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가요. 하지만 그믐 님도 아시잖습니까. 가장 뜨거웠던 사랑도 전부 다 잊어버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 P-1
"시간만 좀 흐르면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사랑도 전부 차가워져버리고 말지. 혹은 처음부터 뜨거웠던 것처럼 속일 생각이었거나." - P-1
신언서판이라고 했던가. 가장 처음이 겉모습이고 그다음이 말솜씨라는 말처럼 김현은 겉과 속이 전부 완벽했다. 그래서 다들 안타까워했다. 김현 자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전부 그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 P-1
잘나지 못한 집안, 그것도 서자 출신. - P-1
"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소. 이 좁은 땅과 하늘 말고 더 큰 세상을 보고 싶고 오래도록 살고 싶소. 내 이름이 천세 만세에 남도록 하고 싶단 말이오!" - P-1
그믐. 달이 뜨지 않는 밤. 영원한 어둠. - P-1
소원과 기도, 욕망으로 점철된 공간 안에서 그믐은 인간들의 믿음을 통해 강해졌다. 과학의 시대가 밝아왔다고 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운명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었다. 더 밝아지는 부분이 있을수록 더 어두워지는 부분도 있기 마련이었다. - P-1
인간들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빌고 또 빌었고 그믐은 그들의 기도를 바탕으로 한 번 더 일어섰다. - P-1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받아주는 게 아닌데."
"그래서 저 방에 키우시는 영귀들도 다 식물 모양을 하고 있는 거예요?" - P-1
그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보름은 목숨을 가진 것의 무게를 느꼈다. 그건 너무나 가볍고 동시에 너무나 무거웠다. - P-1
신이 직접 인간의 일에 개입하는 건 그만큼 큰 리스크로 돌아왔다. 그래서 보름 역시 자신이 가진 권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보름이 힘을 사용하는 건 적어도 같은 계(界) 내에 속해 있는 악귀나 귀를 상대할 때뿐이었다. - P-1
"당연히 그러시겠죠. 아무튼 상차림, 하실 거죠?" 진짜로 말렸다. 여기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알겠어. 할게, 한다고."
각자의 목적을 위해 힘을 협력하고 있는 사이. 친구라고 부르기엔 그렇게 친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또 그것도 애매했다. 아무튼 서로가 어쩌고 있는지 신경은 쓰였으니까.
지금까지는 의미를 두지 않았던 행동과 생각과 마음.
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두어도 괜찮았다. 보름은 자신의 산신이었고 자신은 보름의 산군이었으니까. 알아가는 게 하나씩 늘어난다고 해도 괜히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됐다. 언젠간 지나갈 마음이라고 생각하며 담아두지 않아도 됐다.
근래 들어서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런 예감은 마고가 소멸한 뒤 처음 느끼는 거였다. 분명 이 땅에 그릇된 것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올바른 방법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들은 그 존재 자체가 부정했기에 그것들을 정체화하기 어려웠다.
흰 사슴은 제주와 모든 섬을 관장하는 산군이었다.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모시던 산신이 죽었다면 산군 역시 응당 따라갔어야지.’ 차가웠던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명예롭게 죽었어야 할 것이 이렇게 살아 있다니.’ ‘망할 징조다, 망할 징조야!’
내 산군. 그 말이 유독 산호의 귓가에 콱 박혔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진짜로 몰랐네." "나도 이런 소리 할 줄 몰랐으니까 그냥 듣고 넘겨."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고." 그건 너 없이는 사는 게 재미없을 거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산호의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번 일을 다 마치면 셋이서 어디 여행이라도 가자. 네가 온 산에 한번 가보는 것도 좋겠지."
"그건 그렇지만……. 위험할 수도 있어." "나만큼 위험한 존재가 또 있나?" 장난기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너도 가고 싶은 거잖아, 지금. 그러니까 가야지. 내가 너의 산신이긴 하지만 그건 너를 지배하려고 있는 자리가 아니야. 네가 필요한 곳이고 네가 가고 싶다면 가.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이제 백귀야행이 시작된다." 검은 신당에서부터 시작할 야행의 행렬.
"나의 신, 나의 달." 갠 하늘 위로 그동안 숨어 있던 보름달이 떴다. 휘황찬란한 빛이 세상 만물 위로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누가 그런 신문물을 알려주래? 몇백 년을 각자 산속에만 있어서 외로운 양반들이야."
바다 안에서 산호가 발견한 인간 기둥, 그 사이에 마고의 정기를 받은 어린 산신이 있었다. 그건 김현이 만든 미끼였다. 산호와 보름을 갈라놓기 위한 미끼. 그러나 동시에 마고의 미끼이기도 했다.
마침내, 산호가 자신을 다시 찾아와 이것들을 전부 무너지게 만들 수 있도록.
"달은 이미 셋째 삭이 잘 다스리고 있어. 그리고 여기가 내 집인걸. 가족들도 여기 있고."
"그러니 나는 여기 있을 거야." 그건 새로운 신이 새로운 세상에서 하는 첫 번째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읽으신 분들에게 달과 산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