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마봉춘이 제정신이던 시절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출한 유현 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버리고 불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만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유신은 이렇게 오늘을 지배하고 있다.
문교부는 중학교의 일류병을 없애기 위해 서울의 경기중·서울중·경복중과 경기여중·이화여중 등 5개의 명문 중학교를 폐쇄하기로 했다. 국민 대다수는 이 조치를 "20년 동안 끌어온 입시지옥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 학교군 추첨제의 혁명"이라고 환영했다.6 언론은 국민학교엔 환성이 터지고 어린이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고 보도했다.
중학교 입시 폐지를 발표한 권오병에 대해 당시 한 신문은 "폭탄적인 중학입시제 폐지를 발표, 600만 국민교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다"며 "이 정도라면 어린이 왕국에서 왕좌를 누릴 만하다"고까지 보도했다.
권오병은 "중학교 무시험 추첨제가 의무교육 9년 연장을 위한 첫 조치"라면서 "수익자에게 과중한 부담 없이 정부의 중등교육비로 3년 안에 중학교의 평준화를 기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박정희는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더 시키고 중학교의 어린 학생에게는 과도한 입시경쟁에서 벗어나 심신을 고루 발달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YH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시인 고은은 1970년대의 시작과 끝을 이렇게 노래했다. "1970년 전태일이 죽었다/1979년 YH 김경숙이/마포 신민당사 4층 농성장에서 떨어져 죽었다/죽음으로 열고/죽음으로 닫혔다/김경숙의 무덤 뒤에 박정희의 무덤이 있다/가봐라"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여기저기서 남민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분별없고 소영웅주의적이고 모험적이고 맹동적이고 운동에 해만 끼쳤는가를 성토해댔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물었다. "가만, 그래도 연장이라도 한번 들어본 게 지리산에서 다 깨진 다음에 처음이잖아!" 반년쯤 지나 광주에서는 수천의 시민군이 총을 들었다.
사람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서 불의 앞에 납작 엎드려 있어도 죽고, 마주 싸워도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마주 싸우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김남주는 미지근한 싸움은 차라리 참는 게 낫다고 했다.(〈진혼가〉) ‘얼어붙은 강을 으깨어’놓기 위해 전사 김남주가 원했던 것은 ‘철의 규율’과 ‘불의 열정’과 ‘바위의 조직’이었다.(〈강〉)
경찰의 완강한 봉쇄에 막혀 주춤하던 학생들은 구 정문 옆의 담장을 힘껏 밀었다. 때로 부실공사도 민주화에 기여하는가, 힘없이 무너진 담장 밖으로 학생들은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대장부로 이 세상에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죽을 수 있는 명분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에 법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부하들만큼은 꼭 살리고 싶어 했다. "혁명 이념에 완전히 동조한 사람이면 저세상에 데리고 가도 좋지만 아무것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는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국민 여러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말로 국민들에 대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김재규를 죽인 전두환은 광주 시민들의 항쟁마저 짓밟고 생명이 다한 것 같았던 유신체제를 간판만 바꿔 달아 신장개업했다. 전두환의 내란은 그렇게 완성되었고,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아직도 자유민주주의를 만끽해보지 못했다.
황제 나폴레옹의 동상이 거꾸러져 산산조각이 나기 위해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황제의 망토가 걸쳐져야 했던 것처럼,31 박정희의 향수도 또 어떻게든 한 번은 소비되어야 했다. 역사의 법정에서 박정희와 김재규가 제대로 마주 서게 되는 것은 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대중들에게 자신이 왜 박정희를 쏘았는지를 이야기할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의 재평가를 위한 준비를 시작할 때다.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도청에 남았지만 워낙 화력 차이가 커 순식간에 제압당한 탓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오월의 사회과학》의 저자 최정운 교수는 "살고 싶었던 사람은 다 살았고, 죽기로 작정한 사람도 한 반은 살았다"고 썼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여인천하〉의 중전마마 대사를 빌려 딱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그 입 다물라!"
유신시대가 부활할지도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2012년에 대학교수와 언론인을 비롯한 지식인의 수는 유신시대에 비해 수십배 늘어났다. 그러나 유신의 부활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지식인은 불행히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장준하, 리영희, 송건호 같은 거룩한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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