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 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어느 때곤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덜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항상 소수파였다.
완벽한 승리는 애당초 기대 밖의 일이었고 안타깝고 답답할 정도의 작은 진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걸핏하면 너희들이 ‘보릿고개를 아느냐’, ‘전쟁을 알기나 하느냐’면서 질타한다. 그들에게서 인간성을 느끼기 어렵다고 말할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인간을 사랑하는 한, 인간의 삶을 사랑하는 한, 인간다움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그러했다. 이 땅은 나에게 실존적 고민의 한가운데서 선택한 시지프스의 바위였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상황은 마치 고릴라가 사람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여 잘만 하면 사람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얼토당토않은 부조리의 연속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성과에 대한 조급성과 일에 대한 전문성과 지적, 논리적인 취약함을 은폐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다.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에게 남는 건 낭패감과 박탈감뿐이다. 정신적 공황을 피할 수 없었고 올바른 생활은 개그가 되었다. 차차 부도덕한 사회의 비도덕적인 개인들이 되었고 고릴라가 들어설 자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나의 20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을 위해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20대의 젊음은 분출하는 욕망과 삶을 향한 벅찬 기대, 그리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예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시절에 20대를 맞아야 했던 우리 세대는 억압된 욕망과 자유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회의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신에 우리에겐 자유와 민주의 복원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의 열망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자유 역시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 지나치게 구체화되고 개별화되어 마치 상대적 가치인 양 그 실용성이 강조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부정하거나 잊어버려선 안된다.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살았다. 영혼을 떠나보내지 않고. 그래서 아픔은 있었지만 후회는 없다.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아쉬움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 남을 것이지만.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밖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
다시금 강조하건대, 그것은 일상적으로 그대를 유혹하는 물신에 맞설 수 있는 가치관을 형성하는가와 자기성숙을 위해 끝없이 긴장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땅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는 것을. 이 땅이 학살의 땅이었다는 것을. 일제 강점기에 이은 분단과 전쟁,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학살의 기억은 살아 있었고, 사람들은 집단 속에 숨어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터득했다. 특히 양심, 정의, 인권, 인간성은 단호하게 멀리 해야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가치를 따르는 것을 변절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가치관이 바뀐 것이 아니라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했던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였는데 인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합리적 동물’이기보다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고, 그래서 우리가 내면화하고 일상화한 합리화의 속살은 대개 ‘현실적 성공’과 ‘명분’이라는 떡을 양 손에 쥐겠다는 욕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 우리의 인생은 실패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 기억만으로도 우리는 평온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
어느 소설의 주인공은 말했다. 역사는 아주 더디고 지루하게 조금씩 바뀐다고. 맞는 말이다. 그래서 변화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위한 삶인가에 대한 선택이 스스로를 지켜내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거듭 확인해야 할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스스로 바뀌고, 또 권력을 장악한 뒤에는 더 바뀐다. 세상은 바뀌지 않은 채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만 바뀌는, 이 조화는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긴장은 긴(緊)과 장(張)이 합쳐진 말이다. 내가 말하는 긴장은 문자 그대로 ‘긴’과 ‘장’이 합쳐진 것으로 ‘줄어듦’과 ‘베풂’ 사이의 균형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긴장(緊張)한다’고 말할 때처럼 오로지 ‘긴(緊)’만 뜻하는 게 아니다.
침묵은 때로 타인의 잘못된 선택에 편승해 열매를 탐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내면에 감춰진 자신의 욕망에 대한 면죄부가 되기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기 위한 유보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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