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녹산으로부터 시작된 당나라 내란은장장 9년을 끌다가 계묘(763)년 3월에 막을내렸다. 아버지를 죽이고 네 번째로 연나라황제가 되었던 사조의가 평주의 석성현의산속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연전연패에 배반하거나 항복하는 신하들 때문에도망갈 데도 없었다.
하북이 평정되자 당 조정은 논공행상을행했다. 사촌아우 이회옥 덕분에 평로절도사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던 후희일은, 평로치청절도사에 검교공부상서를 제수받고식읍을 받았다. 그리고 개국공신 24명의초상화가 걸린 능연각에 초상화가 걸리는영광을 누렸다. 사조의가 자살하기 직전에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항복한 사조의의 신하들도 과분하리만큼 사급을 받았다.
"후희일이 발해와 밀통한단 말인고?" 황제 이예가 크게 놀라며 물었다. "후희일의 충정은 처음부터 변치 아니했사옵니다." "그런데 어찌 발해와 밀통하는고?" "후희일의 심복 이회옥이 발해와 내통하고 교역을 주선한다고 들었사옵니다."
한편, 산동 지역의 통치자로 군림한 후희일은 군심과 민심이 이회옥에게 쏠리는 것에 신경이 곤두섰다. 전전긍긍하던 참에 대령군왕 복고회은으로부터 한 장의 밀서가날아들었다. 발해와 밀통하고 있는 이회옥의 죄명을 찾아 참살하라는 내용이었다. 후희일은 때를 기다리며 이회옥의 거동을 면밀히 탐문하였다. 이회옥이 발해 사람들이 교역하는 걸 도와주며 그들과 교분을쌓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정에서걱정할 정도인 줄은 몰랐다. 군사들에게 신망이 큰 이회옥을 참하기 위해서는 납득될만한 죄목을 찾아야 했다.
그럴 즈음 당나라는 또다시 내란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민족인 복고회은이 당나라가 고수해 온 이이제이의 덫을 실감하고 끝내 반기를 들었다. 복고회은은 안사의 난을종결시킨 일등공신이었음에도 번족이라는이유로 냉대받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서방의 강자 토번(티베트)이 10만 대군을 휘몰아 당나라 도읍지인 장안을 함락했다.
이때 이회옥은 반란을 일으킨 복고회은을 도와 평로치청의 군사를 일으키자고 후희일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복고회은의 거병은 명분이 있습니다.당나라는 운명을 다했습니다. 형님이 거병하면 천하가 준동합니다. 하북의 이회선,설숭, 전승사, 이보신도 따를 것입니다." 이회옥은 진지하게 당조를 멸하자고했다.
을사(765)년 5월, 후희일은 이회옥을 병마사직에서 해임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복고회은을 도와 거병을 도모했다 하여반역죄로 다스리기로 했다. 그러나 하늘은 이회옥의 손을 잡아주었다. 후희일이 무자(무당)를 데리고 성 밖나들이를 간 사이에 평소 이회옥을 따르던군사들이 옥을 부수고 이희옥을 구출하여절도사로 떠받들었다.
황제 이예는 고심 끝에 명백하게 반심을품은 줄을 알면서도 이회옥에게 평로치청의 절도유후 자리를 주었다. 그의 반심을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이회옥은 평로치청의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당제 이예로부터 이정기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나는 고구려 후손이오. 당나라 조정에서는 언젠가 나를 버릴 것이오. 내 평생 소원은 고구려를 복국하는 것이오. 대부도 알겠지만 나라를 일으키는 것은 민심과 군심도 얻어야 하고, 용맹한 군사와 좋은 군마와 병장기가 필요하오. 황상께 간곡히 주품해 주시오."
대원의의 보고를 받은 대흠무는 크게 기뻐하여 대원의에게 문산관인 자수대부와무산관이자 정2품인 보국대장군을 제수했다. 아주 각별한 배려였다. 문관에게는문산관을 내리고, 무관에게는 무산관을 내리는 게 관작의 정령임에도, 황제는 각별히대원의에게 문무관작을 겸직케 했다. 그만큼 총애한다는 뜻이고 공적을 인정했다.
해가 바뀌어 병오(766)년 봄이 되자 발해교역선은 박작구와 비사성 일대에서 바다건너 등주로 향했다. 통한의 땅 등주는 수나라 때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던 전진기지였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 고구려의 후손 이정기가 등주를 포함한 산동 일대를 치세하고 있으니 얼마나 장쾌한 일인가.
나는 그저 강대한 군사력만 있으면 나라를 창업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소이다. 허나 대부를 보면서 군사력은 나라를 만드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야알았소." 산동의 맹주인 이정기가 거리낌 없이 속내를 내보였다. 스스로 내공을 다지며 천하를 경략할 꿈을 꾸는 것을 보면 영걸이 틀림없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며,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도 호걸만이 보일 수 있는 자세였다.난욱도 머리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발해가 강성해진 것은, 법령이 엄하되공평하고, 조세가 균등하며,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따뜻하게 대하며, 군신 간에 바른말을 하고, 천하에 도가 통하니 누구나 몸과 마음이 가볍기 때문입니다."
명은 하늘에 맡기고 채찍을 들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시면 천하를 얻을 테니수명이 길고 짧음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오직 일념으로 당나라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정성으로 치세하십시오." 이정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는 나의 스승이오." 두 사람은 밤 이슥토록 술잔을 기울이며세상사를 논하고 앞날을 예견하며 담소를나누었다.
일본 천황 백벽도 그 본디 뜻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전과 다르게 발해 황제가문투를 바꾸어 하국 다루듯 한데다 천손 운운하며 장인과 사위 관계를 맺자 하니 홧김에 따져본 것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주고받는 국서는각기 귀히 여겨 국서고에 보존하는 법이거늘, 불손하고 예법이 어긋난 발해의 국서를 받을 수 없도다. 이에 국서와 발해 황제가 보낸 방물을 사신과 함께 돌려보내겠노라. 유사에게 명하여 빈례를 모두 중지하라."
"신이 되돌아가 국서를 다시 받아가지고와도 여러 달이 걸리옵니다. 국서는 결코신하가 고칠 수 없사옵니다. 그럼에도 신은감히 아뢰겠사옵니다. 원컨대 국서를 예법에 맞추어 고쳐 올리겠사옵니다. 훗날 황상께옵서 신의 죄를 물을 것이나, 두 나라의화애로움과 번영을 도모했다는 공을 남기고 기꺼이 죽기를 청하겠사옵니다. 윤허하여 주옵소서." 두 나라의 번영을 위하여 목숨을 던지겠다는 발해 사신의 충절에 백벽은 탄복했다. "내 어찌 그대와 같은 충신의 청을 기꺼이 받지 않겠는가. 허나 나중에 오는 사신들은 예법을 어기지 않게 하라." "폐하, 황공하옵니다."
대흠무는 황후의 신체가 한낱 짐승처럼취급되는 게 못마땅했다. 신석정은 황제를설득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미 황제에게 황후 몸에 칼을 대는 건 불경이라고진언한 자가 있는 듯했다. "간악한 무리를 치죄하시겠나이까?" "짐이 몸소 국문하겠소." "황후마마를 시해해서 득볼 자가 누구겠나이까?" "물러가시오!"
국사의 행차에는 법도가 있어삼엄한 수행이 따르게 마련인데, 무명은 제자 일운만 앞세우고 황궁으로 들어섰다. 한 식경 만에 무명선사도 쫓겨나듯 궁궐을 나섰다. 불심 두터운 대흠무는 진신사리를 구해온 날부터 무명을 만날 때마다 삼배를 올려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무명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국사와 태사가 시해범을 잡기 위해 검시할 것을 주청하고 이진무, 두필효, 임향기가 모진 심문에도 굴하지 않자, 문무백관이이심전심으로 상소문을 닦았다. 이틀째 되는 날에 여러 신하가 연명으로올리는 진신소가 편전으로 올라갔다. 물론뭇 신하가 모두 연명하지는 않았다. 끝까지검시를 반대하는 국구 고원과 그의 제자들,근신 대원의와 그의 측근들, 대중정 고잉 역시 연명하지 않았다.
매질을 하거나 불 달군 인두는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형구들이 널려있는데도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오로지 바늘과 송곳, 거칠게 켠 대나무와 끓인 물에약을 타서 마시게 했다. 때가 되면 맛깔스런 음식과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쌀밥을 먹였고, 더러는 몸 고생을 달래라면서 술도몇 잔씩 마시게 했다. 닷새째부터는 국문당하는 자들의 가솔들을 데려다 곁에 앉혀놓고 꼭 같은 방법으로 심문했다.
드디어 엄청난 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죄명을 밝힌 것은 사선시의 모시간,은기종, 여물총이었다. 그들이 밝힌 시해의주모자는 국구 고원, 황자 대굉임의 비인고은공의 아버지 고극사, 대내상 고건의 아들이자 상경용천부의 수장인 경사 고군, 중경현덕부도독 고학성과 동경용원부도독왕사감이었다.
"전하, 모두 거짓이옵니다. 황후께서 신하의 상에 있는 음식을 드실 수도 없거니와설사 드셨더라도 마마께서만 절명하실 수없사옵니다. 이는 처음부터 마마를 시해하고 죄를 덮어씌우려는 음모이옵니다. 전하,저 간특한 고잉에게 속지 마옵소서!" 이진무가 목청을 세워 대굉임에게 간했지만, 고잉은 반박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대중정 고잉은 들으라! 하늘이 두렵지않느냐? 어찌 황후를 시중했던 후궁들은심문하지 않고, 죄 없는 신하들만 심문하여죄상을 꾸며내느냐. 닷새 동안 거짓 죄상을만든 너의 간특한 재주를 하늘이 모르겠느냐?" 이진무는 고잉을 꾸짖으며 그 경황에도황자 대굉임의 일그러진 표정을 살폈다.
"전하! 신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옵니다. 삼족이 멸화를 당하는데 어찌 거짓으로 살기를 바라겠사옵니까. 저들처럼 국구와 고씨 일가의 역모였다고 말하면 화를 면할 수있음을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그럼에도 감히 진언하고 죽기를 청하옵니다. 지금이라도 태사께서 황후의 옥체를 검시하시면 음모를 밝힐 수 있사옵니다. 전하, 현자 고극사는 추앙받는 선비로, 오직 후학을 가르칠뿐 세상에 이름을 내밀지 않았사옵니다. 이는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는 걸 막으려는역신들의 음모이니 신들이 죽은 뒤라도 기필코 밝히옵소서." 임향기의 낭랑한 목소리는 죽음을 눈앞에 둔 여인 같지 않게 당당했다.
제에게 황후의 시신을 검시하여 원흉을 밝히자고 주청할 생각이었다. 대흠무는 국문을 주관하는 황자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흠무는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칙지를 내렸다. "역신 이진무, 두필효, 임향기는 효수하여 그 죄상이 효경처럼 간악했음을 알리거라. 고원은 멀리 동평부, 고극사는 철리부, 고군은 삭탈하여 막힐부로 유배하라.도독 고학성과 왕사감은 군졸로 강등하여도부수를 삼거라. 또한 왕비 고은공을 폐하여 사가로 보내고, 고원의 아들 고용을 삭탈하여 아비를 따라가 시중들게 하라. 짐의명을 거역한 자는 역신으로 문죄하겠도다."
그때 태사 신석정이 앞으로 썩 나섰다. 편전 대령한 진신들이 일순 숨을 멈추었다. "폐하, 술맛이 좋고, 되가 정확하며, 친절한 술집인데도 술이 팔리지 않는 이유는술집의 개가 사납기 때문이라고 했나이다.어진 선비와 충직한 신하들이 폐하께 진언하려 해도 사나운 개가 폐하 곁에서 선비와신하를 물어뜯으면 폐하의 총명이 흐려지고, 어진 선비와 충직한 신하는 떠나게되나이다. 이는 곧 민심을 잃는 것이며, 어두운 밤길을 비추던 등불이 꺼진 것과 같사옵니다."
대흠무가 신석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짐을 보필하는 진신 중에 개가 있소?" 목소리에 퍼런 날이 섰다. "언젠가는 주인을 물어뜯나이다." 신석정은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태사에게 면책과 불촉권을 주었소. 언제고 바른말로 간하라는 뜻이지, 역신을 두둔하고 감히 황후를 능멸하라는 게 아니었소. 조용히 퇴궐하면 문죄하지 않겠소.물러가시오!" 벽력 같은 호통이었다. 신석정은 무릎을꿇었다. "예부터 폐하가 어질면 신하는 곧은 말을 할 수 있다고 했나이다. 또한 충신은 바른말을 다하고 죽음을 피하지 않는다고 했나이다. 황후마마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게 신하된 도리이옵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진언이었다. "경은 죽음이 두렵지 않소?" 편전을 우렁우렁 울리는 노기 찬 소리였다.
"신의 나이 예순일곱이나이다. 죽음은두렵지 않사오나 혹세무민한 세상이 되고,간신이 득세하여 천기가 흐려지는 게 두렵사옵니다."
그때 불쑥무명선사가 정적을 깨뜨렸다. "폐하!" 무명의 목소리는 더없이 묵직했다. "윗사람의 도리를 잃고 아랫사람을 죽이는 것을 패라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애써 죽이는 것은 적이며, 충언하는 신하를 문죄하는 어리석음은 폭이고, 옳지 않는 판단으로흐린 명령을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을 멸이라 하나이다."
욱은 스승이나 마찬가지인신석정을 주살했다는 대원의를 받아들일수 없었다. 시일이 흐른 뒤에야 난욱은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신석정을 귀양 보낸 것은 황제인데, 야심 많은 대원의가 황제의 뜻을 좇아 신석정을 주살했다는 것은터무니없는 무근지설이라고 결론내렸다.신석정의 처참한 말로를 순전히 황제 탓으로 돌린 난욱은 그때부터 황제를 향한 충심에 등을 돌렸다. 대원의가 끝까지 난욱을호의로 대한 것도 마음을 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정기의 급서는 번진 연합의 패퇴를 의미했고, 당나라에게는 승기를 잡는 기회가되었다. 당제 이괄은 전열을 가다듬어 양승의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곧장 전열을 공격하여 화공전술로 대승을 거두었다. 때맞추어 이정기의 심복이자 친척인 덕주자사 이사진과 체주자사 이장경이 당나라에 항복했다. 더 놀라운 것은 요충지인서주자사 이유의 항복이었다. 이정기의 사촌아우이자, 가장 신임했던 심복까지도 배신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고구려의 후손들이 고구려의 혼을 살리기 위해 웅혼한 기개로 당나라와 맞설 때,또 다른 고구려 후손들은 배반의 깃발을 들고 고구려의 피를 더럽히고 있었으니, 패왕의 길은 험하고도 험했다.
그러나 이납은 몇 차례의 죽을 고비를넘기고 임술(782)년에 번진 세력과 다시 연합하여 제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대기국 왕 주도, 조나라 왕 왕무준, 위나라 왕 전열과 함께 반당 대열을 공고히했다. 산동반도에 고구려 후손이 왕국을 세운것은 천하를 놀라게 했다
"사람은 속여도 하늘은 속일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대술묘도 똑같이 목청을 높여 대원의의말을 맞받았다. 대술묘의 눈빛이 대원의의눈을 뚫을 듯했다.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황후를 시해한 자가 누구이며, 그 독물이 무엇인지 밝혀지면, 경의 목숨이 백 개인들 어찌 존망지추의 위급이 아니겠습니까? 경의 운명이 내 손 안에 있으니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시오." "……." 대원의는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러워 혀끝만 달싹거릴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밀을 누설하지 않음은 마지막 남은혈육의 정이오. 현비가 책봉되는 순간 경의목숨은 내 것이오.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대원의의 등줄기로 얼음덩이가 타고 내려오는 듯했다. "귀비마마, 신은 가문도 지켜야 하고, 사직도 보위해야 할 막중한 천명을 받고 있사옵니다." "경은 참으로 어리석소. 내 손으로 총경채, 달기종, 목판술을 문초하란 말이오?" 설마 했는데, 대술묘가 사건의 전말을 세세히 아는 것 같았다. 대원의는 대술묘에게더 말을 붙일 수도, 그렇다고 애원할 수도없어 그냥 시름없이 돌아섰다. 대원의는 궁궐을 나서며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도를 반대하는 신하들도 상소와 주달하기에 바빴다. 선조성의 좌상 이태극은 좌평장사 주공신, 시중 박차암과 함께 편전으로 나아가 천도의 부당함을 고했다. "폐하의 성덕이 흐려지자 간사한 무리들이 천도를 주청하고 있사옵니다. 가뭄으로백성들이 굶주리는데 천도하는 건 민심을저버리는 일이옵니다. 재정을 염출하고 부역을 징발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민심을저버린 죄는 사하기 어렵사옵니다. 지금 당나라는 군웅이 할거하고 병란이 일어 존망의 위기에 처했사옵니다. 반드시 천도해야한다면 서진하여 서경을 도읍으로 삼아 당나라를 경계하는 게 순리이옵니다. 통촉하옵소서."
대흠무는 흰 수염이 잘 어울리는 주공신에게 물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우상 대원의가폐하의 용안을 흐리게 하고 있사옵니다. 대원의는 동경 일대에 심복과 따르는 자들을심어 터를 잡게 했으며, 많은 양마와 양곡을 비축해 두었사옵니다. 이는 곧 역심을일으켰을 때 방비할 수 없는 형상이옵니다.지금 당나라가 어지러운 이유는 개원의 치를 이룬 당 현종이 말년에 환관 고력사와이림보, 양국충 같은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총명을 잃은 후유증 때문이옵니다."
황후마마를 시해한 배후를 밝히시면 반드시 대원의와 그 심복들의 죄상이 드러나옵니다." 선조성 시중 박차암도 죽음을 각오한 듯간했다.
황자 대숭린과 대정한이 이런 정황을 예견하고 천도하기 전 대흠무에게 주청했었다. "물이 끓어 넘치는 걸 멈추려면 불을 끄는 게 상책이옵니다. 지금 군국대사가 모두대원의의 수중에 들었사옵니다. 더구나 천도할 동경 일대에는 대원의의 식읍이 3천호나 되며, 인근의 군사들은 대원의가 초모한 군사들이옵니다. 백성들은 귀비궁이 화마를 입은 일도 대원의의 계략이라 믿고 있사옵니다. 사직을 보전하고 국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대원의를 범관으로 삼고, 그의심복들을 정죄하옵소서."
역정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총명예지하여 사해가 두려워하고, 만백성이 추앙하던 황제였다. 그러나세월은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권세를 너무 오래 누리면 총명이 흐려지는 게 세상이치인가. 대흠무는 근신 중에 근신이요,아부의 달인인 대원의에게 정사를 맡기고후궁들의 치마폭을 헤어나지 못했다.
대원의는 누이 대술묘뿐 아니라 딸 대귀령까지 대흠무에게 바쳤다. 어디 그뿐인가. 늙은 황제가 어떤 여인을 좋아하는지를 살펴 수시로 미인을 바쳤다. 황제가 대귀령을총애하는 줄 뻔히 알면서, 더 젊고 더 예쁜여인들을 골라 바치는 대원의의 간교함을,대흠무는 오로지 충성으로 알았다.
"예부터 총애하는 신하에게 권세가 모아지면 반드시 화근이라 했사옵니다. 지금 대원의는 무소불위 막강지권을 가지고 폐하를 참칭하며, 천하를 농락하고 있사옵니다.이는 고구려 말년의 연개소문에 비할 게 아니옵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하고보장왕을 내세워 대막리지가 되었사옵니다. 당 태종의 백만 대군을 무너뜨린 용맹과 기개는 높이 살지언정, 어찌 주군을시해한 죄를 덮을 수 있겠사옵니까? 무릇제왕은 백성과 나라를 위해 재앙이 될 만한것은 모두 참초제근해야 하옵니다. 잡초를없애려면 어찌 그 뿌리를 뽑지 않을 수 있사옵니까? 대원의를 물리치옵소서." 대청윤도 곡진하게 간했다. 태자 대굉임이 죽었는데도 아직 태자를 책봉하지 않았으니, 만약 대흠무가 급서하면 대원의의 막강한 권세를 무엇으로 누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조회를 폐하다시피한 대흠무는 정사를대원의에게 맡긴 채 대전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대내상 고중걸은 명색만 만인지상이었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정사는 대원의의 심복인 우상 고잉이 주무르고 있었다. 황위를 이어받아야 할 황자 세 명은상경에 머물고, 귀비 소생인 대성진만 궁성에 머물고 있으니, 변고가 생기면 모든 권세가 대원의 수중에 들 것을 모르는 사람이없었다.
여인은 금군장수였던 장각수의 딸장효채였다. 장각수는 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효수당한 장수였다. 그의 아내와 자식들이 모두 자살했다고 들은 대원의는 딸자식이 살아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대원의는 장각수 일가족의 자살을 보고했던 장수 미경금을 잡아들였다. 미경금은모든 걸 각오한 듯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장각수의 자식들이 하나같이 창검을 잘쓰기에 집을 포위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무기척이 없어 급습했더니 모두 자결했는데,열두 살짜리 계집아이만 칼을 잡은 채 제목을 찌르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저는 계집애를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담을 넘겨 도망가게 했습니다. 어찌 충신의 자식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심복처럼 아꼈던 미경금은 눈을 똑바로뜬 채 대꾸했다. "충신의 자식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 진실을 감출 수 없습니다." 미경금은 더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었다.대원의의 칼날이 바람을 가르며 미금경의목을 쳤다.
"폐하, 백 번을 죽어도 죄를 씻지 못하니신의 삼족을 멸하시어 만분의 일이라도 죄를 씻게 하옵소서." 대흠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대원의를쳐다보지도 않은 채 언성을 높였다. "대원의의 왕호를 폐하고 범관으로 삼으라."
환궁한 대흠무는 며칠 만에 병석에 눕고말았다. 정사를 폐하여 대전에 나가지 않을뿐더러 신하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수라상도 그냥 나오기 일쑤였다. 들끓는 심화를 주체하지 못해서 버럭버럭 소리 지르거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을 마구휘둘러 내시와 궁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럴 만도 했으리라. 천하의 주인이요,하늘의 자손이며 만백성을 거느린 황제의여인이 황후 책봉을 앞두고 젊은 장수와 도망쳤으니, 그 수치와 수모를 어찌 견딜 수있으랴.
대귀령이 양신장과 도망치는 순간 대원의는 모든 권세를 잃었다. 황후와 태자가책봉되는 순간 민심은 그쪽으로 쏠릴 것이다. 앞날이 훤히 보이는데 가만히 있으면무슨 변고를 당할지 모른다. 심복도 무수히많지만 정적 또한 무수했다. "묘책이 없겠느냐?"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무슨 참화를겪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황후 시해 사건부터 대귀령의 반심에 이르기까지 짊어져야할 죄상이 너무 많았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대원의가 막강지권을 누릴 때는 숨길 수 있을지언정 권좌에서 멀어지는 순간 없는 죄마저 덤터기 쓸수 있는 게 세상인심이었다.
이때 토적군 장수로 전장에 나갔던 박사성이 편전에 꿇어 엎드리며 간했다. "감히 아뢰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광왕전하를 비롯한 세 황자가 역모를 꾸민 것은 사리에 맞지 않사옵니다. 2만 군사를 일으켜 황성을 침공했다지만 실제로 5천 군사뿐이었고 전투 대형을 갖추지 않았으니애초 공격 의도가 없었사옵니다. 항복한 군사들은 폐하의 칙서를 받들고 입궐하는 군사들이었기에 모두 기뻐했다 하옵니다. 더구나 광왕전하는 생모인 숙비마마가 황후에 오르는 걸 크게 기뻐하여, 여러 가지 물선을 마련했다 하옵니다. 간신들이 폐하의칙서를 위조하여 사직을 어지럽혔으니 좌우를 살피시옵소서." 대흠무의 얼굴이 금새 변했다. "사실이더냐?" "항복했거나 사로잡힌 군사들을 모두 방면했사옵니다. 그들을 문초하면 진위를 밝힐 수 있사옵니다. 역신들이 도성을 공격하면서 어찌 무방비로 행군했겠사옵니까?" "반적들이 공성무기와 화차, 검거까지거느리지 않았더냐?" "그 또한 칙서를 받든 것이옵니다." "짐은 칙서를 내리지 않았노라." "폐하, 간사한 무리들이 칙서를 위조했으니 폐하를 참칭한 죄를 엄히 다스려 국기를 바로잡고 간신들을 물리치옵소서." "누가 간신인고?" "대원의의 암계가 어찌 두렵지 않겠사옵니까?"
대흠무의 노성에 시위가 달려들어 박사성을 포박했다. 이로부터 상소를 올려 덕비와 숙비의 폐비를 부당하다고 주청하거나, 세 황자의 역모에 얽힌 진위를 밝혀 달라는 신하들은 삭탈되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꿈에서 대숭린과 대청윤이 내 손을 잡으며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살아 있으니꿈에 나타났으리라." 대흠무는 세월이 흐르며 황자들의 반란이 조작되었을지 모른다는 의혹을 품었다. "폐하, 적손이 총명호학하고 담대하여능히 보필할 것이옵니다." "그렇구나."
대흠무는 드디어 임신(792)년 정월에 손자 대화여를 태자로 책봉했다. 책봉식을 마친 대화여는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태자궁으로 입궁하고 대사면을 단행했다. 대사령 소식에 대원의는 크게 놀랐다. 정적들이 모두 풀려났기에 가슴이 섬뜩했다.심지어 대원의를 주살하려 했던 장각수의딸 장효채와 귀양 갔던 박사성도 사면되었다. 반적으로 낙인찍힌 대숭린과 대청윤의 가솔도 사면되어 도성으로 돌아왔다. 시퍼런 칼날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위기를 느낀 대원의는 몸을 숙이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해 5월, 제나라 왕 이납은 불과 서른네살로 아버지 이정기와 같은 악성종양으로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둘째아들 이사고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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