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박정희의 삶에는 네 번의 결정적 변신이 있었다. 첫 번째는 국민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해방 직후에 광복군에 들어간 것, 세 번째는 남로당에 가담한 것, 마지막으로는 여순사건 이후 단행된 숙군과정에서 다시 한번 극적인 변신을 해 살아남은 것이다.

박정희의 망령은 ‘근대화의 기수’, ‘고독한 혁명가’, ‘눈물 많은 초인’, ‘보릿고개를 없앤 강력한 지도자’, ‘속옷을 꿰매 입은 청렴한 대통령’ 등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휘감고 되살아나 강시 선생처럼 우리 사회를 콩콩 뛰어다닌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뒤 계속돼온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 속에서 그가 키워낸 ‘새끼 박정희들’의 난장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급히 변하다 보니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시류에 휩싸여 변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는데 옛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변신은 횟수도 그렇지만 남다른 데가 있었다. 앞의 세 번의 변신은 불행한 기회주의자의 막차를 탄 변신이었다는 점이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자들은 박정희가 일본인 교장과 싸운 뒤 교사직을 던지고 만주로 갔다고 하지만, 박정희 자신은 만주행의 동기를 "긴 칼 차고 싶어서"라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한마디로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그는 나이 제한이 일본육사보다는 덜 엄격한 만주의 중앙육군군관학교 진학을 모색했다. 이때 박정희는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滅私奉公)이라는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보냈고, 이 혈서는 만주의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한 박정희는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일본인 졸업자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만주인 동기생들과 함께 일본육사 3학년에 편입해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했다.

박정희를 미화하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민족해방의 기쁨보다는 걱정을 안게 된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국민이 구차해진다는 이 실감, 해방이 몰고온 모순과 곤혹과 갈등의 이 체험은 박정희를 자주인(自主人)으로 빚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박정희가 해방 이후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광복군의 이념이나 정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하나의 보신책이었다. 국제 정세에 어두운 박정희로서는 광복군이 해방 이후 국내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보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베이징에서 귀국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에서 이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