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체는 존재했던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의류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중요한 존재로 여기는 나머지, 별들이 주인공인 것이 분명한 밤하늘을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하고, 개성 넘치는 생물로 가득한 심해를 보면서도 인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공생은 어디에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쉽게 인간적 교훈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개별 작품마다 인간에 치우치거나 비인간에 치우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SF에서 비인간 존재들-자연, 우주, 행성, 테크놀로지, 동물, 식물, 외계 생물-은 인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는 이 행성의 꽤 많은 사람이 비인간 존재들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는 사실을, 또 그들 중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일부가 SF를 읽고 쓴다는 사실을 좋아한다.
"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버려진 장소들은 이제 가장 번성한 생태계다. 물과 바람, 흙, 그리고 식물들이 가장 먼저 인간이 떠난 장소를 점령하고 인간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러면 인간 대신 다른 동물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운다.
인간 없는 세상에 무엇이 가장 먼저 퍼져나갈지 답은 분명했다. 불모지, 폐허, 무인도를 뒤덮어버리는 식물들. 식물은 황무지를 개척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드는 존재다. 지구의 거의 모든 생물이 식물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들은 말없이 뿌리를 뻗고 세상을 지탱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미루기를 주제로 한 여러 문헌을 조사하고 취재 장소를 여행하며 얼마나 오랫동안 글쓰기를 미루어왔는지를 털어놓는데, 저자의 말마따나 "자료 조사야말로 글쓰기에 있어 우리 모두가 가장 선호하는 미루기의 기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