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태생인 유인석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 하지 않음과 하지 못함은 같다. 그가 벼슬한 적 없음은 하지 못한 것일 터였다. 시골에서 공부만 하던 선비. 그에게 호좌의진 대장 노릇은 구국충정의 탈을 쓴 벼슬인 것이다. 그가 오래전에 과거 급제하여 현재 관직에 있었다면 과연 의병을 일으켰을지, 알 수 없다.
무슨 수를 쓰든지, 필요하다면 본대를 뒤집어서라도 김백선을 구하겠다고 꼬박 하루를 달려왔지만 어쩐지 이런 결과를 짐작했던 것 같다. 10년 전 평양 진위대가 가망 없었듯 이 호좌의진도 앞날이 없는 거라고. 앞날이 있는 부대에서는 선봉장을 잡아 가두는 따위의 짓을 할 리 없다고.
내를 처음 만났을 때 어땠는지. 첫날밤은 어찌 치렀는지. 어느 길목 주막 주모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제 고향 동네에 사는 과부에 대해서도 말했다. 사내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곱고 귀엽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 들어서 돌아왔더니 좀 많더라고요. 내가 떠나 있던 사이에 좀 늘기도 했나 봐요. 그게 전부 무남독녀인 내 거였고요. 아버지가 생전에 전부 내 이름으로 이전해주셨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장가를 잘 든 거죠. 귀엽고 총명한 아들에다 인자한 어머니에다, 부자에 어여쁘기까지 한 아내. 당신, 진짜 땡잡은 거예요. 이럴 줄 몰랐죠?"
눈 내린 벌판을 갈 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 일이다. 오늘 내가 간 자취를 따라 뒷사람들 발길이 이어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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