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벽 동트기 전에 여기 이르러 내리 있는데, 형씨가 처음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여태 빈속으로 있다가 고기를 데운 참에, 먹을 복 있는 형씨가 나타난 거죠. 아, 나는 홍범도입니다. 형씨 성명은 어찌 됩니까?"
"나는 김수협입니다. 무진년(1868년)생이고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무엇을 위해 여기 왔나. 범도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평양 진위대에서 우영장 유등한테 대섰다가 영창에 갇혔다. 내일이면 참수형에 처해지기로 된 밤에 좌영장 주홍석이 탈출을 도와줬다.

그놈을 죽였다. 신계사 의성 대사와 지담 스님을 만나 글을 깨치고 몸을 단련했다. 모지 스님 이옥영을 만나 사랑하고 혼인했으나 그이를 놓쳤다. 그이를 놓치게 했던 덕원 건달 여섯 놈을 찾아가 복수했다.

"나는 호랑이 밥이 될 것인가, 호랑이를 잡을 것인가! 그 궁리 하고 있어요. 호랑이한테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느라 고기 냄새 피우는 거고요. 생고기 구울 때 풍기는 과격한 냄새가 나지 않아서인지, 호랑이가 기척이 없네요."

"드물게 썩 용감한 자, 혹은 드물게 아주 우둔한 자만이 모든 위험을 무릅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용감한가, 우둔한가! 용감함과 우둔함 사이에 앉아서 호시기를 불러다 앞에 두고 계속 그 말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맞아요. 내가 잡아볼까 하는 호시기는 조선을 향해 총질 해댄다는 왜국 종자들입니다. 왜국 것들은 물론이고 청국 것들, 미국 것들, 영국 것들, 독일 것들, 로서아 것들, 불란서 것들. 어느 족속이건 조선을 뜯어먹으려 드는 것들은 죄 호시기일 테니까 되는 대로 잡아볼까 생각하는 거죠. 몇 마리나 잡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말을 하고 나니 범도는 비로소 여기 앉아 있던 까닭을 알겠다. 결국 그거였다. 호시기 잡기. 호시기에 쫓기듯 살아왔던 지난날에서 돌아서 호시기를 쫓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기.

"그랬대요. 그 백성들, 그 중들이, 나라에서 무슨 은혜를 받았겠어요? 은혜는커녕 관헌들이 자행하는 탐학과 주구誅求에 시달리며 살죠. 그럼에도 조선이 내가 사는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의병으로, 승병으로 일어난 거라고요. 우리끼리는 죽네 사네 하며 싸우기도 하지만 외세에 침탈당할 때는 한 몸인 듯이 외세에 대적해야 한다고요. 그게 백성이라고요. 그렇지 못하면 우리 백성들끼리 싸울 일조차 없어져버린다는 말씀이셨죠."

"아니, 예전에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 물어봤소. 이러셨소. 자신이 운이 나빠서 뭔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상 힘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갖춘 실력이 없거나 낮은 거다. 실력 갖춘 이는 운을 탓하지 않는다. 운에 의존하는 사람은 실력을 닦지도 않는다. 너는 네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 있느냐?"

"이제부터 우리는 총을 쏘아야 하므로 손을 보배처럼 여겨야 해. 손가락은 곱게 놔두고 대신, 결의를 다지기 위한 말을 한마디씩 하는 게 어떨까?"
"뭐라고 하지?"
"좀 거창하게, 조선을 지키는 우리, 져도 이긴다! 어때?"

"져도 이긴다? 나는 진다는 말이 싫은데? 조선을 지키는 우리, 끝내, 끝끝내 이긴다! 이렇게 어때?"

"조선을 지키는 우리, 끝내, 끝끝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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