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지구에는 약 78억 명의 인구가 있다. 만약 100억 분의 1의 확률로 발생하는 사건이 있다면 현재 살고 있는 사람 중 거의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기적이라 부른다. 인간의 존재도 이런 기적일까? 만약 골디락스 존 행성에서 인간과 같은 고등 지능을 지닌 생명체가 등장할 확률이 100억 분의 1이라면, 지구의 관점에서 이는 100억 분의 1의 극히 희박한 확률이 실현된 것이다.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전 우주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는 더 이상 기적이 아니다. 우주에 1022개가 넘는 골디락스 존 행성이 있다면 그중에 1조 개가 넘는 곳에서 인간과 같은 지적 생명체를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지적 생명체의 존재는 오히려 우주적 필연이다. 이처럼 우주는 기적을 평범함으로 바꿔놓을 수 있을 만큼 광대하다. 우주에 관해 점점 더 잘 이해할수록 우리는 혼자가 아닐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약 6500만 년 전 혜성과 지구의 충돌은 공룡을 멸종으로 이끌었지만 전 지구적 관점으로 볼 때 생명은 여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았고 포유류가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자신을 적응시키며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은 생명의 위대한 특성이다. 이런 생존 능력은 결국 생명의 진화를 이끌어낸다.

진화할 수 없는 것은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라는 현상을 태초부터 미리 정해진 ‘원형’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고정된 질서는 생명에게 죽음을 뜻할 뿐이다.

우주생물학의 관점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바위 안에 서식하는 미생물인 암석균endolith이다. 한 예로 지옥의 간균bacillus infernus이라 불리는 미생물은 지하 2.7킬로미터 정도에 서식하며, 진공 상태에서나 막대한 방사능에 노출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고 철과 이산화망간으로 대사 작용을 한다. 우리가 생명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태양 빛 없이도 생존하는 생물이 있다는 의미다. 만일 그렇다면 화성이나 금성의 지하에도 비슷한 균들이 득실거리고 있지 않을까?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토성의 위성인 엔셀라두스Enceladus 등의 지하에도 이런 미생물들이 서식하지 말란 법이 없다.

생명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주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골디락스 존에 있는 지구형 행성에서 생명이 탄생할 확률이 설사 100퍼센트는 아닐지라도, 수 퍼센트 이상 혹은 심지어 수십 퍼센트에 달한다 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강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여러 다양한 생물이 ‘두 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저 무작위적인 우연일까? 아닐 것이다. 눈이 하나라면 가깝고 먼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원근감을 가질 수 없기에 생존에 불리하다. 눈이 세 개라면? 고등 생명체는 5퍼센트에서 15퍼센트에 달하는 생체에너지를 시각 정보처리에 사용할 만큼, 눈을 통해 처리하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다. 눈이 두 개라도 충분히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더 많은 눈을 달고 다니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할 만한 사치를 부릴 여유가 생명에게는 없었을 것이다. 둘은 최소의 에너지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최적화된 눈의 개수인 셈이다.

눈과 관련해 더욱 놀라운 사실이 또 있다. 인간과 문어의 눈을 비교해보면 세부적인 차이는 있지만, 오목한 망막, 렌즈, 렌즈를 보호하는 눈꺼풀 등의 기본적 구조가 같다. 인간과 문어의 공통 조상이 유사한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둘의 공통 조상은 이렇게 복잡한 눈을 갖고 있지 못했던 단순한 벌레 같은 생물이었다. 그 이후의 진화는 서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졌고, 인간과 문어의 눈은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다.

인간과 문어의 눈이 유사하다는 점은 생명이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중에 현재와 같은 형태의 눈이 가장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임을 암시한다.

서로 독립적으로 진화했음에도 비슷한 형태의 기관이나 기능을 갖게 되는 생명의 현상을 흔히 ‘수렴진화’라고 한다. 수렴진화의 다른 예로는 물고기와 돌고래의 외형을 들 수 있다. 돌고래의 조상은 9500만 년 전에는 육상에서 생활하던 평범한 네발 달린 털북숭이의 포유류 동물이었다.

수렴진화는 생명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할 때 선택지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구와 외계 행성의 환경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행성에 물로 가득 찬 바다가 있다면 그 모습이 지구의 바다와 크게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돌고래가 미적분과 리만기하학을 사용하며 스마트폰을 개발하는 등의 과학기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아마 바닷속의 안락한 환경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문명을 발달시키는 일이 그들에게는 불필요할 것이다. 혹은 돌고래가 입과 지느러미로 미켈란젤로에 버금가는 대리석 조각을 만들 수 있을까? 아쉽지만 그들의 생물학적 한계는 명백하다. 과학기술 문명의 실현을 위해서는 바다를 벗어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해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심지어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여러 지적 생명체의 가능성 중에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과학기술 문명을 성취하기에 가장 최적화된 솔루션이라고.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편견일까?

우리는 지구를 침략하고 정복하는 외계인이라는 이미지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있다.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그의 저서 『코스모스COSMOS』에서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한 예를 들며 외계인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인간의 원죄 의식을 반영함을 지적한다.

만일 지구를 방문하는 외계인이 그런 문명을 1000년 이상 지속해왔다면, 그 오랜 ‘시간’이 주는 무게에 걸맞은 성숙함을 갖추었으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까?
아마 외계인을 만날 때 우리의 감정은 낯선 이방인을 대할 때 갖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는 두렵고 경계하지만, 그들은 결코 괴물이 아니라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성 정체성, 세대, 환경 등의 문제로 현재 사회에서 겪는 다양한 갈등을 마주할 때 우리가 과연 지금 외계인을 만날 자격이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어쩌면 외계인이 아직 우리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준비될 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빅뱅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빅뱅이라는 현상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현재로서는 더 이상 반박이 어려운 과학적인 사실로 확립되었다. 빅뱅을 입증하는 증거가 너무나 압도적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특정 모습을 영원한 본질로 규정하고 그 틀에 맞지 않는 모습이 발견되면 죄, 타락, 혹은 합목적성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던 과거의 구습은 수많은 억압과 비극의 근원이었다. 하지만 별 먼지인 인간의 많은 측면은 역사의 여러 특수한 상황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는 인간의 미래 역시 미리 정해진 질서에 구속받지 않고 열려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주의 광대함에 압도되어 우주의 끝이 어디인가를 종종 묻곤 한다. 하지만 우리를 더 설레게 하는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주가 내재하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들의 한계는 무엇인가?인간의 역사도 우주 역사의 일부이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과정이다. 앞에 놓인 여러 가지 중요한 갈림길에서 인간이 택하는 여러 가지 선택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저 밖의 밤하늘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 한계를 찾고자 구석구석을 헤매고 있다. 외계에서 발견될 생명의 다양성은 우리 지구에서 관찰된 것에 비해 과연 얼마나 더 광대할까? 지구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보편성은 외계에서도 여전히 적용될 수 있을까? 인간보다도 더 경이로운 현상이 저 우주 어디에선가 일어날 수도 있을까?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질문은 과연 어디에서 멈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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