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나는 일본의 섬나라 근성이라든지 혈연·지연 같은 끈적끈적한 환경이 싫은 겁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각자 알아서 살게 그냥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기분 나쁜 폐색감을 찢어 버리는 일, 현존하는 직업 중에서는 공정위가 가장 가깝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상대방에게 1번이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거니까. 그게 경쟁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한쪽으로 시로쿠마 씨를 독점해 두고 다른 쪽에서는 바람을 피운다. 그게 바로 불공정한 거래죠. 그런 상태를 넘겨 버리려고 하다니, 공정거래위원회 직원으로서 납득하기 힘드네요."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배신해 버린 나가사와 씨는 역시 약한 사람인 거죠. 고쇼부 씨는 강한 사람이니까 약한 사람의 마음을 모르겠지만─."
"나, 별로 강하지 않아요. 약하지만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부전패가 되어 버리잖아요. 이길 가망이 희박해도 싸우는 것 말고는 길이 없어요."
정부는 국민의 신임 위에 성립한다. 선거로 뽑힌 정치가가 법률을 만들고 법률에 따라 세금을 걷는 민주적 기반이 있는 것이다.
운카이는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독단으로 다른 사람 돈을 가로채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쓰고 있다. 절차가 민주적이지 않다.
운카이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들은 복종할 뿐이다. 운카이를 정점으로 하는 지역사회에서 얌전히 있으면 생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부케두페’의 아오야기처럼 도전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배제된다. 건전하지 못한 방법이다.
한 무리의 우수한 사람, 강한 사람에게만 맡겨 두면 안 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부족하고 약하더라도 각자 의사를 가지고 움직이며,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때로는 타격을 받기도 한다. 경제 전체로서는 효율이 떨어지는 방법인지 모른다. 하지만 선택을 남에게 맡겨 두어서는 안 된다.
시민 개개인의 도전과 시행착오가 쌓이고 쌓여서 경제가 돌아가고 사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야말로 경쟁이고, 우리 공정위는 경쟁을 수호하는 지킴이인 것이다.
"그래. 어릴 때는 어딘가에 영웅이 있다고 믿었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짠, 하고 나타나 구해주는. 정의가 이기고 짝짝짝, 박수 치며 끝나는 해피엔딩. 하지만 말이야, 나이가 듦에 따라 영웅은 있다, 정의는 이긴다, 그렇게 순진하게 믿을 수 없게 되지. 다들 거악을 두려워해.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지만 정작 수갑을 내미는 사람이 없어. 영웅은 없다, 세상은 불합리하다고 삐딱하게 말하는 사람이 정의를 올곧게 외치는 사람을 비웃지."
"올바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사망자가 나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고가가 명쾌하게 대답했다.
"카르텔, 담합, 하청 갑질. 그런 위법 행위 때문에 궁지에 몰려 목숨을 놓는 사람도 있어. 그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공정위뿐이야. 가혹한 현실에 시달리며 영웅이 달려와 주기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적발의 손길을 늦춰서는 안 돼…… 나는 이제 현역이 아니지만."
고가는 장난꾸러기처럼 혀를 쏙 내밀고 웃었다.
그때 고가가 웃던 얼굴은 며칠이 지난 지금도 시로쿠마 머리에 들러붙어 있다.
가혹한 세상이다. 회사는 도산하고 경영자는 자살하고 어린 자식들은 가난에 허덕인다. 어디에도 안전한 길은 없다. 어떻게 해야 사망자가 나오지 않을지 알 수 없다.
정의를 관철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영웅은 있다.
"침착해. 우리는 공무원이야. 어디까지나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싸워야지."
사악한 자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해 온다. 하지만 정의의 편은 비상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법령을 준수하며 싸워야 한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공무원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법을 어겨도 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는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니까."
바로 옆에는 미도리카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시로쿠마 입에서 하아, 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운카이의 운도 여기서 끝났군. 미도리카와를 선택했다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당신을 지켜줄 때도 사용했던 기술인데, 이번엔 당신을 상대로 쓰게 될 줄이야."
"저는 미야베 선생님을 신으로 추앙하는 종교의 구도자거든요. 예전에 누군가 ‘미야베 작가가 목표야?’라고 물으셨는데 목표라니 말도 안 돼요. 어떻게든 치열하게 연구하고 공부해서 그 길을 따라가 보자고 생각할 뿐이지요. 저는 원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좋아했거든요. 그러다가 미야베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모 저택 사건』과 ‘미시마야 시리즈’를 정말 좋아합니다. 어른들이 읽을 수 있는 판타지이자 미스터리이며…… 아, 너무 좋아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예요. 이 이야기들은 다른 작가가 썼다면 현실성이 없는 설정이 되기 쉬웠을 텐데, 현대의 학생이 2.26 사건 당시로 타임슬립하는 이야기도 미시마야에서 기이한 체험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다는 이야기도 미야베 미유키 작가님이 쓰니까 리얼해 보이는 것이겠죠. ‘이 장르의 작법에 따라 썼습니다’가 아니라 장르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미야베 미유키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내용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문장으로 쓰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는 신카와 호타테. 그가 장차 미야베 미유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대가의 반열에 오르는 순간을 저도 목도할 수 있기를. 멀리서나마 바라봅니다.
이판사판이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합쳐진 말로 불교 용어입니다. 조선이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탄압하자 계급의 사다리 아래로 추락한 승려들은 살 길을 도모해야 했지요. 이때 잡역에라도 종사하며 사찰을 유지하고 불법의 맥을 잇던 ‘사판승’과,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참선을 통한 수행으로 불법을 잇던 ‘이판승’으로 각각 나뉘었다고 합니다.
조선이라는 파고를 통과하여 지금의 불교가 있기까지, 불법의 맥을 잇기 위해 자신들의 소임을 다한 사판승과 이판승의 역할은 지대했지요. 한데 오늘날 ‘이판사판’은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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