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의 마지막 한숨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2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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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순혈(純血)이라는 이름의 폭력과 상실된 공존에 대하여

— 살만 루슈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을 읽고 —

혼종의 미학이 사라질 때, 도시의 색도 함께 바랜다


역사는 대개 승리한 쪽 언어로 정리된다. 그런데 문학은 그 바깥으로 밀려난 것들, 사라진 것들, 끝내 지워진 것들의 자취를 따라간다. 살만 루슈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도 그런 소설로 읽혔다. 겉으로는 한 집안 이야기 같지만, 끝내 이 소설이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이 승리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사라졌는가 하는 문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1492년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그 해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혼종’과 ‘배제’였다. 그런데 그 두 단어를 붙잡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1492년의 풍경이 겹쳐졌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있었던 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레콩키스타가 마무리되고 유대인 추방과 무슬림 공동체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여러 문화와 종교가 한 공간에서 뒤섞여 있던 질서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더 단일하고 배타적인 질서가 들어서는 장면이 바로 거기 있었다고 본다. 그라나다의 마지막 왕 보압딜이 알함브라를 떠나며 내쉬었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한숨’도, 단순한 패자의 탄식이 아니라 공존의 한 시대가 끝나는 데 대한 한숨처럼 느껴졌다.


내가 보기에 루슈디는 이런 상실의 감각을 현대 인도, 특히 뭄바이라는 공간으로 가져와 다시 풀어낸다. 주인공 모라이스 조고이비, 곧 ‘무어’는 여러 종교와 문화의 계보가 뒤엉킨 존재다. 이 인물 자체가 이미 순수한 혈통, 순수한 문화라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 준다. 애초에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그렇게 깔끔하게 나뉘지 않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무언가를 순수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이 결국 타자를 밀어내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 중 하나라고 느꼈다.


모라이스가 남들보다 훨씬 빨리 늙어 간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것이 단순한 기이한 장치가 아니라, 너무 빨리 달려온 시대 자체를 보여 주는 장치처럼 읽혔다. 성찰은 없고 속도만 남은 시대, 효율과 성장만 중시하는 시대에서는 섞이고 흔들리고 모호한 존재가 늘 불편한 것으로 취급된다. 정리되지 않는 존재, 딱 잘라 설명되지 않는 존재는 쉽게 잡음으로 밀려난다.


이 소설의 비극은 하루아침에 터지지 않는다. 먼저 뭄바이의 다채로움이 조금씩 흐려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순수’를 말하는 목소리들이 차지한다. 문제는 이런 언어가 사회를 더 좋게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만들고, 낙인을 찍고, 누가 안이고 누가 밖인지를 나누기 시작한다. 폭력은 총과 칼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사람을 나누는 말,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표현, 우리와 타자를 쉽게 갈라버리는 문장이 먼저 분위기를 바꾸고 질서를 바꾼다. 그래서 나는 “순수한 것이 좋다”는 말이 결코 순진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은 아주 자주 배제의 다른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알함브라도 떠올랐다. 흔히 화려한 궁전으로 기억되지만, 내게 더 인상적인 것은 물과 정원, 그리고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한 공간 안에서 어긋나지 않게 어우러지는 감각이었다. 물론 어느 시대가 자연을 완전히 존중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모든 것을 정복과 효율의 언어로만 설명하지는 않는 감각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이것이 소설 속 뭄바이가 잃어버려 가는 도시의 감각과도 닿아 있다고 느꼈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사라질 때, 공간은 먼저 색을 잃는다.


결국 이 소설은 묻는다. 순수한 혈통, 순수한 문화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가. 사실 우리는 모두 섞여 있고, 겹쳐 있고, 이미 수많은 흔적 위에 덧씌워진 존재들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순수라는 말을 내세워 선을 긋고, 경계를 만들고, 타자를 밖으로 밀어내려 한다. 그 결과는 공존의 회복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의 황폐화다.


책을 덮고 나서 창밖을 보니 회색 도시가 더 회색으로 보였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해진 풍경, 다름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혐오로 기우는 사회, 모든 것을 개발과 성장의 언어로만 설명하려는 태도. 과연 이것이 우리가 말해 온 문명의 얼굴인가 싶었다.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그 질문을 다시 던지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는 일은 거창한 데서 시작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함부로 나누는 말을 경계하고, 다른 목소리가 머물 자리를 남겨 두고, 순수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밀어내는 태도를 의심하는 것. 공존은 결국 그런 작은 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존명(尊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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