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궁궐의 폐단을 바로잡으라고 간한 자는 북방흑수지경으로 유배되고, 교화를 밝게 해달라고 상소한 자는 물감옥에서 초죽음을 당했다.
"어린것은 돌려보내라!" 황제의 명을 받은 형졸들이 다가서자 배구가 소리질렀다. "남색과 천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폐하께 말로써 굳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왔으니 썩 물러서시오." 대위해가 어이가 없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것이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대위해도 문적원감 배정에게 영민한 자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린것은 돌려보내라!" 황제의 명을 받은 형졸들이 다가서자 배구가 소리질렀다. "남색과 천첩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폐하께 말로써 굳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왔으니 썩 물러서시오." 대위해가 어이가 없는지 소리 내어 웃었다. 겨우 열네 살밖에 안 된 어린것이 황제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대위해도 문적원감 배정에게 영민한 자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저 형벌이 가혹하면 가뭄과기근이 들고, 병란이 일며,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고금의 사필에도 실려 있사옵니다.폐하의 너그러운 성덕이 샘물 같다고 기록될 것이옵니다. 샘물은 눌러서 막을 수 없고 오로지 퍼올려야만 하옵니다
배구가 닦아 쓰고, 운칠현이 연명한 상소문을 백성들이 통쾌해하는 걸 대위해도 알고 있었다. 이럴 때 그들을 척살하면 민심이 등을 돌리고 일곱 사람을 군웅처럼 떠받들게 될 것이다.
고서운이 가볍게 던진 옥가락지는 술병의 홀쭉한 주둥이를 영락없이 깨뜨렸다. "이 비천한 몸으로 감히 황상을 받들어모실 수 없는 연유는 제 몸속에 흐르는 이예기가 술사들 말로는 척살기라 하여, 지아비를 섬기면 지아비가 살을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혼기가 넘도록 부모님께 불효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입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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