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던 오랍동생을 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 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 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김소월의 「접동새」
어느 산골 마을에 아홉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둔 사람이 있었다. 아들만 아홉 명 낳은 끝에 뒤늦게 고명딸을 본 부부는 물론 오빠들도 여동생을 끔찍이 귀여워했다. 산에 약초를 캐거나 나무를 하러 가면 막내 여동생을 생각하며 산딸기나 으름, 개암, 다래 따위 열매를 꼭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왔다.
예쁘기가 꼭 맑은 물에 똑 떨어진 새빨간 앵두 같아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앵두’라고 불렀다.
부엌에 들어가면 꼭 어머니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듯 혼잣말을 했다.
그날도 그랬다. 밥을 지으러 부엌으로 나와 혼잣말을 했다.
"어머니, 오늘은 감자밥을 지을까요, 옥수수밥을 지을까요?"
그러자 부뚜막 뒤쪽에서 커다란 쥐가 한 마리 조르르 나와 딸을 빤히 바라보더니 감자가 든 이남박을 툭툭 건드리는 것이었다. 딸은 왠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쥐로 환생하여 자기 앞에 나타난 것만 같았다.
"죽으러 가는 년이 그건 먹어서 뭘 해."
아버지는 채찍으로 말 엉덩이를 내리치며 갈 길을 재촉했다.
"아버지, 돌아가시는 길에 배나무가 죽었으면, 앵두가 다 떨어졌으면, 으름덩굴이 시들었으면 내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으로 아세요."
"접동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새의 울음소리였다. 그 새의 입안이 핏덩이라도 토해내듯 새빨갰다.
"아아,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가. 죄 없는 딸을 죽인 몹쓸 아비가 되었구나."
아버지는 산배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딸의 고무신 한 짝을 주워들고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억울하게 죽어 접동새가 된 여동생은 해질녘이면 아홉 명의 오빠들이 살고 있는 집의 울밖 나무에 날아와 앉아 ‘접동 접동, 아홉 오라범 접동, 아홉오라범 접동’ 하며 울었다. 밤새 피 토하듯 울고는 새벽닭이 울면 날아갔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에 사는 한 젊은이가 과거를 보기 위해 괴나리 봇짐을 지고 집을 떠났다. 한양까지 가려면 화천읍 냉경지 나루를 건너 용암리와 삼화리 마을을 지나 용화산을 넘어야 했다. 용화산은 경치 좋기로 유명하였지만 그만큼 험하기도 한 곳이었다.
"이 시각에 산을 오르다니. 산에서는 날이 쉬이 저문다오. 곧 어두워질 텐데 도로 내려갔다가 내일 날 밝는 대로 산을 넘는 게 좋을 거요." 산에서 내려오던 나무꾼이 걱정스레 만류했으나 젊은이는 귀담아듣지 않고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젊은이와 무사는 마당바위로 내려갔다. 구렁이의 주검을 거두어 잘 묻어주고 두 번 절하는 예로써 장사지냈다. 하늘의 뜻이 어디에 있든, 인간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그들의 질서나 계율이 어떠하든, 자신들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 죄스럽고 가슴 아팠던 것이다. 또한 천년을 기다려 이무기가 되고 또 천년을 기다려 용이 되고자 했으나 끝내 하늘에 오르지 못한 구렁이의 원과 한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어느 마을에 일손 빠르기로 소문이 자자한 처녀가 있었다. 빠르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누에씨를 받아 키워서 고치를 짓고, 그 고치를 삶아서 명주실을 잣고, 그 명주실로 옷감을 짜 물감 들이고 말려, 옷 한 벌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반나절이었다.
대체로 손이 빠르면 솜씨가 거칠게 마련인데 그야말로 천의무봉, 흠 하나 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공짜로 여덟 칸 번듯한 기와집이 생기고. 그 너른 삼천 평 논의 모내기를 반나절에 끝내고 온 집안의 벼룩들을 말끔히 소탕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배 먹고 이 닦기! 손 안 대고 코 푸는 땡 잡는 일! 내일은 또 어떤 재주를 가진 녀석이 내 집 문을 두드리려는고? 꿈속에서도 주인 영감은 흐뭇하고 흐뭇하여 빙긋빙긋 웃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서 가장 손이 빠른 처녀는 생명의 은인이자 세상에서 가장 발이 빠른 총각과 결혼하여 오래오래 잘살았다.
어려서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던 어린 김응하는 임진왜란 중 여덟 살 난 동생을 등에 업고 피란길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던 시절이었다. 3년 동안이나 유랑하는 무리를 따라다니며 얻어먹고 지내던 소년 응하는 왜병이 물러가자 고향인 철원에 돌아와 사촌형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잔치가 들었나? 제사가 들었나? 운 좋으면 오늘밤 음식을 걸판지게 얻어먹겠는걸.’
"오늘밤 우리집에 저 산속 보타사의 도적떼가 오기로 되어 있소. 그들 눈에 띄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참화를 당하게 될 터이니 다른 집으로 가보시오."
7년 동안이나 계속된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온 나라가 전장터가 되었던지라 그 땅과 사람살이의 황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고살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굶어죽거나 거지가 되거나 무리지어 도둑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도둑떼가 온다구요?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내가 다 막아드릴 테니 저녁밥이나 두둑이 먹여주시오."
"공연한 객기로 젊은 목숨을 잃지 말고 일찌감치 피할 도리나 하시오."
"주인장, 아무 걱정 마시오. 내가 오늘밤 그 못된 놈을 박살내겠소. 오늘 대접받은 밥값을 톡톡히 치러드리겠소. 아무 염려 마시고 술이나 한 동이 갖다주시오."
"천하절색이라더니 천하장사일세. 버들잎처럼 나긋나긋 야들야들하다더니 순 거짓뿌랭일세. 무겁기는 어찌 이리 무거운고. 아이구, 이년아, 좀 살살 때려라. 아무리 매 끝에 정든다 해도 다짜고짜 주먹질이라니, 너는 귀한 양반집 규수라면서 서방님 맞이하는 예법을 이렇게 배웠느냐.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구 나 죽네, 마달이 죽네."
"염려 마십시오. 도둑놈들의 소굴을 완전히 소탕하고 마달이 놈에게 잡혀간 조카따님의 몸종도 찾아오고 스님들에게 절도 찾아주겠소."
"제게는 분에 넘치는 규수입니다. 주인장 뜻이 그러하시다 해도 아가씨는 어찌 생각할는지요?"
"제 뜻이 바로 아가씨의 뜻입니다."
"아가씨는 서울 재상집에서 귀하게 자라난 몸이나 나는 시골의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데 오늘 이와 같이 부부의 연분을 맺는다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맞지 않는 일인 것 같소."
"이 모든 일이 다 하늘의 뜻이 아닙니까? 하물며 도적에게 죽게 된 이 몸을 구해주신 은혜는 일생을 두고도 다 갚지 못할까 하옵니다."
김응하 장군(1580~1619)은 조선조 14대 임금인 선조 시대에 태어나 15대 광해군 때 활약한 장군이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두루 중요한 직책을 거쳤다. 광해군 10년, 중국 명나라에서 만주 남쪽의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병을 청하자 도원수 강홍립을 따라 군대를 이끌고 좌영장으로 만주에 출정하였다.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육만 명의 적과 맞서 싸우다가 40세의 아까운 나이에 전사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를 충무라 한다.
강원도 춘천에서 동북간 약 이십 킬로미터 지점, 지금은 소양댐 물속에 잠긴 북산면 내평리라는 곳에 눈이 화등잔같이 크고 키가 구척장신인 한 총각이 살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는 이웃 동네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홀로 된 아버지를 봉양하고 누이동생을 거두었다. 우직하고 부지런한 총각은 열심히 일했다. 초가삼간이나마 반듯하게 짓고 예쁘고 알뜰하고 마음 착한 색시를 얻어 아버지를 잘 모시고 싶었다.
끙끙 앓으면서도 끝내 산삼을 캐지 못한 아쉬움으로 한숨만 쉬던 아버지는 한겨울에 세상을 떠났다.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머리맡에서 임종을 지키는 아들에게 슬픈 유언을 남겼다.
"얘야, 착하고 부지런한 네가 부모를 잘못 만나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입고 먹지도 못하였구나. 이승에서의 지난날이야 돌이킬 수 없다만 내 죽어 혼이라도 네 앞길을 지켜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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