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섬찟할 만큼 아름다운 시선 김초엽 신작 장편소설
"나는 너의 일부가 될 거야.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 사랑해. 그리고 이제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
반년 전, 그 애가 여기 맡겨질 거라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선오는 조금 들떠 있었다.
델마 할머니는 곤란한 표정을 하고는, "참 어쩌면 좋아. 얘야, 저 아이도 너와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데 둘이 마음이 통하는 부분이 있지 않겠니?" 하고 선오에게 속삭였다.
델마 할머니가 물고 온 소문에 따르면 이제프라는 사람은 얼마 전 지상으로 떠나버린 파견자였고, 몇 년 뒤에야 지하 도시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애는 버려진 것이다. 선오는 그렇게 이해했다.
나는 너의 일부가 될 거야. 어떤 기억은 뇌가 아니라 몸에 새겨질 거야. 너는 나를 기억하는 대신 감각할 거야.
사랑해. 그리고 이제 모든 걸 함께 잊어버리자.
자스완이 ‘애정을 담아’ 손수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부적절한 맛이 나는 굴라시였다. 시험을 앞둔 태린의 기운을 죽여서 탈락하게 만들려는 음모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바쁘다고. 그런 거 신경쓸 겨를이 없다고. 일생일대의 중요한 시험이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내 인생을 바꿀 시험이."
"열네 살 때였다면 그렇겠지."
"지금은 아니야?"
"지금도…… 그래, 솔직히 궁금하긴 해. 나도 네가 말한 그 진동, 느꼈으니까. 조사해보는 건 네 맘이지. 그렇지만 난 안 돼. 지금 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시험이 더 흥미롭거든."
태린의 법적 보호자이자 어린 태린과 선오를 혼자 키워낸 ‘아버지’인 자스완은 원래 유능한 파견자였다고 한다. 동생과 관련된 명령 때문에 상부에 강경하게 맞서는 바람에 파면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생의 죽음도 파견 본부와 관련되어 있었다. 태린이 선오와 하라판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그랬다. 자스완은 절대 파견자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시험 준비하다가 미쳐버렸단 거야?"
"어, 꼭 미친 사람들만 환청을 듣는 건 아니야. 나도 듣는데."
자아가 해체되고 자신이 이 현실에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는,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그러다 결국 미쳐버리고, 사나워지고, 때로 끔찍한 일을 벌이기도 하겠지. 언제까지 여자는 기계들로부터 숨을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설령 숨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 끝이 멀쩡하긴 할까?
파견자를 꿈꾸는 이들은 오직 파견자에게만 주어지는 것들을 갈망했다. 명예나 부, 은퇴 이후에 오는 안정적인 삶이든, 혹은 지상을 밟을 특권 그 자체이든. 파견자가 되기로 이미 결심한 이들에게 그 외의 것들이 눈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파견자는 매료와 증오를 동시에 품고 나아가는 직업입니다. 무언가를 끔찍하게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증오해야 합니다. 그걸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파견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하세요. 뛰어난 동료로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니까. 못하겠다면, 그냥 더 나은 길을 찾아봅시다."
"무슨 헛소리야? 거긴 아무도 안 살아!"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태린은 벽에다 귀를 붙이고, 옆방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들어보았다.
벽 너머에는 정적뿐이었다.
—지상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야. 위험한 곳이지. 모두가 그곳에 갈 이유는 없어.
그때 태린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위험하더라도 지상을 보고 싶다고, 미지의 세계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가.
원하면 원할수록 지표면은 손 아래에서 닳아갔다. 태린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지상으로 가고 싶은 것일까. 지상을 얻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 지상을 쫓는 사람을 갈망하는 것일까.
"난 발현자들을 많이 봐왔어. 범람체에 의한 광증은 확실히 달라. 그건 자아가 해체되는 과정이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자신의 몸과 정신을 스스로의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은 과거와 현재를, 자전적 서사를 잃어버리는 거야. 환각이나 환청도 일부 증상이긴 하지만 넌 그 경우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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