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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민족문제연구소 창립과 더불어 임종국 선생의 유고를 모은 《실록 친일파》가 출간된 지 30년 만에 만화로 《친일파 열전》을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친일파 열전》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 중 약 150여 명의 대표적 친일파를 작가 특유의 재치와 간결함으로 잘 담아낸 작품입니다.

송병준·이완용,
헤이그에 특사 파견한
고종에게
"퇴위로 사죄하라"
1907년 7월

"동의 또 동의"
감격적인 합병...
데라우치 총독과
이완용 총리대신이
양국을 대표하여 승인하다
1910년 8월 22일

이토 히로부미공을
암살한 흉행자兇行者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3·1운동은 불순 세력에 의한 난동"
이완용 백작 엄중 경고
<매일신보> 1919년 4월 5일 자

경성의 명소로 우뚝 선
조선총독부 신청사, 찬란하여라
1920년 7월 10일

박중양
"불령한 소요……경거망동 자제해야"
3·1 자제단 결성
1919년 4월 6일

윤치호
학병을 보내는 명사의 말
"장하다, 그대들 용단,
오직 순충봉공에 몸을 바치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22일 자

이승만 대통령,
‘친일파 처단에 대하여 담화 발노
"지금은 친일파 처리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1948년 9월 3일 자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 히로부미 특파대사 일행이 한국에 체류하는 일본의 군인, 외교관원들과 찍은 기념사진.
장소는 하세가와 요시미치 한국군사령관의 관저인 대관정(亭 대한제국의 영빈관이었다),
사진을 찍은 날은 이토가 임무를 완료하고 한국을 떠나기 전날인 1905년 11월 28일이었다.
사진의 첫줄 가운데(왼쪽에서 다섯 번째) 지팡이를 짚고 있는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
그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을사조약 체결에 큰 공로를 세웠던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
이토의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을사조약 체결 당시 무력시위를 벌였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한국주차군사령관이다. - P25

정미칠적: 이완용, 조중응, 고영희, 이병무, 임선준, 송병준, 이재곤 - P27

후작의 작위를 받은 6명은 순종의 장인 윤택영,
철종의 부마이자 갑신정변의 주역 박영효,
왕족인 이재완, 이재극, 이해승, 이해창이다. - P34

백작 작위를 받은 3인은 을사오적 이완용과 이지용,
그리고 민씨 척족 민영린이다. - P34

부작용도 있었다.
김석진, 한규설, 유길준 등 8인은 작위를 반납했고
김사준은 독립운동을 하여 작위를 박탈당했다.
나머지는 거의가 작위를세습하며 친일파로 살았다. - P34

은사금을 받는 유생들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일제는 황족과 친일파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광범위하게 사금을 살포했다.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돈으로 조선인들을 회유하고자 한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은사금을 받은 이들은 전국에 걸쳐 양반 - 유생 12,115명, 효자·절부(婦) 3,209명,
홀아비 · 과부 · 고아 · 독거노인 70,902명 등 86,226명에 달했다.
이들에게 지급된 은사금 총액은 535,900원이었는데, 어림잡아도 현재 가치로 100억이 넘는 돈이다.
그런데 당시 은사금을 받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일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 삼척의 양반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가운데한 유생이 은사금을 받고 있는 사진이다.
전1911년 12월 6일 자 <매일신보>에는 이날 은사금을 받은 양반. 유생들이 천황의 은혜에 감읍한 나머지 그  공덕을 길이 기리고자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삼척 죽서루 옆에 ‘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온다.
천장지구란 하늘과 땅처럼 영원함을 의미하는 말인데,
일본 천황의 장수를 기원한 것이든, 일제 식민통치의 영원함을 기원한 것이든, 양반 유생이라는 자들이  돈 몇 푼에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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