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머리에 프로펠러가 연자간 풍차보다 더 빨리 돈다.
땅에서 오를 때보다 하늘에 높이 떠서는 빠르지 못하다 숨결이 찬 모양이야.
비행기는 새처럼 나래를 펄럭거리지 못한다 그리고, 늘 ― 소리를 지른다. 숨이 찬가 봐. - P35
가을밤
궂은비 나리는‘ 가을밤 벌거숭이 그대로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마루에 쭈그리고 서서 아인 양하고 솨---- 오줌을 쏘오.
1. 나리는: 내리는. - P36
봄
우리 애기는 아래 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 소올소올
아저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 - P37
편지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 P39
눈
눈이 새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하오. - P40
황혼이 바다가 되어
하루도 검푸른 물결에 흐느적 잠기고... 잠기고...
저 웬 검은 고기 떼가 물든 바다를 날아 횡단할꼬.
낙엽이 된 해초 해초마다 슬프기도 하오.
서창(西窓)에 걸린 해말간 풍경화, 옷고름 너어는 고아의 설움
이제 첫 항해하는 마음을 먹고 방바닥에 나뒹구오... 뒹구오...
1. 너어는: 깨무는. - P41
만돌이
만돌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전봇대 있는 데서 돌재기 다섯 개를 주웠습니다.
전봇대를 겨누고 돌 첫 개를 뿌렸습니다. -딱 - 두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세 개째 뿌렸습니다. -딱- 네 개째 뿌렸습니다. -아뿔싸- 다섯 개째 뿌렸습니다. -딱-
다섯 개에 세 개... - P43
그만하면 되었다. 내일 시험, 다섯 문제에 세 문제만 하면 -손꼽아 구구를 하여봐도 허양 육십 점이다. 볼거 있나 공차러 가자.
그 이튿날 만돌이는 꼼짝 못하고 선생님한테 흰 종이를 바쳤을까요. 그렇잖으면 정말 육십 점을 맞았을까요. - P44
달밤
흐르는 달의 흰 물결을 밀쳐 여원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북망산을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고독을 반려한 마음은 슬프기도 하다.
누가 있어만 싶던 묘지엔 아무도 없고, 정적만이 군데군데 흰 물결에 푹 젖었다. - P45
그 여자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던 손님이 집어 갔습니다. - P49
비애
호젓한 세기의 달을 따라 알 듯 모를 듯한 데로 거닐과저!
아닌 밤중에 튀기듯이 잠자리를 뛰쳐 끝없는 광야를 홀로 거니는 사람의 심사는 외로우려니
아-이 젊은이는 피라미드처럼 슬프구나 - P50
산협의 오후
내 노래는 오히려 섧은‘ 산울림.
골짜기 길에 떨어진 그림자는 너무나 슬프구나.
오후의 명상은 아 졸려.
1. 섧은: 서러운. - P52
유언
훤한 방에 유언은 소리 없는 입놀림.
-바다에 진주 캐러 갔다는 아들 해녀와 사랑을 속삭인다는 맏아들 이 밤에사 돌아오나 내다봐라—
평생 외롭던 아버지의 운명(殞命), 감기우는 눈에 슬픔이 어린다.
외딴집에 개가 짖고 휘양찬 달이 문살에 흐르는 밤. - P53
"당시 일제의 증오의 대상이 된 연희전문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때에민족 운동의 본산인 연희동산을 찾아오는 이들은다 제각기 뜻이 있어 온 젊은이들이었다." - P55
"동주와 자주 거닐던 연세동산의 산길들, 특히 청송대의 소리길들, 산 밑 잔디밭, 그의 보금자리요시작(詩)의 산실인 기숙사의 천장이 낮은 다락방, 이 모두가 동주의 눈길과 소리가 어린 곳이었고 그의 시의 만상의 원천이었다." -유영, 연희전문학교 동기, 전 연세대학교 교수 - P55
"이화여전 구내의 협성교회에 다니며, 케이블 목사 보인이 지도하던 영어성서반에 참석하기도 한다. 윤동주는 이 합동 성서반원에 속하는 이화여전 여학생 중 한 사람을 묵묵히 좋아했다고 한다." -친구 정병욱 - P55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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