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가 말하는 홍세화
장발장은행의 은행장을 맡고 있다. 회사원, 관광안내원, 택시기사에 이어 신문기자와 소수파 진보정당의 대표를 거쳐, 급기야 은행장의 직함까지 갖게 되었다. 주식도 없고 스톡옵션도 없는,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일 것이다.

결 : 거칢에 대하여 | 홍세화 저

난민 생활 20년 뒤 귀국이 가능해졌을 때 파리를 좌우로 나누며 흐르는 센 강변에서 소박한 다짐이 있었다. 우연의 산물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없었더라면 센 강변에서 배회하다가 소멸했을 존재의 자리에서 사물과 현상을 보고 글을 쓰겠노라는 다짐이었다. 내 딴에 그것은 자유인의 선언이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베스트셀러에 속했고 나의 형편을 다르게 했다. 그 책으로 나는 보잘것없지만 상징자본까지 갖게 되었고 언론고시를 치르지 않고 언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자유인 선언은 나를 지킬 만한 물적 조건을 갖게 된 자로서 오랫동안 불안에 시달리며 살았던 나 자신에 대한 연대의 표시이기도 했다.

세월은 또 흘렀고 적잖은 선배와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다. 나를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으로 이끈 고교 동창생 박석률도 3년 전에 세상을 떴다. 모진 고문과 오랜 수감생활을 겪었던 그는 끝내 이 세상의 광영과는 티끌만치의 인연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나오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문장이 자주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던 덕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김학철 선생은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인간답게 살려거든 그에 맞서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간디는 거의 한 세기 전에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회악으로 일곱 가지를 꼽았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덕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헌신 없는 신앙’이 그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가까이 지났지만 그가 꼽은 일곱 가지 사회악은 이 땅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 세상을 조금은 더 정의로운 세상, 조금은 더 자유가 확장되고 약동하는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게 우리 삶의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끝내 철들지 못한 것도, 그래서 글이 섬세하지 못한 것도, 그런 안간힘에서 비롯되었다고 변명하는 것까지.

빅토르 위고가 소설 『93년』에서 "혁명의 절대성 위에 인간의 절대성이 있다"고 말했던 것은, 인간과 사회를 위한다는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 자체에 인간과 사회를 배반할 인자를 내포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과거에는 노예들 중 소수가 해방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면, 오늘 ‘멋진 신세계’의 노예들은 대부분 계속 노예로 편하게 살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편하고 안락한 삶에 대한 욕망 앞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는 점점 더 힘을 잃고 있다.

이 거친 글은, 감히 말하건대, 한국 사회라는 산(山)에서 내려오는 한 선배가 산에 오르는 젊은 후배와 만났다고 가정하여, 누구의 어법을 빌려 다시 또 감히 말하건대, ‘조금 더 낫게’ 패배하는 자유인이 되게 하고 싶은 안간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설령 그 후배가 소수도 아닌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남이 당신의 몸에 함부로 범접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당신 또한 남의 몸에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 모든 사람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몸에는 생명과 정신이깃들어 있다. 모든 여자와 모든 남자, 모든 어린이와 모든 학생, 모든 노인의몸을 존중하라. 완력이 약하다고 여성, 어린이, 노인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것은 어떤 사연이 있든 그 자체로 야만이다. 모든 장애인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체육 선수들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성소수자와 이성애자의 몸을, 모든노동자의 몸을,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이주노동자의 몸, 모든 이주여성의 몸, 모든 난민의 몸을 존중하라. 모든 재소자의 몸을 존중하라. 그리하여 모든 내 가족의 몸을, 모든 이웃의 몸을 존중하라. 이것이 자유와 인권의 출발점이며 조건인 하베아스 코르푸스(habeascorpus) 정신이다.

‘짓다’라는 우리말 동사는 흥미롭다. 농사를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는다’고 써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가 모두 ‘짓다’라는 동사의 목적어가 된다.

우리 각자에게도 잘 지어야 할 게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한번 태어난 존재인 나, 나를 잘 지어야 한다. ‘나를 어떤 존재로 지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부단히 던져야 한다. 나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나를 잘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과 비교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우리 학교 교육은 어린 시절부터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 데 익숙하게 만든다. 남보다 우월한 나를 추구한다면, 내 삶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남이 된다. 그런 삶에서는 나를 짓는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어렵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통해 통찰했던 것은 ‘악의 평범성’이 "사유하지 않는"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강조했듯이, 자유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까지만 인정된다.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적극적 자유가 전제(專制)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힘센 자의 적극적 자유 행사가 많은 사람의 소극적 자유를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질’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소극적 자유도 누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겠습니까?"

"괜찮지.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겠다."

우리는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가난하면 즐거울 수 없고 부유하면 예를 좋아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 나를 고결하게 짓는 자유의 길은 과거보다 더 절차탁마를 요구하고 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사단’, 즉 맹자에 따르면 인간의 조건이며, 퇴계(이황)나 고봉(기대승) 선생에 따르면 인간에게 선함을 발현케 하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출세하려면 멀리해야 하는 가치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