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상황이 맞아야 이뤄진다고, 은혜의 마사 출입은 시도 때도 없이 문을 열어주는 북문 보안관 다영과 그런 은혜가 오기를 기다리며 말 사료를 쌓아놓는 마사 관리인 민주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사람은 편안했다. 실제로도 보경이 지하에 있을 때 만나지 않았던가.
"사람은 기계와 달라서 꺼진다고 완전히 멈추는 게 아니니까요. 3%라는 뜻은 말 그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에요."
우리에게 희망이 1%라도 있는 한 그것은 충분히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에너지가 될 것이라고.
소방관의 그날 생존율은 80%였다.
"3%도 살았는데 80%는 왜 못 살아. 당신 왜 이러고 있어."
보경에게는 소방관의 사망보험금이 들어왔다. 회사에 다시 들어가야 했지만 보경을 받아주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전에 다녔던 회사에 다시 연락을 해볼까 싶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은혜와 연재는 키워야 했고 보경은 혼자 남았다. 3%의 생존율로 살아남았던 보경은 이제 300%의 삶을 짊어지게 된 셈이었다.
보경은 다짜고짜 은행을 찾아가 소방관의 사망보험금으로 남은 세 식구가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물었다. 모친의 자리를 빼앗았던 휴머노이드는 보경에게 식당 경영을 제안했다. 보경의 삶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모친이 식당을 운영한 기록이 있으며 식당의 손님 수가 큰 격차 없이 꾸준함을 유지했던 것으로 미루어 안정적인 선택일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곳이 보경 삶의 정착지처럼 느껴졌다. 더 바라는 것도 없었다. 보경은 그저 시대를 새로운 혁명으로 인도했다는 로봇들이 싫었으므로 더는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의문이 연재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 후 연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조차 포기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다 접어도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삶의 격차라는 것이 어느 틈을 비집고 생기는 것인지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똑같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부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어떤 아이들에게는 다가갈 수조차 없을 만큼 차이가 났다.
우리 부모님도 돈을 벌고, 우리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이에 이만큼 차이가 나는 걸까. 그 의문이 연재의 생각을 좀먹기 시작한 후 연재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헤아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조차 포기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다 접어도 가지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연재가 가지지 못한 것 중에는 전자기기도 있었고, 책도 있었고, 옷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휴대폰이나 태블릿, 워치 같은 것들이 두드러졌다.
가지고 싶다는 욕심보다도 ‘너는 왜 이거 없어?’ 하고 물어 오는 아이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이 괴로웠다. ‘샀는데 잃어버렸어’라는 거짓말을 했다가 어느 날 꿈에 침대 밑으로 큰 구멍이 나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 이후로는 그 말도 멈췄다. 그 후에는 입을 닫았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들이 각기 다른 몸값을 지니고 나왔다. 연재는 그것이 정말로 필요해서 생긴 것인지 생김으로써 필요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연재와는 상관없이 빠른 속도로 많은 것을 탄생시켰다. 그제야 삶의 격차가 어느 틈을 비집고 생겼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건 연재의 균열이라기보다 부모님, 그리고 그 부모님보다 더 먼 부모님의 삶 어디에선가부터 천천히 시작된 균열일 것이다. 연재가 스스로 절대 여밀 수 없는 크기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힘은 결국 문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지수가 전동킥보드를 타고 유유히 옆에 섰을 때 연재는 하마터면 불공평한 세상에 침을 뱉을 뻔했다.
"너 그렇게 안 보이는데 공부 빼고 잘하는 거 되게 많구나."
"…욕 같은데."
"욕 맞아. 요즘 세상에 공부만 잘해도 모자랄 판에 공부 빼고 다른 거 다 잘해서 뭐 먹고 살 건데?"
코나 귀에 피어싱을 잔뜩 뚫지도 않고 담뱃갑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 통풍이 될 정도로 넉넉한 교복을 입고 화장기 없으나 생기 있는 얼굴로 웃고 있는 친구라니. 보경은 연재와 친구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고, 친구는 자신의 소개가 부족해서 반응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다시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요, 달릴 때 저 애한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라요. 무작정 빠르게 달리기 위해 다리를 뻗는 것이 아니라 그 발짓이 우아해요. 발레하는 흑조 같아요. 동물 흑조 말고요. 흑조를 연기하는 발레리나요."
"쟤가 얼른 나아서 다시 주로에 섰으면 좋겠는데 그럴 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아서 요즘은 그게 조금 그래요. 희망이랄 게 정말로 없는 것 같잖아요."
"동물에도 관심 많아요. 동물을 너무 좋아해서 탈이기도 하고. 오빠가 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어요. 앱이 업데이트되는 속도가 동물의 멸종 속도와 같대요. 제가 앱 하나를 업데이트할 때마다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완전히 멸종한다는 괴상한 말이에요."
케냐에서는 마사이마라로 불렸고 탄자니아에서는 세렝게티라고 불렸다.
"자신들의 종족을 없애는 게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만을 바라야죠."
그로부터 며칠 후, 얼룩말의 집단자살을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복희는 관리인의 말을 평범한 농담쯤으로 받았을 것이다.
요즘 애들이야말로 서로에게 득이 되지 않는 관계는깔끔하게 쳐내는 기지를 잘 발휘하지 않던가. 누군가는 경쟁시대에익숙해져 유대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했지만 보경은 그런 면모를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았다. 도움 되지 않는 관계에 얽혀 시간을 허송으로 낭비하는 것보다야 현명했다.
뭘 또 그렇게 해요, 그냥 좀 쉬지. 당신도 간만에 시간 낸 거잖아. 당신 몸도 챙겨야죠. 소방관이 있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상체를 일으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웃음이 났다. 아직도 청승을 떨 기력이 남아 있는 자신이 새삼 대견스러웠다. 그리움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그 순간을 만끽할 수 있게 준비라도 할 텐데, 친절하지 못했던 이별처럼 그리움도 불친절하게 찾아왔다.
주원의 소식은 여름방학이 끝난 후에 들었다. "수술을 했대." "무슨 수술?" "렌즈삽입수술." "정말?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미국에서는 된다는 소식 듣고 그거 하려고 미국 갔다더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돈까지 빌려서 갔대."
은혜는 지금이야말로 잠적을 끝낼 시기이며, 세상에 한 방 먹일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오랜만에 일기장을 펼쳐 은혜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강하다. 나는, 지킬 수 있다.
"네, 친한데요. 왜요?" "아니, 둘이 노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담임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학교가 노는 곳은 아니잖아요, 공부하는 곳이지. 아무튼 저희 그럼 가볼게요."
보경은 에이스 경주마 같았다. 쉬지 않고, 빠르고, 세다. 힘든 건 별개의 일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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