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송옥은 오수지에게 제니를 받아 치마속에 감추었다가 생즙을 내어 몰래 대화여에게 먹였다.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나대화의 광증이 나을 기미가 없는데다 내란으로 궁성 안팎이 어지러워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이용했다. 대화여의 사수증세는 많이나아지고 있었다.

"전하, 사직이 흔들렸으나 도처에서 충신들이 들고 일어나 천지가 호응하고 있사옵니다. 머지않아 전하께서 사직을 바로잡고 천하를다스릴 것이옵니다. 지금 고통을견디지 못하면 만백성은 통곡하옵니다."나송옥이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애원했다.

대화여는 배고픈 아이가 어미 품을 더듬듯 나송옥의 저고리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몽실한 젖가슴을 쥐고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나송옥은 고름을 풀어 대화여의 입에젖꼭지를 물려주었다. 대화여는 허기 들린어린애처럼 허겁지겁 빨았다. 그때 밖에서인기척이들렸다. 나송옥은 재빠르게 저고리를 여몄다.

그러나 무명선사와 신사랑이 반대했다."중경 백성도 우리 백성이요, 도성 백성도 우리 백성이옵니다. 싸워 이기려면 백성을 죽여야하지만, 싸우지 않고 이기면 백성을 아낄 수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첩을내려 대상의를 설득하옵소서."

"전하, 예부터 진정한 승자는 화적위우라 하여, 적을 감동시켜 동무로 만든다고했사옵니다. 대상의도 천심이 변하는걸 알것이옵니다."

7월초나흘, 대숭린의 군사가 동경성 백리 지경까지 육박하여 행영을 세우고 군진을 펼쳤다. 상경성을 지키던 고기경도 동경성북쪽에 진을 치고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원한에 쌓인 장수들과 유배지에서 필사의 탈출을 한 신하들은, 도성을 공격하여역적대원의를 주살하고 사직을 되찾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장군은 들으시오. 우리가 한을 품고공격하면, 도성에 있는 10만 백성이 크게다칩니다. 조금 더 기다리면서 현책을 찾는게 좋겠소.
그러나 북방의 흑수군이 우리지경을 범했으니 백성을 지키기 위해 그들을 정벌하는 것이 무릇 장수의 도리가 아니겠소."대숭린은분분한 의견을 다스리고 상경용천부도독 고기경에게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진병하라 명했다.

선덕조는 이내 뜻을 알아듣고 스승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의붓아비를 살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지만, 의붓아비가 깨어나서 죄없는 백성들을 죽일 게 뻔하면 어찌 살리겠나이까. 차라리 죄 없는 자식을 살리겠습니다."난석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손에 천하의운명이 걸렸다. 때가 되면 너도 목숨을 바쳐 대륜을 지킨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소리는 바람이 들어도 아니 된다. 알겠느냐?"
"하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소첩도 반신반의했사옵니다. 그런데 좌우를 둘러보니 사태가 심상찮음을 알았사옵니다. 황궁과 조정을 살펴보면 모두 고잉의심복들이 둘러싸고 있사옵니다. 시위든금군이든 칼을 쥔 장수들은 거개가 고씨들이옵니다. 내시감 장국선이 병들어 눕고 고잉의일가 고맹극이 폐하를 보필하는 것도유심히 살펴보시옵소서."

그러나 고잉을 잡으러 갔던 대수간은 머리 없는 귀신이 되어, 고잉이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도성을 탈출했다는 급보와 함께돌아왔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대원의는 충격에 휩싸였다.그때 황궁을 포위한 반란군의 함성이 밤하늘에 울려 퍼지면서 무수한횃불이 타올라 대낮처럼 밝아졌다. 시위장수 대한무가피를 흘리며 침궁 앞에 쓰러졌다. 대원의는칼을 뽑아 들고 뒷문으로 도망쳤다.
그러나기다렸다는 듯 앞쪽에서 일시에 횃불이 올랐다. 불빛 속에서 여태껏 미친 줄 알았던대화여가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큼나섰다. 그는 어느새 색깔 고운 용포를 입고있었다.

대원의는 두 눈이 금세 충혈되어 좌우를훑어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혼자였다.대원의를 하늘처럼 섬기던 신하들은 모두도망가고달랑 혼자서 칼을 치켜들고 있었다. 활을 든 군사들이 그를 에워쌌고, 창검을 든 군사들도 겹겹이 대열을 지어 대원의를 노려보았다.
"역적 대원의는 칼을 내려놓고 꿇어 엎드려라!"

대사루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대원의가 그 경황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하늘의 자손이니 오직 하늘에게만 무릎을꿇어야 하옵니다."대원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천손은 함부로 승하할 수 없사옵니다.더구나 역도들 손에 용체를 손상해서는 아니되옵니다. 첩에게 천명을 맡기소서. 폐하께서는 거룩하고 당당히 극락에 오르셔야 하옵니다."대원의가 칼을 내렸다. 근엄한 지존의낯빛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얼굴도 아니었다.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너에게 짐의 천명을 맡기노라."대사루가대원의 앞에 절을 올렸다."후생에서는 천추만세까지 섬기겠사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옵소서."

대사루는 칼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허공을 갈랐다. 황제 대원의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대사루는 온몸에 튀긴 피를 바라보더니 보검을던지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제가슴을깊게 찔렀다.

대화여는 세 황자 대숭린, 대청윤, 대성진이 옹립하여 용상에 올랐다. 때는 계유(793) 년 칠월 열사흘이었다. 연호를 중흥으로 하니이는 선제 광성문황제 때 연호인대흥을 이어받겠다는 뜻이었다.

"폐하, 역적 대원의가 사직을 흔들고 정사를 망쳐 조정의 체통이 무너졌사옵니다.반복무상한 흑수가 지경을 범해 외환을 수습하지못했사옵니다. 조정의 체통을 바로잡고 국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상벌이분명해야 하옵니다. 그래야만 충신은 번성하고 역신은준동하지 못하옵니다. 삼족을멸하여 후세에 규범을 삼으시옵소서."공신 박사성이 국기를 바로잡기 위해 대원의에게 충성했던역신들을 모두 징치하자고 주품했다.

"자고로 해불양수라 하여, 바다는 물을 뿌리치지 않는다 했사옵니다. 간난신고를 겪으셨으나 천위에 오르셨으니 바다처럼 모두 끌어안으셔야 하옵니다. 지금은 우리 지경을 범한 흑수를 정벌하는게 급하고 죄 지은 자를 널리 사면하여 폐하의 어짊이 천하를 적셔야 하옵니다. 통촉하옵소서."
신사랑은 박사성의 의견과는 달리 널리 해량할 것을 간했다.

"폐하, 감히 아뢰옵니다. 대원의 같은 역적이 준동한 것은 대흥지치를 이루셨던 선제께옵서 말년에 이르러 정사를 그르치고,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중용했으며, 황음무치하여 천심을 거슬렸던 후과였사옵니다. 역적과 간신에게만 죄를 묻는다면 과연 하늘의 견책이라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폐하께서는 하늘처럼 높은 용좌에 계시어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감히 바른 말을 아뢰기 어렵사옵니다. 대신으로부터 초야의 백성에게까지 구언하옵소서."
신사랑은 갓 제위에 오른 황제 대화여에게 겸손하게 구언을 청하라고 직간했다

"그러나 대원의를 따랐던 심복과 간신들은 부화방탕했사오니 백성의 고혈을 착취한 죄까지 사해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온당치 않게 챙긴 재물을 적몰하여 관고를 채우시옵소서."
"경이 짐의 마음을 편안케 하도다. 선제들께서 신씨 가문을 스승으로 모신 까닭을비로소 알았도다."

"자고로 둔천배정이라 하여 자연의 도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으로 태어나면 천명을 따라야 하옵니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것은 마침 태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고, 필연으로 세상을 뜨는 것은 하직할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옵니다. 때를 조용히 받아들여 차례를 따르는 것은 군자의 도리이옵니다. 성불하신 석가모니도 열반에 드시지않았사옵니까?"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은 정녕 아니었다.병이 깊어 결코 오래 살 수 없음을 알려주니 어찌 침통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내린생사의 끄나풀에 매달리지 말라는 충언이었다.

정사가 밝아진 탓인지, 상경용천부도독고기경과 대장군 사마달, 진태평이 거느린군사들이 연합하여 회원부를 회복하고 흑수를 토평했다는 기쁜 소식이 도성으로 날아들었다. 대원의에게 굴종했던 회원부, 동평부, 철리부의 도독을 비롯한 장졸들이 새황제에게 충성을 맹약하고, 죄를 면하기 위해 용감하게 흑수 말갈을 공격한 덕이었다.
흑수 토벌군은 흑수 대수령 낙진몽의 동생 낙개몽과 수령 골타를 포함하여 포로 천명을 도성으로 압송하는 전과를 올렸다. 올가와 낙개몽은 매년 조공을 바치고, 아들을질자로 보내기로 맹약했다.

흔들리는 수레에 누워 먼 길을 이동하는것은 간난신고였다. 황제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는 태사 신사랑과 태의 난숙공의 지극정성이 아니었으면, 어가행렬은 벌써 여러 번 멈추었을 것이다. 대소신료와 황실은먼저 상경에 입궁하여 황제를 기다렸기에시위하는 장졸들과 내시, 궁녀, 근신들만어가를 따랐다.

모질고도 질긴 장마가 걷히고 따가운 햇살이 산하를 휘감아 언제 그랬냐 싶게 무덥던 날, 황제 대화여는 숨을 거두었다. 갑술(794)년 7월 초여드레 새벽녘이니 재위 일년도 채우지 못했다. 대화여는 만조백관이 간곡히 간언하고 진신소를 올려 태자 책봉을 간했지만 끝내 책봉하지 않더니, 몸소닦아 쓴 신한 한 통을 남기고 붕어했다. 유조이자 계위를 선포한 신한에서 대화여는뜻밖에 후사를 숙부이자 선제 대흠무의 작은아들 대숭린에게 맡겼다.

발해 제6대 황제로 등극한 대숭린은, 연호를 정력으로 하고 선제 대화여의 시호를성황제로, 묘호를 인종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한번 모질게 흔들린 사직은 쉽게 안돈되지 못했다. 당연히 황위를 물려받을 줄 알았던 대화여의 장자 대선해는 칭병한 채 즉위식에도 나오지 않았다.

이 깊지 않았으면 장자에게 계위했겠지만, 등극 초기를 빼곤 줄곧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바람에 대숭린이 섭정을 했다.
황제 대숭린은 나라의 중추인 대내상 고건을 파직하여 태위를 제수하고, 선제가 스승으로 섬겼던 태사 신사랑이 황제 앞에서거침없이 논힐한다 하여 직을 파했다. 국사무명선사는 지나치게 정사에 개입한다 하여 아예 국사의 관작을 없앴다. 무명선사를비롯한 신사랑 형제와 난씨 일가, 고원을비롯한 옛 고구려 왕족들이 아예 도성을 떠나자 민심은 또 한번 출렁거렸다.

황제의 칙지가 지엄해서 관작을 내리면감히 거역할 자가 없으리라 여겼으나, 강직한 선비들은 관작을 지푸라기처럼 여기고사직상소를 올린 뒤 하나둘 도성을 빠져나갔다.

"폐하, 신이 듣건대 산장호수의 노들섬에 천하 현승 운문선사가 있어 신통력이 대단하다 하옵니다. 이번 사냥에는 뱃놀이를겸하여 노들섬으로 행차하옵소서."

운문선사는 대숭린이 반역괴수로낙인 찍혀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끝내 천하를 다스릴 거라고 귀띔했다. 그때만 해도믿기지 않는 얘기였다. 손자인 대화여를 태자로 책봉했을 뿐만 아니라 한왕 대원의가섭정하다시피 할 때였다.

대숭린이 국사였던 무명을 배척한 것은그가 육통했기 때문이었다. 육통이란, 상대의 속마음을 한눈에 읽어내는 타심통, 사람의 전생을 알고 현생을 맞추는 숙명통, 앉은 자리에서 9만리 밖을 훤히 볼 수 있는천안통, 천계 소리를 알아듣는 천이통, 천리 길을 한나절이면 걸어간다는 축지술인신족통, 사람의 몸 밖으로 무엇이든 새어나가지 않는 경지를 이루어 땀조차 흘리지 않는다는 누진통을 말했다.

대숭린이 대선해에게 황위를 빼앗기지않으려고 섭정을 하며 천심이 모아지기를기다릴 때, 무명은 모질게 그를 꾸짖었다.황위에 오른 것이 겉으로는 순리였으나 속으로는 순리가 아니라는 걸 지금은 세상이다 알고 있었다. 자손이 있는 대화여가 숙부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 때문에 아직도 민심이 흉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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