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호 아래쪽에 황초령 진흥왕순수비가 있잖아요." "황초령비는 지금은 함흥력사박물관에 있단 말입니다. 교수 선생은 아는 건 많아도 제대로는 모르는 것 같습니다." - P133
그때 나는 욕망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강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아! 삼지연 배개봉관에 다시 가고 싶다. 가서 여든두 가지 감자요리를 다 맛보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고 싶다. 그때는 삼수갑산의 허천도 보고, 황초령과 마운령의 진흥왕순수비도 답사하고, 일본에서 찾아다 길주에 복원한 북관대첩비도 보고 싶다. 이것이 정녕 ‘욕망‘이 아니길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이다. - P140
이때 새 지도자로 등장한 덩샤오핑은 공칠과삼(功七過三)론을 폈다. 마오쩌둥이 중국 현대사에 미친 ‘공로가 7이고 과오가 3이며마오의 과오에는 나의 과오도 들어 있다‘며 끌어안고 갔다. 참으로 대륙적이고 대인다운 포용력이었다. - P143
내가 중국을 답사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공칠과삼, 구동존이 같은 마음 자세이다. - P147
특히 그들이 입에 붙이고 사는 ‘인인유책(有)‘, 즉 ‘사람마다 책임 있다‘는 표어는 차라리감동적이다. ‘거리 청결 인인유책‘ ‘문화재 보호 인인유책‘ ‘문명 창달 인인유책‘ - P148
그런 일본이기 때문에 그들이 한때는 세계 2위를 차지했던 경제 대국이고, 노벨상 수상자가 25명에 달하는 문명국이며, 유럽의유수한 박물관들이 중국문화실 못지않은 일본문화실을 갖출 정도로 일본이 세계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한국인들은 전혀 인정할 마음이 없다. - P157
이런 한일 정서는 열등의식으로 인해 서로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하고 있다." - P157
"조천일우 차국보(照一隅此則國)"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나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말해주는 표어다. 그런 정신에서 일본은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했고 직업윤리 의식이 형성되었다. - P159
사무실로 올라가니 오카노 위원장 하는 말이, 이 점포는 100년전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시니세로 현재는 자신이 4대째 당주라는것이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응접실 한쪽엔 가훈이 걸려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더란다. - P161
"머리부터 꼬리까지 앙꼬(팥소)." - P162
이제 우리는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겠고, 일본은 혐한론을 멈추고 갈등의 원인인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여 두 나라가 공존과 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일본 답사기를 썼다. - P162
미술이 어떻게 언어의 기능을 회복하는가 하는 것이 오랜 나의숙제였다. 따라서 미술사에서, 수많은 미술운동들 속에서 이런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말 없는 벙어리가 되었다. - P193
오윤의 부친은 「갯마을」의 소설가 오영수이다. 그리고 6살 위의 누님 오숙희 또한 서울대 미대를 나온 인간미 넘치는 분으로오윤을 끔찍이 챙겼다. 부친과 누님은 사람을 좋아하여 그의 집에는 훗날의 많은 문사, 투사, 지식인들이 드나들었다. - P194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1941~2022)를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외면하더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 나는 그의 세례를 받고 성장한 그의 아우로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연을 끊지 않았다. 개인적인 인연이 아니라 해도 김지하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자영웅적인 민주투사였다. 70년대에 그가 7년간 감옥살이를 한것은 그 자체로 민주화운동의 한 축이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넬슨 만델라의 옥살이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 P201
김지하: 꽃과 달마, 그리고 ‘흰그늘‘의 미학 - P201
김지하는스스로 말하기를 "동학은 내 실천의 눈동자요, 불교는 내 인식의 망막이다"라고 하였다. - P208
김지하의 수묵산수화는 반(半) 추상화로 농묵과 담묵이 카오스를 이루면서 미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가 묵란과 묵매에서 추구해온 대로 화면 속에 ‘기우뚱한 균형‘이 유지된다. 그는 작가의 변에서 "수묵산수는 우주의 본체에 대한 접근이다. (…) 산(어두움)과물(밝음), 농경과 유목 문화의 대비 등을 담채(淡彩)와 진채(眞彩)로 드러내보았다"라고 하였다. - P209
나라가 깨지고 임금도 잃고 사직이 무너졌도다 치욕스러운 마음으로 죽지 못해 여태 살아왔다만 비록 몸은 늙었어도 아직 하늘 찌를 뜻이 있어 단숨에 몸을 솟구쳐 만리 길을 떠나노라
國破君亡社稷傾 包差忍死至今生 老身尙有沖초志 一擧雄飛萬里行 - P215
‘서여기인(如人)‘이라고 해서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고 한다. 올곧게 일생을 살아온 동농 김가진은 세상이 혼탁할수록 정도를 지켜야 한다는 지조가 있었다. 그래서 동농은 정법의 행서로일관하였던 것이고 그렇게 낳은 그의 서예는 우리 근대서예사를대표하고 있다. - P224
리영희 선생과의 만남 리영희(1929~2010) 선생님은 내 결혼식 주례이셨다. 그때 선생님 나이 48세로 내가 첫 주례 제자였다. 리영희 선생님이 내 결혼식 주례를 맡게 된 것은 1970년대 유신독재가 낳은 시대의 인연이었다. 1974년 2월, 나는 3년(정확히 35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그해 3월, 서울대 미학과 4학년에 복학하였다. 그런데 한 달 만인4월, 일명 민청학련 사건으로 불리는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구속되어 제대 두 달 만에 감옥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 P227
비상고등군법회의 2심에 항소이유서를 써낼 때 나는 딱 한 문장만 썼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징역 10년 살 행동을 하지 않았다.‘ - P228
출소해보니 수감자 중 대법원에 상고한 사람들은 서류가 법원에 갔다 와야 하는 형식적인 절차가 복잡해 곧바로 석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인 17일 저녁에 출소한다는 소식이 텔레비전뉴스에 나왔다. 그래서 나는 ‘공범들의 석방을 맞이하러 서대문구치소(서울구치소)로 갔다. 그때 나는 감옥 안에서 말로만 듣던 지하철을 처음 타보았다. - P228
인생을 뜻있고 선이 굵게 사는 사람은 자잘한 것에는 잔신경을 쓰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매사에 정확하고 성실하고섬세한 사람이 선이 굵고 멀리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신랑, 신부는 시간을 지킨다는 작은 일부터 소홀히 하지 말고 먼 곳을 생각하기바랍니다. - P235
그리고 두 사람이 살다 보면 의사 결정에서 의견이 달라질 때가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판단이 다를 때 작은 일은 남자 쪽이건 여자이건 어느 것을 따라도 무방할 것이니 서로 양보하는 미덕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의 큰일에서 의견 차가 생긴다면 신랑은 반드시 신부의 의견을 따르기 바랍니다. 이것은인생의 선배로서 경험적으로 드리는 충고입니다." - P236
"신랑 유홍준 군과 신부 최영희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과 어른을 공경하고 나라에 공헌할 것을 맹서합니까?" - P237
그런데 나중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 ‘혼인서약‘을 펼쳐보니주례 리영희 선생은 혼인서약 문장 중 ‘나라‘라는 단어를 두 줄로긋고 ‘사회‘라고 교정보아놓았다. 만년필로 ‘사회‘라고 고쳐 쓴 것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제기동으로 선생님을 찾아뵙고 ‘혼인서약‘의 단어 고친 것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 P238
"그게 그거일 수 있으나, ‘나라‘라는 말에는 파쇼 냄새가 나지만 ‘사회‘라는 말에는 인간의 윤리가 살아 있다는 차이 아니겠어." - P238
아! 나는 이런 분의 주례로 결혼했다. 이것이 나의 복인가, 아니면 내 생의 부담인가. 그것을 나는 아직도 분명히 가름치 못한다. 다만 주례 선생님께 변함없는 존경과 감사를 드리며 살아왔다. - P238
선생님의 글씨로 말하자면 한국 서예사에 홀연히 나타난 금자탑이었다. ‘여럿이 함께‘ ‘길벗 삼천리‘ ‘처음처럼‘ 등 네다섯 글자로 화두(話頭)를 던지고 그 아래에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라고 풀이를 단 작품들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 P255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를 나는 ‘어깨동무체‘라고 불렀다. 거친 듯 리듬이 있고, 기울어진 획들이 서로 의지하는 글자의 구성이 마치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영복 선생은 평소 연대감과 ‘관계‘라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글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P256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이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합니다.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에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2018) - P256
<더불어 숲>은 신영복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에 쓴 작품이다. 이 마지막 작품은 대작인 데다 획에 흔들림이 없어 전혀 절필 같지 않고 오히려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과 사상과 예술이이 한 작품에 담긴 것 같은 웅혼함이 있다. 그 ‘더불어 숲‘이라 쓴 네 글자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 P256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 P256
"혹, 자신이 소시민으로 되어간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아니, 나는 한 사람의 엑스퍼트로 미술평론가가 되기 위해10년은 더 이렇게 일하면서 공부할 거야. 너는?" "난 이 유신독재의 질곡을 깨뜨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중이야." "무얼 할 생각인데?" "도시 게릴라!" - P273
세화는 책 출간의 모든 것을 나에게 위임하였다. 나는 이 원고를 전달받아 창작과비평사로 달려갔다. 당시 창작과비평사의 고세현 사장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명저라고 판단을 내리고 곧바로출간작업에 들어갔다. 책 제목을 정할 때 나는 반드시 ‘나의‘가들어갈 것을 주장했다. 민주화 투쟁 시절에는 ‘나‘를 잊고 집단적이고 공통적인 목표를 향하는 자세가 필요하였지만 민주화를 어느 정도 쟁취한 지금의 시점에선 ‘나‘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P275
그 ‘나‘는 저자 개인을 말하는 동시에 우리가 집단적으로 겪었던시대의 아픔을 넘어서려는 공통의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 P275
내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나의‘에 포함된 개인적 감성이 대중적 동의를 얻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95년 3월 25일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출간되었다. - P275
톨레랑스는 타인과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관용(寬容)‘이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홍세화는 이보다는 ‘용인(容認)‘에 가깝다고 했다. 프랑스 사전은 이 단어를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풀이한다. 한자로풀자면 ‘화이부동(和而不同)‘에 가깝다. 즉 ‘남을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남으로 하여금 당신을)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뜻이다. 홍세화의 화(和)이다. - P276
프랑스에는 소설 속에 미리엘 주교가 있다면, 대한민국 현실 속에는 미리엘 홍세화가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홍세화는 인생을 참 올곧게 산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오래도록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1970년 서울대 문리대 교정 마로니에 그늘에서 만나50년 넘게 함께 지낸 벗으로서 작별한다. - P279
"아직 환갑은 안 됐지유?" "안되고말고요." "그럼 청년회로 들어가슈." - P308
당송8대가의 한 분인 당나라 한유(韓愈)는 「양양 우적 상공께올리는 편지(襄陽于相公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풍부하되 한마디 군더더기가 없고 축약했으되 한마디 놓친 게 없다
豊而不餘一言 約而不失一辭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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